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30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30화
생각해 보니 선물을 받았는데 그를 빈손으로 매몰차게 보내는 것도 마음이 좋지 않다.
차라도 한 잔 대접했어야 했는데, 그저 찬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게 한 것도 신경 쓰였다.
뭐 보답 삼아 건넬 게 없나?
하지만 내가 가진 건 전부 빈터발트의 돈으로 얻은 것들뿐이다.
‘아, 맞아.’
그때,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나는 뤼디거를 불렀다.
“저기, 뤼디거 씨.”
방을 나서려던 뤼디거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코트 자락이 흔들려, 안 그래도 커다란 체구가 더욱 커 보였다.
나는 뤼디거에게 오늘 막 완성한 목도리를 건넸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할 생각이었지만, 목도리는 하나 더 떠도 되는 것이고…….
루카와 뤼디거가 같은 목도리를 하는 것도 귀여울 것 같았다.
“과분한 선물을 받기도 했고……. 별건 아니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네요.”
“이건…….”
뤼디거는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거칠고 단단한 손마디에 부드러운 털실의 촉감이 스치는 것이 묘하게 야릇하게 느껴졌다.
건네기 전엔 좋은 생각이다 싶었는데, 막상 건네고 보니 좀 부끄러웠다.
좀……. 너무 나갔나?
직접 만든 선물이라니, 거북스러울지도 모른다. 귀족들 사이에선 이런 게 예의가 아닐 수도 있고.
게다가 뤼디거는 항상 고급스러운 물건들만 걸치고 다녔다.
장교복마저도 따로 맞췄는지, 옷감이 고급스럽고 소매 등 마감이 화려했다.
그의 커다란 체구를 날렵하게 감싸는 것 또한 물론이었다.
캐시미어 머플러가 어울릴 법한 그에게 직접 뜬 털실 목도리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꼴이 우스울 것 같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도 털실 자체는 좋은 것이니 그렇게까지 격이 안 맞진 않을 거야. 로라도 괜찮은 실력이라 했으니까.
나는 어물어물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했다.
그렇게 내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흐트러진 사이, 뤼디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목도리를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 기쁩니다. 제가 받아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죠.”
조마조마했는데 말이라도 기쁘다 해주니 한시름 덜었다. 나는 진심으로 웃으며 뤼디거를 배웅했다.
“그럼, 좋은 밤 되세요.”
“……유디트 씨도,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뤼디거의 시선의 자취가 별똥별처럼 길게 늘어졌다.
이내 그는 내가 선물한 목도리를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듯 품에 꼭 안은 채 등을 돌렸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코트 자락이 흔들렸다. 코트 자락에선 서늘한 바람 냄새 대신, 따듯하게 데워진 솜털의 냄새가 났다.
그를 무사히 내보낸 뒤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탁자 위에 수많은 보석이 내 선택을 기다리며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라가 떨떠름히 물었다.
“저……. 저건 어떻게 할까요, 마님?”
“일단 다시 닫아서……. 어디 잘 보관해 두렴. 나중에 확인할 테니.”
아까 뤼디거를 내쫓을 때 피곤하단 말은 변명이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피곤해졌다.
나는 피로함에 젖은 눈으로 보석들을 바라보았다.
물기 젖은 눈에 반짝이는 보석들이 마치 햇빛이 바스러지는 호숫가처럼 보였다.
* * *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고자 잠으로 도피했지만, 결국 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남아 있는 보석 상자들을 보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로 교훈을 얻었다. 바로 뤼디거가 선물한다고 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덥석 그러라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정도를 몰랐다.
빈터발트에서는 모든 감정을 돈으로 표현하는 게 아닐까?
미안함, 고마움, 죄책감…….
그게 어느 정도의 수준이면 귀찮아서 돈으로 때우려고 하는구나 비웃겠는데, 차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자금력으로 밀어붙이니 그저 압도당할 뿐이었다.
마음만 같아선 모두 잊은 채 선택을 미루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얼렁뚱땅 전부 내가 갖게 될 것 같아 좀 그랬다.
물론 뤼디거야 별로 신경 쓰지 않을 테고, 되레 반기기까지 할 테지만…….
‘이래서야 용케도 지금껏 호구 잡히지 않고 살아왔는걸.’
내가 조금만 더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아주 쪽쪽 빨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염치가 있지……. 선물로 받은 물건을 어쩔 수 없이 패물로 쓰는 것과 애초부터 패물로 쓰기 위해 물건을 받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끄으으응.”
나는 이 보석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전전긍긍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업시간 도중 잠시 쉬는 시간이 남아 내 방을 찾아온 루카는 그런 날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고민해? 그 아저씨가 선물로 준 거 아냐?”
