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44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44화
자칫하다간 루카가 가문에 입적하기도 전부터 방계의 미움을 잔뜩 받게 생겼는데, 왜 다들 그렇게 평안하신지요……?
특히 김루카, 너 말이야, 너!
루카는 멀끔한 인형 같은 얼굴로 새치름하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듯 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나한테 애 교육 어떻게 시켰냐는 화살이 돌아올 것 같은데…….
그런데 루카가 저렇게 불퉁 난 이유를 따지고 보면 내가 무시 당해 그런 거란 말이지…….
아, 그건 좀 기특하고 장하고 그러네.
하여튼 이 상황을 벗어날 만한 기가 막힌 계책이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날카로워져 가는 분위기 속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먼저 나서서 루카를 혼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랬다가 루카가 우습게 보이면 어쩌지?
솔직히 칭찬했으면 칭찬했지, 혼내긴 싫은데…….
그렇게 내가 전전긍긍하고 있는 와중, 막시밀리안이 입을 열었다.
“꼴이 아주 잘 돌아가는군. 그란도 자작.”
“네, 네!”
그란도 자작이라 불린 이는 루카에게 큰 소리로 무어라 했던 사내였다. 그란도 자작은 쩔쩔매며 고개를 조아렸다.
막시밀리안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그란도 자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참으로 이상한 말을 하더군. 뭐라도 된 것처럼 군다니. 루카는 빈터발트의 후계자다. 차기 북부의 지배자지. 이 정도 발언도 못 할 위치가 아닐 텐데?”
“…….”
막시밀리안에게 한 소리 들은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막시밀리안의 화살이 프란츠에게도 향했다.
“버켄레이스 경.”
“……네.”
프란츠는 황급히 표정 관리를 했다.
막시밀리안에게 불리니 뒤늦게 아차 한 낯이었다.
프란츠를 바라보는 막시밀리안의 눈동자에 경멸이 스쳤다.
조카를 바라보는 백부의 시선이라기엔 지나치게 냉막한 시선이었다.
그래도 제법 가까운 혈족 사이임에도, 막시밀리안은 꼬박꼬박 호칭을 붙여 불렀다.
하긴, 아들에게도 냉정한 사람이 조카에게 살갑고 관대할 리 없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막시밀리안답다고 해야 할지…….
방계와 직계를 칼처럼 나누는 뤼디거의 생각이 어디서 비롯된 건가 했더니, 막시밀리안이 원인이었던 모양이다.
막시밀리안이 친척을 모두 작위로 호칭하는 것은, 방계와 직계 사이에 일말의 끈도 연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끈이 이어지면 사람의 욕심이란 것이 그 끈을 타고 올라온다.
막시밀리안은 자신에게 기어오르는 그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루카는 요나스의 혈통이다. 당연히 날 때부터 빈터발트인 게 당연한 존재지. 네가 그러지 못했다 해서 루카도 그러지 못할 거라 생각지는 말거라.”
“……네.”
프란츠는 굴욕을 목 너머로 삼키며 온순히 대답했다.
막시밀리안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태도였다.
후벼 파는 말에도 잠잠한 걸 보아하니 인내심은 어느 정도 이상인 듯싶었다.
하긴 그러니 5년을 기다려 빈터발트를 집어삼키지.
이전부터 품고 있었던 야망의 기간까지 하면 근 이십여 년 가까이였다.
그동안 뤼디거와 막시밀리안이 그의 의중을 눈치채지 못한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제 생각을 잘 숨기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도 소설을 몰랐더라면 전혀 짐작도 못 했겠지.’
막시밀리안이 나서자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루카의 건방진 말투와 혈통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이들 모두 입 하나 벙긋거리지 못했다.
괜히 입을 열었다 불똥이라도 튀면…….
그렇게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프란츠가 다시 거수했다.
모두의 시선이 프란츠에게 집중되었다.
아까 막시밀리안에게 혀끝으로 두들겨 맞고도 개의치 않는 것이 그의 근성을 나타내주었다.
‘쟤도 진짜 어지간하다.’
정작 그의 아버지로 추측되는 아돌프 버켄레이스 백작은 막시밀리안의 눈치를 보며 입술 한 번 벙긋거리지를 않는데 말이다.
프란츠의 말을 막을 생각은 없는지, 막시밀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언하라, 버켄레이스 경.”
프란츠는 막시밀리안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춰 말했다.
“루카는 언제쯤 가계도에 올릴 생각입니까? 고뷜로 백작의 피를 이었으니 왕실 어르신들에게도 연통을 넣고 소개를 해야 할 텐데, 그전에는 빈터발트의 이름을 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대한 빠를수록 좋을 것 같습니다.”
쟤가 무슨 속셈이지?
프란츠의 말대로 아직 루카는 요나스의 밑에 입적되지 않은, 마이바움의 성을 달고 있는 상태였다.
뭐, 딱히 입적을 미루고 있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빈터발트에 왔을 때 내정된 일이기도 했고…….
하지만 루카가 좀처럼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방계 사람들 앞에서 곧 빈터발트가 되면 두고 보자며 기세 좋게 을렀던 것과 달리, 입적 이야기가 나오면 어물어물 말을 흐리곤 했다.
어차피 당장 급할 일도 없겠다, 루카가 조금 더 공작가에 적응하고 나서 차차 진행해도 되는 일이다.
그렇게 루카의 입적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뭐, 결국 언젠가는 입적되겠지만…….
