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21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21화
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인간……!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까는 그렇게까지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뤼디거의 강경한 반대와 맞닥뜨리니 객실을 나가고 싶은 욕망이 청개구리 심보로 불쑥 튀어 올랐다.
“뭐야, 이모 나가?”
그때, 방에 콕 박혀 있던 루카 또한 슬금슬금 나와 말을 보탰다.
“나가지 말고 여기 있지? 그 암살자 도망쳤다며.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일이잖아.”
루카의 목소리에도 걱정이 묻어났다.
루카에게는 암살자가 도망쳤다고 말했기에, 루카는 아직도 그 암살자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사실 그 암살자, 내가 죽여서 돌아오지 않아, 루카…….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애 교육상으로도, 내 이미지적으로도.
좌우지간 루카까지 두 팔 걷어 붙이고 나서니, 결국 나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냥 여기 있으면 될 거 아니에요.”
그제야 루카와 뤼디거 둘 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슨 사고라도 칠 것 같나?
루카에게는 저를 끌어안고 대신 다친 일로, 뤼디거에게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뛰쳐나와 암살자의 뒤통수에 후추통을 명중시킨 일로 완전히 사고뭉치로 각인된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좀 억울했다.
따지자면 팔의 상처는 루카 때문이고, 내가 후추통을 던진 것도 뤼디거가 탄약 개수를 잘못 셌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투덜거리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루카는 내가 또 엄마라 부르게 시킬까 한참 눈치를 보며 내 주위를 맴돌았다.
별일 없을 거라 판단했는지, 이내 내가 시야에 닿는 곳에 주저앉았다.
‘저런 건 정말 고양이 같네. 화장실 갈 때도 졸졸 따라올 거 같단 말이지…….’
그리고 내 농담 어린 생각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내가 화장실에 가는 것도 불안했는지, 쭐레쭐레 따라오는 게 아닌가!
루카만 따라붙는 것도 아니었다. 둘이서는 위험하다며, 뤼디거 또한 따라붙어 버렸다.
아니, 다 큰 여자가 화장실을 가는데 어린 남자 큰 남자 하나씩 졸졸 데리고 가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
엉뚱한 데를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같은 객차 안에 있는 화장실일 뿐인데.
하여간 말이 씨가 된다더니, 나는 두 번 다시 아무 생각이나 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서, 설마 빈터발트에서도 이러는 건 아니겠지…….
나는 황급히 도리질 쳤다. 아무 생각이나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불과 몇 초 만에 또 엉뚱한 생각을 하다니…….
나는 방에 자발적으로 감금당한 채, 무념무상을 곱씹으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방에 오도카니 있는 게 한두 시간도 아니고, 몇 시간이나 그러고 있으려니 지루해 죽을 것 같았다.
특히나 내 정신은 이전 세계에서 스마트 폰에 중독된 현대인이 아니던가.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잊은 지 오래인 만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보내는 시간에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저, 유디트 씨.”
그런 나에게 뤼디거가 말을 걸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가 나를 가엾게 여겨 외출을 허락해 주려는 건 아닐까 하는 단꿈을 꾸었다.
하지만 나에게 들이밀어진 것은 신문 한 부였다. 물론, 내가 읽다 빼앗긴 사교계 가십 신문은 아니었다.
이게 뭐냐는 듯 바라보는 나에게 뤼디거가 덤덤히 답했다.
“심심하시다면 낱말맞추기는 어떠십니까?”
“낱말……. 맞추기요?”
“네.”
뜬금없이 웬 낱말맞추기?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뤼디거가 건넨 신문을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신문의 마지막 면에 심심풀이 코너가 실려 있었다.
아……. 맞아. 신문에 이런 것도 있었지.
이전 세계에서는 한동안 인터넷 신문만 보다 보니, 신문에 이런 게 실려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신문을 읽으셔도 좋고요.”
“지난번에는 읽지 말라셨잖아요.”
“그 신문이랑 달리 이건 제법 공신력이 있으니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아, 네.”
내가 바라는 건 공신력 없는 가십 신문이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어서 냉큼 받아 들었다.
나는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 막간 코너까지 놓치지 않고 샅샅이 읽었다.
가십 신문의 합성첨가물 같은 자극적인 맛은 없었지만, 황무지 같은 객실 안에선 이것도 감지덕지했다.
다 읽은 뒤에는 낱말맞추기를 하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신문에서 뽑아 먹을 수 있는 콘텐츠를 탈탈 털어 먹었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온 정적.
도대체 이 여행이 언제까지 계속되는 걸까……. 얼른 빈터발트에 도착했으면…….
엠덴을 떠나던 초반만 해도 빈터발트에서 벌어질 사건에 마음 졸이며 최대한 늦게 도착하기를 바랐는데, 지루함 앞에서는 그 모든 게 스러졌다.
