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22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22화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역사 안을 흘끔흘끔 구경했다.
자작나무 숲처럼 역은 하얗고 드높았다.
우리가 으리으리한 빈터발트 역을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역 앞 정중앙에 대어 있던 마차의 마부가 우리를 반겼다.
“작은 도련님!”
“시간 맞춰 왔군.”
“그럼요. 제가 누군데요.”
중년의 마부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뤼디거의 무뚝뚝한 말을 받아쳤다.
마부의 덩치 또한 상당히 컸는데, 뤼디거와 나란히 서니 머리 하나가 작았다.
이렇게 보니 뤼디거가 키가 크긴 정말 크구나.
나는 작게 혀를 내둘렀다.
“공작님과 마님께서 도련님이 오시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엠덴에서 여기까지 왕복 한 달 정도 걸리지 않나. 충분히 예정 시간 내로 도착했다만.”
“그만큼 궁금하시다, 이거죠.”
마부는 껄껄 웃으며 뤼디거의 뒤에 서 있던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부의 시선이 제일 먼저 닿은 것은 루카였다.
“그러면 이분이 바로……?”
뤼디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는 감격 어린 눈으로 루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몰라뵐 수가 없겠습니다요. 요나스 도련님이 어렸을 적과 똑 닮았습니다그려.”
감정이 북받쳤는지, 마부는 찔끔 눈물을 흘렸다.
루카를 바라보는 눈에는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남들이 보면 뤼디거의 조카가 아니라 마부의 조카라 착각할 것 같은 격정적인 시선이었다.
사교계의 망나니이니 불한당이니 해도, 가신들에게까지 망나니처럼 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부는 허겁지겁 눈물을 닦아내며 허리를 굽실 숙였다.
“아이고,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소공자님. 쉽네는 빈터발트의 마구간지기, 한스라고 합니다. 앞으로 도련님이 타고 다닐 말을 책임질 놈이죠.”
“……만나서 반가워.”
친근하게 말을 거는 마부, 한스가 부담스러웠는지 루카는 서먹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잠깐…….
‘반말이 너무 익숙하지 않아?!’
어른인 한스에게 스스럼없이 반말을 쓰는 모습에 괴리감이 들었다.
물론 나한테는 반말한다지만 그건 가족이니 예외고…….
엠덴에서의 루카는 어른들에게 깍듯했고 항상 존댓말을 썼다.
원작에서도 빈터발트에 도착한 뒤 하인들에게 존대하는 문제로 한참을 골머리를 앓았던 묘사도 있었을 정도다.
그랬던 만큼 대뜸 마부와 만나자마자 말을 놓는 루카의 태도가 낯설었다.
물론 괴리감을 느끼는 건 나뿐이었다.
뤼디거도, 한스도 루카가 그러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뭔가……. 계속해서 위화감이 드는데…….’
루카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내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혹시…….
그때 한스의 시선이 루카에게서 비껴나 나에게로 향했다.
“그……. 저, 이분은, 혹시…….”
데굴데굴 굴리는 시선이 혼란스러웠다.
루카를 마주했을 때 같은 반가움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는, 외부자를 보는 듯한 경계 어린 시선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애초에 뤼디거의 계획에는 없던 존재라는 걸 자각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경계야,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좋아. 일단 지금은 엉뚱한 상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스.
흔하디흔한 이름이다. 책에서 본 적도 없는, 이름 없는 단역이었을 존재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빈터발트 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작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가신이라고는 하지만 뤼디거를 대하는 태도나 루카에게 서슴없이 말을 거는 것 등을 볼 때, 그는 저택에서 상당히 오랜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적어도 요나스가 루카만 한 또래였을 때부터 봐왔으니, 넉넉히 20년은 되었겠지.
내가 무언가 부족한 점을 드러내면, 그 이야기는 바로 저택에 전해질 것이다.
빈터발트 가의 시험은 벌써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첫인상이 중요한 만큼,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당장 급한 게 아닌 만큼 나는 루카에 대한 의심을 이후로 미뤄놓았다.
심란한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여유로운 미소로써 속내를 감췄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냥함을 끌어 올린 목소리로 가증스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루카의 엄마, 유디트 마이바움이에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 * *
빈터발트에서 보내온 마차는 엠덴에서 떠날 때 탔던 마차와 차원이 달랐다.
바퀴의 개수부터가 달랐는데, 그 때문인지 훨씬 덜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의 자동차 수준인걸……. 엠덴에서 탔던 마차도 엄청 비싸 보였는데 말이야.’
“거의 다 왔군요.”
그때, 창밖을 보고 있던 뤼디거가 넌지시 중얼거린 말에, 나는 창밖을 보았다.
성에가 낀 회색의 드높은 벽. 마치 거대한 빙벽처럼 보이는 웅장한 성벽은 소설 속 묘사보다도 더 위압감 있게 다가왔다.
빈터발트 성이 코앞에 닥치자, 나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시험지를 받기 직전에 제일 긴장하는 타입이었다.
‘그래도 시험지를 딱 받고 나면 긴장이 풀리곤 했으니까 괜찮아.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빈터발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썩 쓸모 있는 건 없었다.