하여튼 루카가 입적되는 것은 확고부동한 빈터발트 후계자로 서의 낙점과도 같은 말이었다.
한마디로 프란츠로서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원래 소설 속에서 이런 장면은 없었기도 하고.
그런데 왜 갑자기 루카의 입적을 재촉하는 걸까? 프란츠를 바라보는 내 눈이 의심스레 가늘어졌다.
하지만 프란츠의 의중에 의심을 품은 것은 나뿐이었다. 막시밀리안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번 방계 모임 후 입적할 계획이다.”
“공작님의 영민한 판단에 제가 섣불리 입을 대었군요.”
프란츠는 빙긋 웃으며 능청스레 대꾸했다.
이래서야 어쩔 수 없이 입적 시기가 당겨지겠는걸. 나는 걱정스레 루카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루카의 입술이 작게 나와 있었다. 속으로 잔뜩 투덜대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입적을 피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가 좋을 일이 없다.
영민한 루카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루카는 불만스러운 게 많아 보였지만, 크게 목소리를 높이진 않았다.
작게 한숨을 쉰 내가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프란츠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살살 눈웃음치며 나에게 추파를 던졌다.
……응? 추파? 왜?
잠시 사고가 정지된 나는 딱딱하게 굳은 채 그의 눈짓을 고스란히 받았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지만, 심장은 계속해서 쿵쿵 뛰었다.
뭐, 뭐야. 쟤. 왜 저래, 갑자기.
나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표정 관리를 했다.
하지만 표정 관리 하랴, 프란츠의 의중 파악하랴 바쁘다 보니, 썩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지금 자의식 과잉이라 저 시선을 예민하게 느끼는 거 아니지? 그렇지?’
하지만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 뤼디거 때도 혹시 날 좋아하는 게 아닌가 김칫국을 열심히 들이켠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냐. 그래도 저건…… 너무 노골적인데.
흘끔 본 프란츠는 여전히 나를 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혹시 나만 예민하게 생각하나 싶어 루카를 흘끗 봤는데, 루카의 표정도 썩어가고 있었다.
‘뭔가 속셈이 있는 게 분명해. 나한테 잘 보여야 한다거나, 친해져야 하는…….’
그때 내 머릿속을 퍼뜩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이사벨라 대신 날 이용하려고 그러나?’
이사벨라는 소설의 중간 악역으로, 프란츠의 숨겨진 애인이었다.
이사벨라가 등장하는 것은 루카가 왕실에 인사하러 수도로 올라가는 장면에서였다.
사교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녀는 자신의 자식이 요나스의 또 다른 사생아라 주장한다.
물론 그 아이는 요나스가 아닌 프란츠의 사생아였다.
그녀는 요나스에게 받은 사랑의 증표라며 회중시계를 제시하는데, 그 회중시계는 바네사 왕녀의 유품이었다.
바네사 왕녀라면 모든 기준이 너그러워지는 소피아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빈터발트로 받아 들이게 된다.
그 뒤 그녀는 공공연히 요나스의 부인 행세를 한다. 한마디로 지금의 내 위치였다.
내가 부득불 루카의 엄마로서 빈터발트에 올 결심을 한 것 또한 이사벨라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다.
이모였다면 결국 요나스의 애인이었다 주장하는 그녀에게 밀렸을 테니까.
루카의 양어머니 위치가 된 그녀는 겉으로는 요나스에게 이용당한 가련한 여인인 체하며, 뒤로는 음습하게 루카를 구박하고 괴롭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루카의 외모에서 보이는 혈통이 너무나 뚜렷했던 탓에, 이사벨라의 아이는 후계자의 위치까지 빼앗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더욱 루카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나마 루카에 대한 조부모의 신뢰가 굳건하고, 뤼디거가 루카를 비호한 덕에 루카는 괴롭힘에도 꿋꿋이 버텨냈다.
솔직히 양어머니랍시고 루카를 학대하는 이사벨라의 행동이, 원래의 유디트만큼 못한 것도 루카가 그 고난을 버틸 수 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아, 그렇게 생각하니 진짜 어지간했네, 유디트.
루카가 지금 날 잘 따르는 게 용할 지경이다, 정말.
하여튼 이사벨라는 전적으로 프란츠의 편이었다.
그녀는 빈터발트에 머무르며 가문의 정보를 프란츠에게 빼돌린다.
그 빼돌린 정보로 프란츠가 암살자를 배치한 탓에 결국 뤼디거가 죽고, 루카 또한 빈민굴에서 죽은 척 눈치를 살피게 되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작중에 큰 영향을 미치는, 프란츠의 가장 큰 수족이었다.
이사벨라가 정보를 빼돌린 게 결정적 타격이었던 만큼, 그녀가 빈터발트에 들어서지 못하게만 하면 프란츠의 속셈도 한풀 꺾이게 된다.
그래서 이사벨라가 등장하는 이번 수도행을 단단히 벼르고 있던 찰나였는데…….
프란츠는 도대체 왜 나에게 호의를 표하는 거지?
원작에 없었던 내가 미리 요나스의 애인 위치를 선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루카의 수도행이 원작보다 빨라졌다 보니, 이사벨라를 이용한 음모를 아직 떠올리지 못한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단…… 섣부르게 속단하지 말자. 프란츠로서는 그저 경우의 수를 하나 더 셈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
나는 좀 더 상황을 두고 보는 걸 택했다.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