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2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26화
결국 뤼디거의 억지 주장을 듣다 못한 내가 알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지 않으면 날 설득할 때까지 내 방에 죽치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뤼디거는 그제야 안심한 듯 개운한 낯으로 푹 쉬라는 말과 함께 내 방을 떠났다.
이러저러해서 선물을 받겠다 하긴 했지만, 선물하는 입장에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할 정도로 보석이 필수품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았다.
전생에선 선물이라면 마냥 좋았는데…….
아직 선물을 받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피곤했다.
보석으로 도대체 말씨름을 얼마나 하는 건지.
안 그래도 소피아와 1차전을 하고 온 뒤다.
뤼디거와의 2차전을 치르면서 체력을 바닥까지 탈탈 털린 나는 기진맥진하여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저는 빈터발트를 책임지고 있는 총 집사장, 빈센트라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새하얀 머리를 완벽하게 쓸어 넘긴, 깐깐한 인상의 안경을 쓴 마른 노인이 날 찾아왔다.
뤼디거가 말한 집사, 빈센트였다.
“작은 마님으로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모쪼록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 주십시오.”
그는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과할 정도의 태도가 되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나만 느끼는 건지, 빈센트는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미리 프레젠테이션 준비라도 한 듯한 유려한 화술이었다.
“마님께서 수족으로 부릴 만한 하녀들을 몇 추려왔습니다. 남부 지방 출신이시라기에 최대한 그쪽 지방과 가까운 아이로 골랐습니다. 다들 일 잘하는 아이들이니, 한 번 보시고 선택하시지요.”
그렇게 내 앞에 들이밀어진 하녀들의 모습에 나는 떨떠름히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떤 하녀가 좋은 하녀인지 내가 아는 수가 있나.
결국 나는 그중 제일 무던해 보이는 아이를 택했다.
“……저 갈색 머리 아이로 할게요.”
“로라 말씀이로군요.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부인!”
로라라는 이름의 하녀가 활달하게 인사하며 허리를 숙였다.
이십대 초반은 되었을까, 무척 활기차 보였다. 로라의 땋아 내린 갈색 머리가 고갯짓에 따라 흔들렸다.
“마님의 방 또한 조속한 시일 내 완성토록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네, 알겠어요.”
“그럼, 쉬고 계십시오.”
하녀가 정해지자, 빈센트는 그리 말하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집사장이니만큼 공사다망한 모양이었다.
나는 방에 로라와 둘이 오도카니 남았다.
로라는 빙긋 웃으며 두 손을 모으고 오뚝이 서 있었다.
사람을 쓰는 것이 처음인지라,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그래, 일단 가볍게 대화나 하자.
나는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로라?”
“예, 부인! 차라도 내릴까요?”
로라가 의욕적으로 물었다. 그 기세가 얼마나 열렬한지, 나도 모르게 주춤할 정도였다.
“음……. 아뇨. 잠깐 앉아볼래요? 이야기나 할 겸…….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나는 내 앞을 가리키며 제안했다.
이 기회에 어제, 뤼디거를 무서워하는 듯한 하녀들의 반응을 물을 셈이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스토리적으로는 필요 없는 부분이라 생각되어 도려내진 면일 테지.
하지만 그래서일까. 현실에선 유난히 눈에 밟혔다.
내가 대화를 제안할 거라 생각 못 했는지, 로라는 주춤거리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주근깨 어린 콧잔등이 찡긋거렸다.
“그,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내 앞에 앉은 로라는 생각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열여덟? 열아홉?
나와는 한 열 살 정도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한참 어린 나이의 애가 일을 하는 걸 보니 안타깝기도 하고, 이 세계라면 당연한 거니 익숙해져야 하나 싶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손등을 매만졌다.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뭐든지 물어보세요! 아는 게 많진 않지만……. 성심성의껏 답해드릴게요. 아,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부인.”
“……그럴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놓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빈센트와는 상황이 달라서 그런 걸까.
로라에게는 비교적 쉽게 말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을 쉽게 놓았다 해서 화제를 쉽게 꺼낼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어떻게 말해야 캐묻는 느낌이 나지 않으려나.
