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43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43화
작위로 따지자면야 발언권이 그리 높지 않지만, 빈터발트 공작의 유일한 친조카이니만큼 방계 내에서는 제법 영향력이 있었다.
노부인은 새초롬히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이 논쟁에서 빠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더 이상 말을 섞어서 좋을 게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프란츠는 살살 눈웃음을 치며 뤼디거에게 친한 듯 말을 건넸다.
“평소 점잖더니, 왜 갑자기 그리 목에 핏대를 세워?”
그의 말투에서 친분이 뚝뚝 묻어났다.
뤼디거에 대해 무척 잘 안다는 듯한 태도.
‘과연 쟤는 뤼디거가 자기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알고는 있을까…….’
‘거들먹거릴 줄만 아는, 주제 모르는 욕심 많고 멍청한 놈’이었었나.
프란츠의 유들유들한 낯을 보아하니, 뤼디거가 저를 그리 생각하는 줄 꿈에도 모르는 것 같았다.
뤼디거의 청회색 눈동자가 프란츠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프란츠와 같은 친분이 아닌, 명백한 적의였다.
“핏대? 빈터발트를 우습게 보는 발언에 핏대를 세우지 않으면, 언제 핏대를 세워야 하지?”
저에게도 날 세워 대할 줄은 몰랐는지, 프란츠는 당황한 낯으로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이 퍽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프란츠는 북부인답게 키가 훤칠했고, 짙은 다갈색 머리카락과 연둣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흐릿한 인상의 온 순한 외모는 마치 리트리버 같았다.
저런 선량한 얼굴로 사촌 조카에게 그런 개 같은 짓을 했단 말이지…….
반면 프란츠의 아버지, 아돌프 버켄레이스 백작은 막시밀리안하고 엇비슷한 외모였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에 어찌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모습이 괴리감이 컸다.
솔직히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좋지 않지만, 뤼디거가 아돌프가 배후에 있을 거라 단단히 믿는 것이 지금 절실히 공감 갔다.
솔직히 나도 프란츠에 대해 모르고 있었으면 그리 믿었을 것 같았다.
하여튼 뤼디거는 지금껏 프란츠에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거지?
이유가 궁금했던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 퍼뜩 루카를 떠올렸다.
나야 이런 상황을 짐작했다지만 루카는 괜찮을까.
가문 어른들의 노골적인 적대에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
강한 척해도 어린아이니까…….
나는 황급히 옆에 앉은 루카의 안색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의자에 앉아 있는 루카의 얼굴이 무섭도록 무표정했다.
마치 인형처럼 오도카니 앉아 정면만을 보는 루카의 푸른 눈동자가 얼음처럼 시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루카에게 미리 언질 주는 건데……. 아니, 귀족이란 사람들이 이렇게 대놓고 폄훼할 줄 알았나.’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내 마음 한켠이 묵직해졌다.
나는 작게 한숨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우연일까, 프란츠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사람 좋은 낮을 한 채 웃어 보였다.
웃는 낯에 침 뱉기도 뭐하고, 일단은 상대가 사람 좋은 낯을 하고 있는 만큼 나 또한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하지만 프란츠는 좀처럼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얼결에 눈싸움 비슷한 게 되어버렸다.
‘도,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셈이지.’
다행히도 시선의 대치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빈터발트 공작과 공작 부인이 연회장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앗아간 빈터발트 공작, 막시밀리안이 운을 뗐다.
“다들 모였군.”
막시밀리안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완연한 정적 속에서, 막시밀리안은 겉치레식 인사를 건넸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부전자전이라더니. 사람을 찍어 누르는 방식만큼은 뤼디거와 똑 닮아 있었다.
나는 방계 사람들이 막시밀리안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단 번에 눈치챘다.
공작이 한마디 할 때마다 흠칫 흠칫 떨어대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뤼디거가 제 아버지를 북부의 지배자가 아닌 북부의 독재자라 평했었는데, 그 말이 과장이 아니었던 듯싶다.
“자네들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빈터발트의 새로운 후계자를 공표하기 위해서네. 루카.”
막시밀리안의 부름에 루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막시밀리안의 옆에 가서 섰다.
루카는 요나스를 쏙 빼닮았지만, 뤼디거와 닮은 구석이 없는 만큼 할아버지인 막시밀리안과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하나하나 쏘아보는 푸른 눈동자의 기백만큼은 똑 닮아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그런 루카의 어깨를 짚은 채, 사람들에게 루카를 소개했다.
