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3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36화
“어떻습니까. 이쯤이면 유디트 씨에 대해 불손한 발언을 하는 이들은 없을 겁니다.”
너였냐!
나는 배신감 어린 눈으로 뤼디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는 듯, 언제나와 같은 멀끔한 낯이었다.
완전 내 패배다…….
이젠 뤼디거의 행동에 뭐라 반박하는 것도 두려웠다. 그랬다가는 또 무슨 짓을 할지, 원…….
그는 완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었다.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던 나는 항복하듯 손을 들어 보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러니 다른 소문은 인제 그만둬요.”
“네. 제가 봐도 더 이상의 선동은 무가치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 선동까지 했냐? 프로파간다도 아니고…….
남에 관한 이야기를 삐라 뿌리듯 잘도 뿌리고 다녔겠다.
뤼디거에 대한 고마움이 갑자기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것도 상식과 정도 내의 일이어야지, 어느 누가 소문을 종식해 주겠다고 다른 식으로 선동을 한단 말인가.
이건 과연 군대식 방법일까, 아니면 귀족식 방법일까.
조용히,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 없이 지내고 싶었던 나는 뤼디거에게 이런 식으로 소문을 퍼트리는 일은 하지 말아달라 거듭 부탁했다.
뤼디거는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것이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그게 아니면 선동만 하지 않겠다는 뜻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물론 뤼디거가 손을 뗀다 해서 소문이 멈추지는 않았다. 이미 번진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소문 속의 나는 역전의 용사였고, 전쟁터를 전전하는 용병이었다.
소문의 화룡점정은 내가 전쟁터에서 뤼디거를 구해줬다는 이야기였다.
그 때문에 뤼디거가 나한테 이것저것 챙겨주고 신경 써주는 거라는, 그런 소문.
참 나, 듣고 내 어이가 없어서…….
도는 소문이 너무 가당치도 않으면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소문도 좀 그럴듯해야지, 저런 얼토당토않은 소문을 믿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야?
라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제야 나에 대한 뤼디거의 미심쩍은 행동의 미싱링크가 풀렸다는 듯, 모두가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생명의 은인쯤 되지 않으면 뤼디거가 저런 행동을 보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 이후, 뤼디거가 나에게 지나치게 플러팅을 하거나 과한 선물을 해대도 하녀들의 시선이 이상해지는 일은 없었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시선 속에서 뤼디거는 더욱 뻔뻔스레 접근했다. 오죽하면 루카가 성을 낼 정도였다.
“아니, 저 아저씨는 일도 없대? 왜 맨날 이모한테 붙어 있는데?”
“그러게…….”
하녀들은 모두 뤼디거의 괴이한 행동에 이유를 붙여주고 납득했지만, 반대로 이유를 빼앗긴 나는 또다시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예전이라면 루카에 대한 책임감이라 믿었겠지만, 이제는 그 또한 희미해졌다.
뤼디거에게 있어 책임을 지는 것과 신경 쓰는 것이 별개의 무게를 지닌다는 것 정도는 이제 파악했으니까.
‘확실히 나한테 유난한 게 맞는 거 같은데…….’
나는 내 앞에서 우아하고도 절도 있는 모습으로 차를 마시는 뤼디거의 모습을 의심스레 바라보았다.
칼로 깎아내린 듯 잘생긴 얼굴에 햇빛이 비치며 그림자가 생겼다. 마치 그림으로 그려낸 듯한 모습이다
턱을 괸 채 명화 감상하듯 그 풍경을 바라보던 나는 충동적으로 툭, 말을 던졌다.
“저기요, 뤼디거 씨.”
“네. 말씀하십시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찻잔을 들고 있던 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내가 그를 빤히 보고 있던 것이 아니라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작은 미동이었다.
뤼디거는 이내, 태연히 찻잔을 탁자에 내려두고는 나와 눈을 마주했다.
“말씀하시는 연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것저것 챙겨주시고……. 가끔 부담스러운 말씀도 하고 그래서요.”
“부담스럽습니까? 어떤 발언이요?”
“일일이 말하기엔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까? 저는 이상한 점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귀족 신사라면, 숙녀분께 당연한 행동들 아닙니까? 신사로서 숙녀분을 보필하는 건 당연하지요.”
신사에 강점을 두어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일말의 찔림조차 없다는 듯이.
그 말을 듣고 있자 하니 내가 귀족사회를 잘 몰라 과하게 반응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긴, 뤼디거가 다른 귀족 여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본 적 없긴 하지.
하녀들에게 그리도 냉정했던 건 그 숙녀에 하녀들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녀들은 평민이고, 귀족이 아니니까.