아무래도 뤼디거의 평판에 관한 문제이니만큼 예민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한참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딱히 돌려 말할 만한 핑계가 없었다.
해결책을 찾지 못한 나는 결국 대놓고 물어보는 걸 택했다.
“궁금한 게 별건 아니고……. 혹시 하녀들이 뤼디거 씨를……. 무서워하니?”
“네?”
로라는 안 그래도 다람쥐 같은 눈을 도토리처럼 둥글게 떴다.
뜬금없다는 듯한 반응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뜬금없는 질문인 걸 나도 잘 아는 만큼,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
“어제 좀 신경이 쓰여서……. 혹시 답하기 곤란한 주제라면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뇨, 곤란한 주제라기보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생각하느라.”
고개를 주억이는 로라의 어린 낯에 곤혹스러움이 스쳤다.
“아무래도……. 도련님과는 자주 엮이지 않으려고 하는 건 있어요.”
의아했다.
미혼인 잘생긴 도련님.
게다가 성격도 무던하다.
그러면 보통은 인기 많지 않나?
내 궁금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로라가 바로 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빈터발트에서 내쫓긴 하녀 중 태반은 뤼디거 도련님이 내쫓으신 거거든요. 다들 몸 사리는 거죠.”
“그…… 정도니?”
“사실 좀 과장된 면이 있기도 해요. 마님께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이 집 도련님들은 엄청 나잖아요. 돈도 많고, 혈통도 좋고. 게다가 요나스 도련님은 뛰어난 외모까지……. 뤼디거 도련님도 무뚝뚝하긴 하지만 남자답게 잘생기셨고요.”
내가 봤을 땐 요나스보다 뤼디거가 더 잘생긴 것 같지만, 사람의 취향이니 존중하기로 했다.
화사한 미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나는 반박하는 대신 로라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래서 하녀들이 도련님 한 분이라도 꼬셔서 어떻게든 신분 상승을 해보려고 했는데……. 둘째 도련님은 그런 걸 질색하셨거든요.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이는 하녀들을 전부 내쫓았죠.”
나는 로라가 의도적으로 요나스를 누락시킨 걸 눈치챘다.
하긴 요나스야 별문제 안 됐겠지.
하녀들이 나서기 전부터 이 여자, 저 여자 있는 대로 추근거렸을 테니까.
“그게 몇 년 지나니까 와전되어서……. 다들 둘째 도련님과 조금이라도 엮이면 쫓겨난다 생각하는 거죠. 도련님이 군에서 머무르시느라 영지에 자주 들르시지 않는 것도 한몫했고요. 물론 엄격하신 것도 사실이지만.”
로라의 말을 듣고 있자 하니, 그래도 우려한 일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는 작게 안도했다.
‘난 또 하녀들에게 못되게 구는 인간말종인 줄 알았지 뭐야. 겉 다르고 속 다른…….’
되레 그렇게 착각한 게 미안할 정도였다.
내가 뤼디거에게 인격적으로 너무 기대가 없었던 건 아닐까…….
최근 들어 하도 플러팅을 해대니 잠시 그의 본질에 대해 잊고 있었다.
하긴. 애초에 결벽적인 남자였지.
비혼주의 설정도 그렇고.
오죽하면 원작을 읽을 당시의 내가 농담 삼아 그를 플래그 브레이커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뤼디거에 대해 싹트던 오해의 씨앗을 완전히 파낸 나는 그제야 빙긋 웃을 여유가 생겼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일인데도 잘 알고 있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최소 삼 년에서 오 년 전 일로 들리는데, 불과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로라가 전말을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로라는 조금 기세등등한 낯으로 자랑하듯 말했다.
“저희 엄마가 빈터발트의 주방을 담당하고 계시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여기서 자라서 웬만한 소문은 빠삭해요. 사실 마님을 모실 하녀들을 뽑을 때 나이도 어느 정도 봤거든요. 마님을 모실 때 부족한 점이 있으면 안 되니까요. 제가 나이 기준 미달인데도 뽑힌 건 그런 점 때문일 거예요.”
자신이 이만큼 쓸모 있다 뽐내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벌써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선택을 잘한 모양이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로라.”
“네!”
로라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호의 어린 기색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순진한 미소에 나 또한 작게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