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40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40화
“…….”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루카의 얼굴이 울 듯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 찰나였다.
감정의 일렁이는 파동은 내가 본 게 진실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자기 소원이 뭐냐는데 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 하여간…….”
루카는 못 미덥다는 듯 투덜거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개가 숨겨둔 먹이 위에 모래를 뒤덮듯, 자신의 감정을 어설프게 감추는 티가 났다.
그 증거로, 루카의 금빛 머리 칼에 덮인 귀 끝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개를 돌린 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루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갈게. 수업 시간 됐어.”
“어? 루, 루카!”
얼마나 후다닥 도망쳤는지, 당황한 내가 루카를 몇 번이고 불렀지만 돌아보지도 않을 정도였다.
“참 나. 이상한 데서 부끄럼을 탄단 말이야…….”
나는 쯧쯧 혀를 찼다. 그래도 처음보다 많이 밝아진 것이, 기분 전환이 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 맞아. 루카 소원이 뭔지 듣는 거 잊어버렸네.”
뒤늦게 떠올린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꼭 들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에 대해 묻기엔 이미 타이밍을 놓쳐버린 뒤였다.
뭐, 나중에 또 기회가 오겠지. 나는 훗날을 기약하며 그 일을 기억 너머로 넘겼다.
CHAPTER5. 원작 궤도에 진입해 보겠습니다.
방계 모임 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빈터발트 성에 마차가 끊임없이 줄줄 이어졌다.
몰려든 방계의 사람들을 맞이 하느라 빈터발트는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나는 사정이 좀 나았다. 저녁에 있을 연회 준비를 하느라 바빠 사람을 응대하는 자리엔 슬쩍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방계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다 일일이 인사를 해야 했더라면…….
으으. 저녁 연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기진맥진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마냥 편한 상황은 아니었다.
“로라,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아뇨! 피부 결을 정리했을 뿐인 걸요! 아직 멀었어요!”
로라는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흥얼거리며 내 눈썹 결을 정리한 로라는 돌연 내 턱을 잡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순식간에 견적을 냈다.
“속눈썹이 짙고 선명해서 따로 그릴 필요는 없네요. 눈두덩이 위에 색 파우더를 얹을게요. 조금만 눈을 내리깔아 주세요.”
“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니?”
“물론이죠.”
내 희미한 저항은 로라의 단호함 아래 뭉개졌다. 평소의 로라답지 않은 과감한 결단에, 나는 떨떠름히 얼굴을 내어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화장으로 끝이 아니었다. 머리 정돈에, 드레스에……. 보석 장 식까지.
‘으으, 노이할트에서의 악몽이…….’
오도카니 서서 뤼디거와 루카가 내 옷을 고르던 때가 떠올랐다.
그래도 이번엔 드레스가 준비되어 있어 다행이다. 적어도 앉아 있을 수는 있으니까.
“마님, 보석은 어떤 거로 할까요? 큰 마님께서 선물하신 요정의 눈물? 아니면 둘째 도련님이 선물하신 루비나 사파이어?”
결국 내 예상대로, 뤼디거가 선물한 보석 세트는 고스란히 내 방에 남았다. 뤼디거는 어차피 제 방에 두나 여기 두나 차이가 없다며 우겼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이번 방계 모임 때 차보고 돌려줘도 된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엔 강경하게 거부하던 나도 뤼디거의 끈기와 집착과 우기기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돈 쓰는 네가 그러고 싶다는데…….
그 결과 나는 보석을 색별로, 그리고 종류별로 소유하게 되어 버렸다.
보석이 많으니 고르는 것도 일이다. 나는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보석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오늘 드레스가 연회색이니, 보라색 보석이 잘 어울릴 것 같네. 라벤더 다이아로 부탁해.”
그래도 처음인데. 뤼디거가 골라준 보석을 선택하는 게 낫겠지. 소피아가 선물한 보석은 인간적으로 너무 화려하고…….
“마님의 엷은 금발에도 무척 잘 어울릴 거예요. 그럼 그걸로 준비할게요.”
로라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하녀가 냉큼 유디트의 보석함을 들고 왔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사이 연회 시간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치장을 끝마친 나는 초조히 방 안을 거닐었다. 긴장 때문일까. 손이 차게 식었다.
“준비 끝났어? 생각보다 이르네.”
“루카.”
준비를 끝낸 루카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
결 좋은 금발은 곱게 쓸어 넘겨져 있었고, 새하얀 뺨은 보기 좋게 발그스레했다.