나 또한 귀족이라기엔 어폐가 있었지만, 루카의 이모이니 또 사정이 다른 모양이었다.
물론 하녀는 사람 취급도 안 해주는 뤼디거의 태도가 옳다는 건 아니었다.
더할 나위 없이 귀족적이고 차별적이지. 하지만 북부의 지배자 빈터발트 공작가의 적자로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뤼디거는 귀족 중에서도 심한 편 같지만……. 그런 점이 나에게 유난히도 이질적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막상 이유를 알고 나니 혹시나 하는 심정에 조금 부풀었던 기대가 푸시식 식어버렸다.
지금껏 그의 의중을 짐작하기 위해 전전긍긍한 게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 힘이 빠진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아……. 그래요?”
“예.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십시오. 제가 해드리고 싶어서 해드리는 거니까요.”
“으음……. 네. 제가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귓가가 좀 발그레 타올랐다.
지금껏 나 혼자 유난 떤 것 같잖아.
아니지. 하녀들도 다 착각했을 정도면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지.
사람 헷갈리게 하고 말이야…….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뤼디거에게 책임을 미뤘다.
사실 뒤통수가 좀 얼얼하기도 했다.
다른 귀족 여인들에게도 나를 대하는 것처럼 굴까? 하나하나 신경 써주고, 책임지겠다 말하고…….
그 모습을 떠올리니 왠지 모를 배신감이 나를 잠식했다.
거기까지 떠올리곤 나는 퍼드덕 몸을 떨었다.
배신감이라니……. 나도 모르게 그의 특별대우에 기대하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뤼디거가 날 좋아해서 그러는 게 아닐 거란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나는 스스로의 한심함에 혀를 찼다.
만약 내가 저런 생각을 했다는 걸 뤼디거에게 들킨다면…….
창피해서 도무지 얼굴을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럴 때만큼은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겉으로 티가 하나도 나지 않는 뤼디거가 부러웠다.
뤼디거는 언제나와 같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저 없이 말을 이었다.
“금방 익숙해질 겁니다. 하루 빨리 유디트 씨가 저에게 익숙해지셨으면 좋겠군요.”
여전히 모호한 화법이란 말이야. 이게 바로 귀족식 화법인가.
도무지 적응될 것 같지 않았다.
방계 모임에서 다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나도 이런 말투를 써야 한다거나…….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뤼디거의 화법에 적응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저런 의미심장한 발언이 실상은 별 의미 없는 예의적 화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다행이었다. 이젠 착각하지 않을 테니까.
“네. 최대한 노력할게요.”
내가 그리 답하자, 뤼디거의 눈매가 휘어지며 곡선을 그렸다.
그는 이보다 기쁜 것은 없다는 듯, 정말 화사하게 웃었다.
그 순간의 기쁨만큼은 진실 되어 보일 정도로, 그의 눈동자가 산란한 빛에 반짝이는 얼음 조각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예상치도 못한 그의 웃음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나는 숨을 들이켰다.
피식 웃거나 잔잔한 미소조차도 드문 사내가 아니던가.
일순간 세상이 새하얗게 변하며 모든 생각이 바스러져 사라졌다.
도대체, 왜?
내 대답의 어느 부분이 그를 기껍게 만든 건지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긴, 내가 뤼디거의 무엇을 짐작해 낼 수 있겠냐마는…….
흐트러진 내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내 사고를 마비시킨 뤼디거의 미소 또한 온데 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순식간에 얼굴의 미소를 지운 그는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내 눈에 잔상처럼 들러붙어 좀처럼 떠나 질 않았다.
그 이후로도, 나는 한참을 멍하니 넋을 빼놓고 있었다.
좀처럼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던 나는 뤼디거의 말을 한두 마디씩 놓치고 되묻기를 반복했다.
어찌나 깊숙이 박혔는지, 홀로 침대에 잠들기 위해 눈을 감은 순간에도 문뜩문뜩 떠오를 정도였다.
마치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나는 한동안, 뤼디거의 잔상과 함께 새벽을 지새웠다.
동터 오르는 해를 뜬눈으로 맞이하며, 그제야 나는 내 감정을 자각했다.
나도 모르는 새, 그에게 마음을 줘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그가 날 좋아할 리가 없다는 것에 대해 나 홀로 몇 번이고 곱씹고 확인 사살까지 끝낸 뒤에서야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다니.
멍청하기도 이렇게 멍청할 수가.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눈을 찔렀다.
유난히도 날카로운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셨던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맺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내려가 베갯잇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