“서신을 통해 미리 알려두었지만, 이 아이가 바로 요나스의 아들이네. 우리 빈터발트를 이을, 새로운 후계자지.”
손자를 소개하는 막시밀리안의 목소리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손자로 인한 곤혹스러움도, 혈육에 대한 애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루카, 인사하거라.”
“……루카 마이바움입니다.”
한 발짝 앞에 나선 루카의 새하얀 얼굴은 냉막했지만, 푸른 눈동자는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얌전한 듯 보이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게 화약고 같은 성정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만큼, 나는 노심초사했다.
혹시라도 루카가 성을 내며 난리를 치기라도 하면…….
아, 아냐. 루카가 그럴 리 없어. 얼마나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은 아이인데!
하지만 그렇게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은 아이는 암살자와 대치했을 때 바로 튀어나간 전적이 있습니다…….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 내 불안과 달리, 루카는 무척이나 침착했다.
루카는 예법 수업에서 배운 대로, 완벽한 인사와 귀족의 화법을 구사했다.
“저를 보기 위해 이 빈터발트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평범한 인사말에 나는 잠시 안도했다.
하지만 그건 내 오산이요, 착각이었다.
루카의 말투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했으나, 내용마저 공손하진 않았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보러온 것은 루카 마이바움이 아니라, 루카 빈터발트인 모양입니다. 그러니 제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말을 내뱉으신 것이겠지요. 한낱 평민 아이의 귀가 뭐가 두려웠겠습니까?”
자, 잠깐! 루카!
당황한 내가 황급히 루카를 제지하려는 눈빛을 보냈지만, 루카는 슬쩍 시선을 피한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 곧 루카 빈터발트가 됩니다. 그리고 제가 루카 빈터발트가 되면, 오늘 어르신들께서 제 어머니께 건넨 말씀들이 어떻게 당신들께 돌아갈지 기대해 주셔도 좋습니다.”
그리 말하며 루카는 나에게 한 소리 했던 방계 사람들과 하나 하나 눈을 마주쳤다.
기억하고 있단 뜻이었다.
아, 이런. 망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나는 띵하게 아픈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부지불식간에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고삐를 어떻게 다시 쥔단 말인가?
루카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을 봤을 때 짐작했었어야 했는데.
아니, 아까는 얌전히 듣고 있길래 그렇게까지 빡치진 않은 줄 알았지…….
아까의 흉흉한 분위기가 간신히 진정되었는데, 루카의 발언은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카의 협박 어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계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마디씩 던졌다.
“뭐?”
“아니, 저 녀석이……!”
“하, 네가 벌써 뭐라도 된 것처럼 건방지게 구는구나!”
다들 발끈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루카의 건방진 발언에는 프란츠 또한 불쾌감을 감출 수 없는지, 그의 온순한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긴, 뤼디거에게 한소리 듣는 것보다 루카에게 한소리 듣는 게 충격이 더 크긴 하겠지.
서른두 살이랑 열 살이랑 파급력이 다르잖아?
프란츠는 여전히 웃는 낯을 유지하곤 있었지만, 그의 뺨이 작게 떨렸다.
결국 참지 못한 그가 한마디 내뱉었다.
“이제 막 가문의 일원이 되었는데, 날 때부터 빈터발트였던 것 같구나.”
다른 방계 사람들에 비하면 온건한 발언인 편이었지만, 미처 억누르지 못한 감정의 편린이 섞여 있었다.
온건한 외모에 그래도 혹시나 하였는데 역시나인 모양이네…….
어른들이 흉흉한 기세로 쏘아보거나 말거나, 루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레 천연덕스레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제가 그대로 돌려드리면 곤란한 말씀이라도 하셨나요? 어르신들께서 왜 그리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지 그래……?
이건 부채질 정도가 아니다.
돌려 먹이는 것이 어찌나 능청스러운지, 내가 알고 있는 루카가 아닌 줄 알았다.
‘원래도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저런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배워온 거지? 화술 수업에서 저런 것도 배우나?’
처음 보는 루카의 모습에 내가 멍하니 넋 놓고 있는데 내 건너에 앉아 있는 뤼디거는 아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무덤덤한 낯으로 루카를 지켜보았다.
소피아도, 막시밀리안도 딱히 당황하지 않은 채 덤덤했다.
빈터발트 중에서 나만 호들갑 떠는 것 같았다.
‘이래도 괜찮은 거야,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