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23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23화
* * *
빈터발트 공작가 사람들과 마주한 자리는 조금도 내 예상대로 흘러가질 않았다.
때마침 성에 도착했을 때가 저녁 시간쯤이었던 지라, 우리는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식당이라고는 하지만 홀에 가까웠다. 그 한가운데에 배치된 커다란 식탁은 서른 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고작 다섯 명만이 앉아 있으니, 괜히 빈 곳이 신경 쓰였다.
끊임없이 실어 나르는 음식의 풍미는 내가 지금껏 맛본 것 중에서도 최고였다.
신경을 많이 쓴 듯, 요리의 곳곳에 정성이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바로 내 앞에 앉아 조잘조잘 끊임없이 말을 거는 공작 부인 때문이었다.
“어쩜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혼자서 애를 키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가족 구성은 어떻게 되지?”
“모두 일찍 세상을 떠서……. 지금은 루카와 저, 단둘이에요.”
“혼자였다니. 그럼 애를 낳고 몸조리는? 잘했니?”
“……네. 걱정 마세요.”
실제로 내가 애를 낳은 것도, 몸조리한 것도 아닌 만큼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날 선 시선도, 경계 어린 태도도 없었다.
예상치 못한 공작 부인의 살가운 접객에 나는 건너에 있는 뤼디거를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눈짓했다.
‘원래도 이런 분이세요?’
‘그건 아니다만.’
뤼디거 또한 당황스러운지, 어색하게 입을 벙긋하며 답했다.
우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공작 부인 소피아는 살갑게 물었다.
“네 덕에 바네사 왕녀님의 피가 이어져서 한시름 놓았단다. 그래. 귀족이었다고?”
“……아버지 대까지는요.”
“마이바움 가라고 했나?”
“네.”
좋아. 드디어 본론인가.
지금까지의 호의는 모두 지금 이 순간을 가리기 위한 밑밥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는 소피아가 내 출신을 문제 삼을 것이라 생각하고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그녀의 흥미는 내 가문의 작위 따위가 어떠했는지가 아니라, 좀 더 본질적인 호구조사 쪽에 가까웠다.
“눈동자는 어느 쪽을 닮았니? 어머니, 아버지?”
“네……?”
뜬금없는 눈동자 유전의 행방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 그러게. 내 눈동자 색은 누굴 닮은 거였더라.
부모님도 아니고,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똑 닮았다 했으니 아닐 테고…….
“할머니신 것 같은데…….”
“할머님께서는 무슨 가문의 여식이었고?”
“어……. 죄송해요. 할머님 가문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혹시…… 중요한 건가요?”
나는 조마조마하며 물었다.
혹시 할머니의 가문이 소피아의 원수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나에게 질문이 쏟아질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시시콜콜한 것을 물어볼 줄은 몰랐던지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 우려스러운 반응에 소피아가 마른 손을 내저으며 가볍게 덧붙였다.
“별건 아니란다. 연보라색 눈동자가 정말 아름다워서 그래. 흔한 색도 아니고 말이야. 아이가 네 눈동자를 닮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때, 순간 식탁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달그락거리는 식기의 소리도, 사람들의 호흡도 모두가 멎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소피아는 요나스의 극성 엄마였다. 왕녀를 닮은 요나스가 무얼 해도 예쁘다 예쁘다 추켜올려 주던.
루카가 요나스를 쏙 빼닮은 걸 그 누구보다 기뻐한 이도 소피아였다.
그랬던 그녀가 요나스가 아니라 날 닮은 부분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말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경악하여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소피아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소피아는 나에게 너무나도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다.
그에 비해, 공작은 묻고 싶은 게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소피아가 이야기하는 동안 공작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거의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을뿐더러, 시선의 대부분은 이따금 소피아에게 향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 루카에게 궁금한 게 별로 없겠지.
원래 저런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도 루카에게 지원을 아끼진 않았지만, 딱히 애틋한 조손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작의 모든 애정은 오로지 소피아에게만 향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그 꼴을 눈앞에서 보니 속이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공작을 똑 빼닮은 뤼디거에게로 향했다.
‘루카의 존재를 알고 무척 고대하고 있다며……! 이게 고대하는 사람의 태도냐? 그런 시답잖은 거짓말을 하다니!’
내 이글이글한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뤼디거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쑥스러운 모습이었다.
도대체 뭘 쑥스러워하는 건지.
