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2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2화
* * *
내가 이 세계가 소설, 그것도 복수극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내 조카, 루카 덕분이었다.
루카 마이바움
그리고 추후에 루카 빈터발트가 되는, 「겨울 숲의 주인」의 주인공.
나는 유난히 복수극을 좋아했다.
주인공이 데굴데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구르는 것도 좋았고, 복수의 순간 짜릿하게 전율하는 카타르시스도 끝내줬다.
내가 좋아하는 고전문학은 몽테크리스토 백작,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박X욱 복수 3부작…….
장르 소설에서는 바로 「겨울 숲의 주인」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를 모르는 사생아였던 남자아이, 루카에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숙부라 주장하는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는 루카가 빈터발트 공작가의 핏줄이라 주장하고, 그렇게 루카를 후계자로서 빈터발트에 데려간다.
물론 빈터발트 공작가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들은 사생아인 루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공작이 되고자 하는 방계 친척들의 음모와 술수.
어린아이였던 루카는 그들 앞에서 너무나 무력했다.
결국 루카는 방계의 친척들에게 많은 것을 잃는다.
지위, 명예, 작위는 물론이거니와, 루카의 유일한 직계 혈육들과 그를 지켜주던 버팀목들도 모두 죽게 된다.
한마디로 루카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다.
루카를 데려간 숙부도 그렇고, 내 몸 주인, 유디트 마이바움도 그렇고.
설상가상으로 루카 또한 암살 시도로 인해 죽을 뻔한다.
루카는 결국 신분을 감추고 또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며 복수의 때를 기다린다.
그러고는 기어코 승리하여 공작가를 쟁취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모두가 루카가 죽었다고 믿고 있는 가운데, 성장한 루카가 전쟁 영웅이 되어 위풍당당하게 군복을 입고 빈터발트에 돌아와 빈터발트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을 처단하는 장면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엔딩의 허무한 느낌까지 완벽히 내 취향이었다.
유년기를 보낸 빈터발트 성은 그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를 반겼지만, 그때의 사람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루카는 제 조부의 의자에 깊게 몸을 묻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복수와 함께 겨울도 끝이 났다. 그의 인생을 할퀴려고 눈을 번뜩이는 승냥이 떼들도 사라졌다.
모두가 탐을 내던 겨울 숲을 쟁취해 낸 것은 다름 아닌 루카 빈터발트, 그였다.
이제 곧 봄이 올 것이다. 만물이 피어오르고, 생명이 싹을 틔우며, 행복이 넘실거리는 봄.
하지만 과연, 이 얼어붙은 겨울 숲에도 봄은 찾아올 것인가.
루카는 알 수 없었다.]
크으으. 다시 떠올려도 너무 좋네.
하지만……. 좋아하는 장면을 위한 반석이 되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이세계에 왔든 엉뚱한 몸에 빙의되었든, 난 좀 더 살고 싶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소설이지?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어서 그런 걸까?
친구가 취향 이상하다며, 힐링물이나 일상물은 어떠냐 했을 때 면박주지 말고 취향을 바꿨어야 하는 건데…….
그러면 적어도 빙의되는 세상이 온건했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아니야. 적어도 피폐물이나 생존물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자.
내가 좀비물 마니아였다면……. 으으.
아, 근데 왜 하필 유디트 마이바움이람?
다른 조연들도 많잖아! 루카가 암살당할 뻔할 때 도와주는 왕녀라던가…….
솔직히 나는 유디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디트를 좋아하는 독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카의 유일한 외가 혈통인 유디트는 어린 루카를 학대하고, 루카를 찾아온 숙부에게 돈을 받고 루카를 팔아먹었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방계의 친척들이 루카를 협박하고 휘두르기 위해 모략을 꾸밀 때 제일 처음 이용당하기까지 하는 존재였다.
딱 소설 속의 멍청하고 이기적인 악역 그 자체였다. 주인공 앞을 가로막기만 할 뿐인, 그런.
설마, 내 본능 속 어딘가가 유디트와 비슷한 구석이 있기라도 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자기혐오에 빠질 것 같았다.