뤼디거의 아버지인 빈터발트 공작, 막시밀리안은 소설 속에서 등장이 무척 드물었다.
타인의 입으로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정보 정도를 얻을 수 있었을 뿐.
가족애도 별로 없어서 저를 쏙 빼닮은 뤼디거에게도 냉담했고, 그건 루카에게도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아, 맞아. 그런 공작에게도 예외가 하나 있었다.
바로 현 공작 부인인 소피아를 지독히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뤼디거의 친모인 소피아는 요나스의 친모인 바네사 왕녀의 시녀였다.
바네사 왕녀가 요나스를 낳으며 생을 달리하고, 요나스를 친아들처럼 키워줄 차기 공작 부인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에 가장 적합했던 것이 소피아, 그녀였다.
정치적 쓸모로 인한 결합이었던 만큼, 다들 소피아가 공작에게 냉대당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갔다.
공작이 얼마나 소피아를 아꼈는지, 바네사 왕녀가 죽은 것이 공작의 계략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소설 속에서 그에 관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었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돌아가는 것은 또 하나 있었다.
공작 부인이 된 지 일 년 뒤, 소피아는 뤼디거를 낳게 되었다.
사람들은 소피아가 요나스에게 소홀해질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바네사에 대한 충심이 크다 하나, ‘진짜’ 친아들에 대한 애정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건 모두가 인정했다.
하지만 소피아는 이제 두 살 된 요나스를 직접 돌보기 위해, 젖도 떼지 못한 뤼디거를 유모에게 떠맡겼다.
그걸 비롯해, 소피아는 여러모로 친아들인 뤼디거보다 요나스를 더 아꼈다.
그렇게 끼고돈 요나스가 결국 사교계의 유명한 불한당으로 자라나, 음주 승마를 하다 고꾸라져 죽은 건 좀 아이러니하지만…….
‘그런 차별을 받고 자랐는데도 사람이 참 무던하단 말이야…….’
나는 뤼디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쭉 뻗은 콧대는 창틀에 맺힌 고드름처럼 날카로웠고, 청회색 눈동자는 서리처럼 반투명했으며, 짙은 머리카락은 겨울나무의 껍질 같았다.
정말인지, 빈터발트라는 이름 그대로인 사내였다.
하지만 정작 그는 가문과 가문의 일원에 대해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 빈터발트로서의 의무와 책임 정도?
결혼하지 않겠다 주장하는 것 정도가 그의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루카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지만, 그 감정의 기반 또한 책임감이었다.
형의 자식이니까 응당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사실 소설을 읽을 때도 좀 궁금하기는 했다.
요나스는 친엄마의 애정마저 빼앗아간 상대다. 뤼디거는 정말 요나스를 질투하지 않았던 걸까?
‘나였다면 차별받은 게 억울해서라도 바득바득 빈터발트 공작이 되려고 했을 텐데. 욕심도 없고. 어딘지 속세에서 벗어난 사람 같다니까. ……그런 면이 좋았지만.’
그때,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뤼디거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당신 과거가 안쓰러워서 그리 봤다 말할 수 없었던 나는 아무 말이나 주워 뱉었다.
“아뇨. 그냥 잘생겨서 쳐다봤어요.”
“……네?”
뤼디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사람 같았다.
별것 아닌 말에 이렇게까지 과잉반응을 하니 머쓱해지는 건 나였다. 나는 떨떠름히 손을 내저었다.
“아……. 농담이었어요. 그렇게까지 정색 안 하셔도 돼요.”
은근히 농담이 안 통한다니까. 나는 속으로 작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농담이 안 통하는 상대는 비단 뤼디거 혼자만이 아니었다.
소피아고 막시밀리안이고, 다정다감하고 사교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루카에게야 좋은 조부모였겠지만, 타인에게는 냉랭하고 칼 같은, 더할 나위 없이 귀족에 가까운 사고방식의 존재들이었다.
게다가 소피아가 요나스를 누구보다도 아꼈다 하니…….
‘뜬금없이 생긴 며느리 아냐. 평민이나 다름없는 몰락 귀족에, 귀족으로서의 교육은 전혀 받은 적 없는……. 기준에 차지 않겠지, 당연히.’
뤼디거는 가문에서 나를 환대할 거라 했지만, 솔직히 그 말을 믿진 않았다.
‘애를 앞세워 가문에 한 발 걸치려 하는 몰염치한 여자라 생각해도 당연한 상황이지.’
앞으로 펼쳐지는 것이 자갈길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이었다.
제발 가시밭길까지는 아니길. 나는 그렇게 각오와 기도를 거듭하며 빈터발트에 입성했다.
그런데…….
“자네가 요나스의 아이를 낳았다고?”
검은 상복을 입은 인상이 흐릿한 여인이 나에게 물었다.
꼿꼿이 선 마른 체구에서는 결코 호락호락할 것 같지 않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바로 공작 부인 소피아였다.
그녀는 나를 엷은 녹색 눈동자로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껏 혼자서 애를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자, 잠깐……. 왜 이렇게 살가우세요……?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