목에 매인 실크 넥타이를 비롯하여 예복의 옷감은 보기만 해도 윤기가 흘렀고, 단정하게 다려진 바짓단은 아직도 뻣뻣했다.
뺨에 흙을 묻히고 구멍 난 신발을 신은 채 뒷산을 뛰어다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른의 예복을 작게 줄인 것 같은 아이용 예복을 입은 루카는 마치 왕자님 같았다.
나는 루카를 감격 어린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내가 당혹스러웠는지, 루카가 떨떠름히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아니. 도련님 같아서.”
“참 나.”
루카는 기가 찬 듯 혀를 찼다. 어린애 취급당하는 것이 불만인 듯한 낯이었다.
루카는 이내 나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뭐, 엄마는……. 나쁘진 않네. 이거, 엄마가 고른 옷 아니지?”
말하는 꼴이 누가 보호자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나는 어처구니 없는 심정을 누르며 되물었다.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확신하는데?”
“엄마가 골랐으면 지금처럼 멀쩡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 정도는 아니거든? 보석도 내가 고른 거거든?”
나는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루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응……. 그거, 아저씨가 고른 거지?”
“응? 으응.”
“애초에 이모, 아니, 엄마 옷에 잘 어울리는 거로 사 들고 온 것 같은데. 엄마 옷도 다 아저씨가 고른 거지?”
“으응…….”
어떻게 알았지. 한창 수업이다 뭐다 해서 바빠서 모를 줄 알았는데…….
실제로 이번 방계 모임에 입을 드레스는 뤼디거의 감수 아래 맞춘 옷이었다.
제단사와의 미팅에 부득불 참여하겠다고 하더니…….
난 또 내가 예의에 맞지 않는 옷을 고르면 어쩌나 걱정해서인 줄 알았는데, 단순히 내 옷 고르는 센스를 못 믿어서 그러는 거였나 보다. 상처가 두 배다.
할 말을 잃은 나는 당혹해서 말끝을 흐렸다.
루카는 그런 나를 보며 눈을 휘어 웃었다.
“그래도 잘 어울리네. 예쁘다.”
반짝이는 호수 같은 눈동자가 휘어지며 그믐달처럼 변했다.
평소 뚱한 표정에도 눈에 띄는 미소년이었던 루카가 만개하는 황금장미처럼 화사하게 미소 지으니, 주변마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얼굴 아래, 나를 보며 미소 짓던 뤼디거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건 무척 묘한 일이었다. 뤼디거와 루카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지금처럼 때때로 무척이나 닮은 표정을 짓곤 했다.
오랜 시간을 공유한 이들 특유의, 닮아간 표정을.
‘오랜 시간 함께해서 닮았다기보단……. 역시 핏줄의 위력인가. 핏줄이 무섭긴 무섭네. 뤼디거가 볼 땐 나랑 루카도 이렇게 닮아 보이려나.’
그리 생각하곤 픽 웃음 지었다.
방금 루카의 미소에 황금장미니 뭐니 칭찬을 잔뜩 늘어놓고는, 그와 닮았으면 좋겠다니.
조금 양심 없는 생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뤼디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그가 찾아왔다.
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들어가도 됩니까?”
“네. 준비 끝났어요.”
나는 황급히 답했다.
화려한 드레스와 화장 등은 그저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었다.
방계 모임이라는 날선 전투장에 들어서기 위한, 일종의 방패이자 검이었다.
나는 예쁘게 보이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초라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경계를 살 만큼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그래서 하녀들이 입을 다물 새 없이 칭찬을 늘어놓는 것을 들으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 모습으로 뤼디거를 마주하게 되니, 괜스레 심장이 뛰었다.
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기라도 한 걸까?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나는 홀로 픽 웃었다.
내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뤼디거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연회복이 아닌 검은 대령 예복을 차려입은 그는 평소보다도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검은 예복은 금사로 자수가 놓여 있었으며, 드넓은 어깨에는 예식 견장이 있었다.
그 밑으로 두 줄의 금색 견식이 그의 가운데 단추로 이어졌다.
드넓은 가슴에는 훈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하나같이 화려한 것이 그의 공적을 단적으로 알려주었다.
완벽하게 쓸어 넘긴 머리카락 밑으로 훤히 드러난 매끈한 이마선 그리고 짙은 눈썹과 콧대, 턱의 조화가 완벽했다.
아, 그를 짝사랑하는 사람에겐 파괴력이 너무 큰 차림새다.
마치 명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 같은 모습에 나를 비롯해 뤼디거라면 두려움에 벌벌 떨던 하녀들도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