기가 찼던 나는 뤼디거에게 눈치 주는 것을 관두고 루카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라도 건조한 공작의 반응에 루카가 실망하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도 할아버지인데…….’
하지만 루카는 공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로 개의치 않는 태도로 무덤덤하게 고기를 썰었다.
신경을 안 쓰는 건지, 안 쓰는 척하려는 건지……. 역시 어린아이니 후자겠지. 그리 생각하니 안쓰러움이 그득 차올랐다.
그러는 도중, 소피아가 처음으로 루카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이름이 루카라고?”
“……네, 할머님.”
“식사는 입에 맞니? 요즘 애들이 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어야지. 일단 요리사에게 어린애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하라고는 했다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봐요.”
루카는 점잖게 대답했다. 뤼디거에게 하듯 굴면 어쩌나 내심 노심초사했는데, 마치 꼬마 신사처럼 예의를 차리는 모습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다행이구나. 루카 넌 좋아하는 음식이 뭐니?”
“……살구잼 바른 초콜릿 케이크요.”
“자허토르테 말이구나. 우리 요리사가 올덴 출신이라 디저트류를 꽤 잘 만들지. 다음 저녁 만찬에 올리라 하마. 맘에 들면 앞으로도 종종 만들라 말해야겠구나.”
나는 조금 놀랐다. 루카가 저런 디저트를 좋아하는 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카가 살구잼 바른 초콜릿 케이크 같은 걸 먹어 본 적이 있나?
뭐, 뤼디거와 함께 빈터발트로 오는 길에 먹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가볍게 넘겼다.
사실, 소피아의 시선 때문에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소피아는 루카와 대화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나를 살폈다. 눈썹 한 올, 피부 결 하나하나 살피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물론 소피아가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루카와 함께 성 로비에 들이닥친 날 보는 시선은 딱, 내가 예상한 것에서 조금의 차이도 없었으니까.
그러던 것이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뒤집혔다.
뭐가 시발점이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우연히 나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한 건지, 그녀가 나에게 훅 가까이 다가왔다.
처음 만나는 타인이라기엔 무척 낯선 거리였다.
하지만 내가 꺼리거나 말거나, 소피아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소피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처음에는 얼굴을 품평하기라도 하나 싶었다.
하지만 품평이라기엔 시선이 너무 절박했다.
마치 모래밭에서 사금의 반짝임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녀는 내 얼굴에서 뭔지 모를 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결국 그 상황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저, 부인?”
“…….”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피아가 나에게서 떨어졌다.
소피아는 눈 깜짝할 새 멀끔한 얼굴로 낯을 정돈했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상복 치맛단 위에 놓인 마른 손은 미약하게나마 떨리고 있었다.
그 뒤로 계속 이런 상황이었다…….
나는 점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듯한 소피아의 이유 모를 호의에 떨떠름히 웃으며, 식사 시간이 빨리 지나기만을 바랐다.
후식이 나오고, 소피아가 생각 났다는 듯 뤼디거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뤼디거, 너는 언제 군대에 복귀할 생각이니?”
오늘 재회한 이래, 그들 모자의 첫 대화였다.
이런저런 안부 인사 없이 용건만 내뱉는, 건조하다 못해 삭막한 대화.
아니, 그래도 아들이 한 달 가까이 집을 비웠는데 안부 인사 정도는…….
하지만 뤼디거 또한 소피아가 저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에 무척 익숙한지, 담담히 답했다.
“당분간은 영지에서 머물 생각입니다. 밀린 휴가가 많거든요.”
“그래. 그러면 유디트 양과 루카가 수도로 갈 때, 네가 호위하면 되겠구나.”
“수도요?”
생각지 못한 일에 내가 예의도 잊고 불쑥 물었다.
뒤늦게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봤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루카는 왕가의 피를 이은 아이니까 직계가 아닐지라도 왕실에 밝히는 게 관례란다.”
소피아가 차근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벤트가 있었지.
수도에 가서 왕족들을 만나는데, 훗날 프란츠에게서 도망칠 때 도움을 받게 되는 또래 왕족 샤를로트 왕녀와의 첫 만남도 이때 이루어진다.
‘그런데…… 원래 이렇게 빨리 이야기가 오갔나? 루카가 어느 정도 가문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뭐, 보호자가 있으니 빨리 이야기가 오가는 거겠지. 확실히 원작과는 상황이 다르니까.
나는 그리 가벼이 생각해 넘겼다.
그때, 소피아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던졌다.
“수도에 갈 걸 생각하면 옷도 좀 맞춰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