그나마 기차가 움직이며 바깥 풍경이 바뀌어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답답했을 것이다.
그나마 뤼디거가 이런 객실을 구해준 게 다행이라고 할까.
만약 양계장 같은 일반석에 껴서 빈터발트까지 가야 했다면……. 으,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안 좋은 상황에 집중해 봐야 속만 답답해질 뿐이기에, 나는 가진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안분지족…… 나는 행복하다…….’
그러는 사이에도 기차는 점점 빈터발트로 향했다.
기차가 앞으로 쭉쭉 나아갈 때마다 맑은 하늘은 점점 시린 회색빛 푸르름으로 변했고, 산등성이가 흰 눈으로 뒤덮였다.
“루카, 밖을 좀 봐봐! 눈이 내려!”
나는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몇 번이고 눈을 봤으면서도 마치 눈을 처음 보는 개처럼 방방 뜨는 내 모습과 달리, 정작 눈을 처음 보는 루카는 심드렁한 태도였다.
“알아요. 나도 봤어요.”
“엠덴에서는 겨울에도 엄청 조금 내리는데. 여긴 봄인데도 눈이 내리네. 루카 너도 이만큼 쌓인 눈을 보는 건 처음이지?”
“뭐……. 그렇죠.”
얘가 무뚝뚝하기는. 좋으면 좋은 티를 좀 내지. 원작에서는 귓가가 빨개질 정도로 흥분했으면서.
그래도 이모가 같이 있다고 어른스러운 척하나 보다.
그런 루카가 귀여웠던 나는 루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루카의 둥근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내 애정이 어린 터치에 루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아아니? 무슨 이상한 생각?”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내저었다.
루카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이내 포기한 채 시선을 거뒀다.
그 새치름한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는지,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루카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버렸다.
“으이구, 귀엽긴.”
“…….”
루카는 포기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의 묵언 아래 허락을 받은 나는 마음껏 루카를 귀여워했다.
빈터발트에 다다를수록 눈이 점점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일 정도였다.
서서히 기차의 속도가 줄었다. 저 멀찍이 으리으리한 돌로 지어진 기차역이 보였다.
그렇게 오랜 여정이 끝나고, 기차가 드디어 빈터발트 역에 도착했다.
기차가 멈추고, 나는 오랜만에 땅을 밟았다.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 외투를 챙겨 입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벅지까지 몸을 감싸는 새하얀 모피. 뤼디거가 노이할트에서 사줬던 수많은 옷 중 하나였다.
나는 승강장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송이가 하늘하늘 코끝에 앉았다.
“하아…….”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하얀 입김이 눈앞을 뿌옇게 물들였다.
안 그래도 뤼디거가 빈터발트의 추위가 상상 이상일 거라 몇 번이나 주의시킨 덕에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상상 이상이었다.
‘엠덴에서 챙겨 입던 외투로는 어림도 없었겠는걸.’
뤼디거가 사준 외투가 아니었다면, 진즉 얼어 죽었을 것 같은 추위였다.
‘롱패딩이 그립다……. 핫팩도 그립다……. 어그부츠도…….’
빈터발트는 엠덴과 많은 것이 달랐다. 외투 밖으로 드러난 살에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이 어찌나 시린지, 마치 나를 전력으로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바람만 거부하면 낫지. 빈터발트 사람들도 나를 거부하면…….’
칼날 같은 바람은 뺨을 스치지만, 칼날 같은 시선은 마음을 스친다.
과연 내가 이 서리로 뒤덮인 메마른 영지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내 뺨이 긴장으로 작게 떨렸다.
“유디트 씨, 이쪽으로.”
그때, 뤼디거가 나를 불렀다. 차장들은 그 옆에서 산처럼 쌓인 우리의 짐을 열심히 나르고 있었다.
다시 봐도 무시무시한 양이었다. 마치 이사라도 가는 것 같은걸. 저 짐을 내가 들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까지는 어떻게 가더라.
소설 속에서는 바로 빈터발트 성에 도착한 것으로 장면이 넘어갔던지라, 성까지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냥 물어보는 걸 택했다.
“빈터발트 성까진 어떻게 가나요? 짐들이 많은데.”
“아마 마중 나왔을 겁니다.”
“마중요? 저희가 오는 걸 어떻게 알고요?”
전화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실시간으로 연락이 되는 건가?
“출발하기 직전에 해당 차편을 타고 간다 전보를 보냈습니다.”
“아아……. 전보요.”
그래도 전보는 있는 세계관이구나.
머쓱했던 난 습관적으로 목덜미를 긁적이려 손을 꺼냈지만, 이내 아릴 듯한 추위에 다시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쪽으로.”
뤼디거는 성큼성큼 역사를 가로질러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