“선물을 이렇게 줄 줄은 몰랐지. 이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아, 분명 남은 거 돌려 주려고 하면 안 받으려고 할 것 같단 말이지.”
“뭘 거기까지 고민해? 그냥 전부 이모가 가져.”
루카가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편히 쉬고 싶다 고집을 부린 덕에 방에서 하녀들도 전부 내보냈다.
그때는 왜 갑자기 안 하던 떼를 쓰나 싶었는데, 인제 보니 남들 앞에서 엄마 소리 하기 싫었던 게 분명했다.
하긴 엄마 소리를 질색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지금이야 루카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지만, 내가 유디트가 했던 짓을 기억 못 하는 건 아니다.
루카 또한 그럴 테지……. 보통 서러운 일은 더욱 기억에 선명히 자국 남으니까.
뤼디거와 처음 만났을 때야 낯선 사람이 두려워 엄마라 불렀을 테지만, 그런 이모를 계속해서 엄마라 부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닐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입이 썼지만, 루카 앞에서 티 내고 싶진 않았다. 나는 모르는 척 덧붙였다.
“부담스럽다고.”
“그거야 이모 사정이고. 그 아저씨는 전혀 부담 안 느낄 텐데.”
루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전전긍긍하는 것과 달리 너무나 태연해 보였다. 마치 빈터발트 사람처럼…….
아니, 애초에 빈터발트 사람이니 틀린 건 아니겠다마는…….
하지만 루카의 말은 점점 가관으로 치달아 갔다.
“그냥 받아둬. 나중에 비자금으로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 아저씨가 그런 거 신경 쓸 만큼 쪼잔한 사람도 아니고.”
루카는 어른스레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 열 살짜리 애가 비자금 운운한 거 맞지……?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루카를 바라보았다.
얘가……. 왜 이렇게 됐지.
잠깐 내가 교육에 신경 못 쓴 사이, 루카가 완전히 귀족적 마인드의 꼬맹이가 되어버렸다.
아니, 귀족의 소양을 배우는 건 좋지만, 이건 좀 아니잖아?
루카의 교육에 대한 회의감과 죄책감이 뒤섞였다.
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루카를 엄히 질책했다.
“아무리 귀족이 됐다 해도 그렇지, 사람 선물을 그렇게 치부하는 거 아니야, 루카. 넌 네가 준 선물 내가 어디다 팔아버리면 좋겠니?”
“……아니.”
“물론 이모가 고루하고 어리석은 걸지도 몰라. 남들은 다 약삭 빠르게 구는데. 하지만 루카, 아무리 뤼디거가 돈 많은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람이 나한테 돈 쓸 이유는 없어. 이건 다 너를 생각해서라고. 네가 내 조카니까 나를 신경 써준 거야. 근데 내가 그 선물을 아무렇게나 받으면 어떻게 되겠니? 조카 팔아서 돈 버는 꼴이잖아.”
“……진짜 그렇게 생각해?”
루카의 눈이 의심스레 빛났다.
아니, 그럼 가짜로 그렇게 생각할까?
물론 뤼디거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긴 했다.
‘이런 씀씀이에 익숙해져 버리면 나중에 어떻게 줄여. 나태해져 버린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이야.’
소비 습관이란 것은 자고로 늘리긴 쉬워도 줄이기는 어려운 법이다.
나라고 해서 언제까지 빈터발트에서 머물 생각은 없었다.
루카가 적당히 자리 잡고, 프란츠 문제가 해결되면 나도 내 인생 찾아 떠날 계획이었다.
물론 계속해서 루카의 엄마인 척 행세하며 빈터발트에 남을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럴 염치도 없거니와, 언제까지 조카에게 얹혀살 수는 없었다.
‘조카 팔아 돈 버는 건 싫다 해놓고선 조카한테 빈대 붙는 것도 웃기잖아. 뭐…… 빈터발트 가에서 맨몸으로 내쫓진 않을 거라 기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제넘은 생각인 것 같지만.’
나는 픽 웃었다.
하여튼, 나중에 생활 수준이 팍 떨어졌을 때 덜 괴로우려면 지금부터 스스로 자각하고 경계하는 게 상책이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언젠간 벌어질 일이었다.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스스로를 규제할 수밖에 없었다.
‘사서 고생하는 성격 같지만……. 어쩌겠어. 이렇게 생겨 먹은걸. 그러니 지금 빈터발트에 와서 이러고 있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복잡한 생각을 일축해 넘긴 나는, 루카의 삐뚤어진 생각을 교화하고자 노력했다.
“당연하지.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해, 루카. 과욕은 언제나 파멸을 부르는 법이거든.”
프란츠도 그랬고 말이야. 나는 쓰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