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27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27화
* * *
루카는 바로 후계자 교육에 들어갔다.
예법 선생님을 비롯하여 글 선생은 물론이거니와 지리, 역사, 수리, 문학……. 과목별로 학문 선생님들이 초청되었다.
그것뿐이랴. 바이올린 연주를 비롯하여 사격에, 승마에. 교양 수업까지 하니 루카는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을 보냈다.
갑자기 공부해야 할 게 산더미처럼 많아지니 힘들 법도 한데, 루카는 그 모든 것을 무덤덤하게 해냈다.
되레 괜찮냐며 묻는 나에게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냐며 어깨를 으쓱이기까지 하니, 이게 정말 열 살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루카는 성취 또한 좋았다. 루카와 수업을 한 선생님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요? 말도 안 돼요! 파울리의 원리에 대해 본질적으로 알고 있었단 말이에요?”
“역사의 흐름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납니다. 시야가 넓은 것 같네요.”
“10살 어린아이라고는 믿지 못할 식견입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루카에 대한 칭찬에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우리 애가……. 천재는 아닐까?’
팔불출 부모 같은 심정이 잠시 들었다 사라졌다. 왜냐면 루카는 그렇게까지 천재는 아니었으니까.
원작의 루카는 처음에 물밀 듯이 이어지는 교육에 적응하느라 허덕였다.
어떻게든 따라잡으려고 아등바등했지만, 처음으로 맞닥트린 귀족 사회의 벽은 높디높았다.
뤼디거와 빈터발트 사람들은 평민으로 살아온 루카의 그런 사정에 대해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루카의 성취가 부족하다 여겼을 뿐이다.
결국 그 때문에 좌절한 루카가 눈물을 보이고, 그제야 눈치챈 뤼디거가 대화를 시도하여 수업의 난이도를 낮추고 수를 줄이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물론 그 일로 인해 프란츠가 낮은 루카의 학업 성취를 트집 잡지만…….
계속해서 루카의 이상한 점이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나를 엄마라고까지 해가면서 빈터발트로 끌어들인 것도 그렇고, 뤼디거에게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것도 그렇고…….
암살자와의 조우에서 갑작스레 뛰쳐나가질 않나, 하인에게 자연스럽게 하대하질 않나…….
한둘이 아닌 것들을 끌어모아 보니, 어떻게 보아도 원작의 루카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혹시 얘도 무언가가 빙의했다거나 그런 건 아닐까.
‘하지만 이게 소설 속 세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절대 나와 엮이려 하진 않았을 텐데. 뤼디거에게 거리를 두는 것도 이상하고.’
원작에서 뤼디거는 루카의 절대적인 조력자였으니까, 그와는 이렇게 티격태격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루카에게 대놓고 물어보자니 그것도 문제였다.
‘저기, 루카. 내가 빙의자라서 그러는 건데, 혹시 너도 빙의자니?’
이렇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루카 특유의 질색하며 경멸하는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마치 내가 양장점에서 옷을 골랐을 때와 같은, 그런 표정.
‘뭐, 원래 스토리에서 달라진 건 루카만이 아니니까. 뤼디거의 성격도 원래 알고 있는 거랑 다른 것 같고……. 소피아도 그렇고. 다들 원래 그런 캐릭터들이 아니었는데…….’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정보를 기반으로 어떻게든 발버둥 쳐보려고 했는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자꾸 거스러미처럼 걸렸다.
이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사람을 캐릭터로서 파악하려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선입 견 때문에 지레짐작하는 것도 많고 말이야.
내가 바뀐 만큼 상대도 바뀌는 것도 당연하다.
일단 세밀한 에피소드는 잊고,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큼직한 사건들과 악역 프란츠의 행보 정도만 주목하고 있자.
확실한 미래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조금의 유리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다짐한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빈터발트에서의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바쁜 루카에 비해 내 일상은 무척이나 한가했다.
주변을 산책하거나, 책을 읽거나, 어떻게 해야 방계 모임 때 낮잡아 보이지 않을까 고민하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유유자적한, 꿈에 그리던 생활이었다.
그래. 내가 바라는 게 이런 생활이었다고.
돈 많은 백수! 때 되면 맛있는 밥 나오고, 졸리면 자고……. 게다가 눈치 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한껏 빈둥거렸다. 하지만 그 빈둥거림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왜냐하면…….
‘이거, 너무 심심하잖아……!’
컴퓨터도, 인터넷도, 핸드폰도, 게임기도 없는 세상이다.
그래도 장서가 가득한 서재 출입이 허가되어, 좋아하는 취미였던 독서라도 해보려 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장르 소설이었지, 인문서나 철학서가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로맨스 소설은 무슨, 역사서가 기꺼울 정도였다.
차라리 수다라도 떠는 게 났겠다 싶었지만, 대화 상대라고 해 봐야 로라와 소피아가 다였다.
루카는 공부하느라 바빴고, 뤼디거는 일이 있는지 우리가 빈터발트에 도착한 다음 날 바로 영지를 떠났다.