하여튼 나는 살고 싶었고, 뻔히 보이는 데드플래그로 걸어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분란이 일어날 이유를 없애는 게 최고지만, 어차피 루카는 빈터발트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일단 공작가에서 루카를 혈육으로 인지한 이상, 내가 루카를 보내지 않겠다 주장해도 달걀로 바위 치기일 뿐이다.
소설 내용을 전부 바꾸진 못할지라도, 적어도 ‘유디트’의 인생만큼은 바꿔야만 했다.
그러기 위한 제일 첫걸음은, 바로 루카에 대한 처우였다.
솔직히 자신의 허리춤에나 겨우 올 법한, 비리비리 마른 꼬마애를 구박하는 게 인간이 할 짓이야?
적어도 밥은 제때 줘야지!
유디트가 하도 굶긴 탓일까.
루카는 거의 제가 스스로 밥을 벌어먹고 있었다.
마을의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떠맡아 가며 감자 한 알, 사과 한 알 받아 식사를 때웠다.
간신히 삶을 연명해 가는 수준이었다.
이제 고작 아홉 살인데!
유디트 얘는 저 예쁜 애가 안타깝지도 않나.
아니.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던 유디트는 아마 루카가 예쁘게 생긴 것도 못마땅했을 것이다.
유디트는 미인이었다.
내가 처음 보자마자 이런 미인이 된 꿈을 꿔서 신난다 생각했을 정도로.
그런데 정작 유디트는 제 외모를 질색했다.
뭐라 했더라. 물에 빠져 흐물흐물한 인상이라 했던가…….
내가 보기엔 수채화같이 예쁘기만 하고만.
하지만 유디트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디트의 기억 속 다른 가족들 외모가 원체 특출나긴 했지…….’
외모라는 게 주관적 취향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객관성의 통계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유디트의 다른 가족들은 그 객관적인 미의 기준을 충족하다 못해 넘쳐흘렀다.
특히나 3살 차이인 언니 라리사가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인이었으니…….
어린 시절의 유디트는 외모에 관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쯧쯧.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되레 본인이 편해지는 법이거늘…….’
나는 지금 없는 유디트를 향해 고리타분한 설교를 늘어놓았다.
하여튼 유디트는 외모에 무척 예민했다.
가족들의 죽음을 슬퍼하긴 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이제 이 마을에서 제일 예쁜 건 자신이라는 환희가 도사리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렸던 루카가 점점 자라더니…….
전방 1km 밖에서도 눈에 띌 미소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색 빠진 엷은 금발인 유디트와 달리 반짝반짝 빛나는 진짜 금발.
게다가 푸른 눈동자는 어찌나 영롱한지.
처음엔 쟤 주변만 포토샵으로 효과 준 줄 알았을 정도였다.
루카가 언니를 닮은 건 아니었지만, 유디트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천사 같은 외모라는 건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루카의 외모는 사그라들었던 유디트의 외모 콤플렉스의 촉매제가 되어버렸다.
활활 타올라라, 열등감이여!
그래. 딱 이 꼴.
그래도 그렇지 어린 조카하고 비교해서 뭐 해? 어른이 돼서. 나이를 도대체 어디로 먹은 거야?
나는 내 몸의 주인을 열심히도 욕했다.
하여튼 좋아. 일단 루카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자.
미래고 뭐고를 떠나서, 루카가 불쌍해서라도 잘 대해주고 싶었다.
어차피 오래지 않아 빈터발트로 떠나게 될 텐데…….
그렇게 다짐한 나는 바로 결심을 실행으로 옮겼다.
하지만 루카의 입장에선 무척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9년 남짓 구박하던 이모가 난데없이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꼴 아닌가.
나 같아도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것 같았다.
‘내가 처음으로 루카한테 저녁밥을 해줬을 때도 반응이 장난 아니었지…….’
결심한 그날, 나는 나름 저녁 식사랍시고 고기 건더기가 들어간 스튜를 열심히 만든 뒤 루카를 불렀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요리를 해본 건데 제법 그럴싸한 맛이 나서 좀 뿌듯한 맘도 있었다.
하지만 루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날 노려볼 뿐이었다.
그뿐이랴?
‘한동안 잠만 처자더니 미쳤어? 평소 하던 대로 해.’
톡 쏘아붙이더니, 내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바로 골방으로 쌩하니 도망치듯 들어가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