아무리 소피아가 날 기꺼이 여긴다 해도 그렇지, 그녀와 스스럼없이 수다 떨 만큼 내 사교성이 좋은 건 아니었다.
‘감금이나 다름없던 기차 객실에서의 생활을 떠올리자. 그때랑 비교하면 지금은 천국이지. 적어도 산책하는 것마저 방해받진 않잖아.’
나는 그리 생각하며 빈터발트 가의 정원을 거닐었다.
공작가의 위명과 으리으리한 성채에 비해, 조경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늦게 찾아오는 여름과 빨리 찾아오는 겨울 때문일까.
정원 조경수 대부분은 침엽수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른 지방은 벌써 여름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데도 빈터발트 성은 여전히 겨울의 삭막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야 눈이 녹기 시작했으니 말 다했지.
그나마 새빨갛게 꽃봉오리를 틔운 동백이 아니었더라면, 소나무 향만 가득 맡을 뻔했다.
“동백은 딱 이맘때만 잠깐 피다 지는데, 마님께선 운이 좋으시네요.”
로라가 호들갑을 떨었다. 여름에 보는 동백은 각별한 맛이 있기는 했다.
나는 산책을 정원 구경이라기보다, 일종의 생존을 위한 운동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렸을 때는 살기 위한 운동이 뭔지 이해 못 했는데, 점점 이해가 가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산책을 끝내고, 나는 방으로 돌아와 뜨개질바늘을 잡았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 낸, 시간을 때우는 방법이었다.
‘엠덴에 있을 때는 한 달 동안 시간이 잘만 갔는데. 하긴, 거기서는 빨래며 요리며 하루가 짧았었지.’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손을 놀렸다.
만약 내가 좀 더 우아한 귀부인이었다면 자수를 놓았을 테지만, 십자수라면 모를까 자수는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었다.
자수 경험이 없는 것은 유디트 또한 마찬가지인지라, 차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배워서 할 만큼의 의욕은 아니었고.
물론 뜨개질도 잘하던 것은 아니라 모자나 가방 같은 건 무리였다.
그냥 유행 따라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 할 때 나도 같이 몇 번 해본 게 다였다.
좋아하는 애한테 선물로 주는 게 또 유행이기도 했고.
뜨개질바늘을 다시 잡았을 때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한참을 헤맸다.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간신히 되살려 엉거주춤 한 땀, 한 땀 뜰 수 있었다.
한 번 익숙해지니 그 뒤로는 쉬웠다.
그렇게 나는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목도리를 짰다.
이내 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어린이용 목도리 하나를 금방 뚝딱 완성해 낼 수 있었다.
‘이건 루카 줄까?’
나는 제법 뿌듯하게 목도리를 바라보았다.
상아색 목도리가 포슬포슬하니 따듯해 보였다. 손등을 간질이는 촉감도 좋았고. 빈터발트에서는 털실도 좋은 걸 쓰는 모양이었다.
이제 곧 여름이라 뜬금없는 선물인가 싶긴 하지만, 겨울이 긴 빌터발트이니 금방 목도리를 할 만한 계절이 찾아올 것이다.
‘좋아. 세트로 내 것도 짜야지.’
루카야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내가 우기면 같이 해줄 것이다. 은근히 마음 약하니까.
루카와 나란히 목도리를 한 모습을 떠올린 내 입술 끝이 들썩였다.
좋아, 조금만 더 힘내보자!
루카의 것보다 좀 더 폭넓게, 그리고 길이도 넉넉하게 잡아서 다시 코를 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소피아의 하녀가 유디트를 찾아왔다.
평소 같은 티타임 제안이라 생각한 나는 뜨개질 거리를 소파 위에 내려놓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오래지 않아 공작 부인의 방에 도착했다.
공작 부인의 방은 소박하고 수수했다.
무늬 없는 벽지, 단단한 참나무로 만들어진 가구들. 오히려 나에게 주어진 방이 훨씬 화려한 것 같았다.
여전히 상복을 입은 공작 부인, 소피아가 소파에 꼿꼿이 앉아 우아한 자태로 나를 맞이했다.
“어서 오렴.”
평소와 달리 탁자에 찻잔 및 다과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뭐지? 티타임이 아닌가?
그제야 나는 방 한쪽 구석에 집사가 오뚝이 서 있는 걸 눈치챘다.
존재감이 없는 것이 미덕인 직업으로 반세기 가까이 일한 탓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지금껏 다정하게 대해준 건 모두 페이크가 아니었을까.
나란 인간의 본성을 보기 위해 한껏 방심을 부른 거지.
나는 혹시라도 실수한 게 있지는 않을까 기억을 열심히 뒤졌다.
조금 게을리 굴었던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 정도 방만은 괜, 괜찮지 않을까…….
확신할 수 없었던 만큼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긴장에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그렇게 내가 잔뜩 패닉에 빠져 있는 새, 소피아가 덤덤히 말문을 열었다.
“때마침 좋은 매물을 구할 수 있어서 말이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