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48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48화
* * *
하지만 일주일은 참으로 길고 길었다.
방계 사람들과 맞닥트려 소문을 키우고 싶지 않았던 나는 최대한 그들의 눈을 피해 다녔다.
물론 그런다 하여 방계 사람들과 전혀 마주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필이면 최근 들어 소피아가 더욱 자주 나를 불렀다. 루카의 입적과 곧 있을 수도행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라고는 하는데, 아무리 봐도 방계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서 내 핑계를 대는 것 같았다.
‘그래……. 방계 사람들이랑 만나는 게 달갑지 않겠지…….’
뒤에서 욕을 하는 그 속내가 얼굴을 마주했다 해서 완전히 감춰질 리 없다.
그렇게 소피아는 내 핑계를 대면서 방계와의 만남을 뿌리치고, 나는 소피아에게 불려 다니느라 방계 사람들을 마주치고…….
어쩌겠나. 소피아와의 관계에 있어선 내가 전적으로 눈치를 보는 입장인데.
그렇게 소피아와 면담하기 위해 오고 가는 동안, 복도의 이쪽 저쪽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방계 사람들과 참으로 많이 마주쳤다.
모퉁이만 돌면 사람과 마주치니, 지금껏 엄청 크다고만 생각했던 빈터발트 성이 처음으로 작게 느껴졌다.
마주친 그들은 나와 만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치떴지만, 씰룩이는 입가가 그들의 의도를 훤히 나타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사만 하고 지나쳐도 되는 상황에서 그들은 나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그냥 말만 걸면 또 몰라. 의도를 품고 자꾸 캐묻는데, 어휴…….
요나스와는 어떻게 만났냐는 둥, 요나스가 살아 있을 때 찾아오지, 왜 죽고 나서야 빈터발트에 찾아온 거냐는 둥…….
전부 대답하기 껄끄럽고, 대답해 주고 싶은 생각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그들은 성을 내며 화를 냈다.
대놓고 욕하지 않았다 뿐이지, 비아냥거리며 나를 모욕하는 것은 예사였다.
그럴 때마다 곁에 있던 로라는 이글이글 눈에 불꽃을 틔웠다.
그렇게 사나흘쯤 되었을까. 방계 사람들 몇이 내쫓겼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뿐 아니라 명단으로 작성해 차후 몇 년간 방계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제재까지 당했다 했다.
귀족으로서의 품위도 잊은 채, 입을 함부로 놀린 일 때문이라며 전하는 로라는 기세등등한 낯이었다.
“거 보세요. 제가 알아서 잘한다고 했죠?”
“그, 그래. 잘했어.”
소피아일까, 뤼디거일까……. 어느 쪽의 개입인지 가늠해 보았지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뭐, 잘 해결되었으니 되었다.
굳이 사건의 경위를 알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렇게 그 일을 묻었다.
하지만 아직 방계와의 문제는 남아 있었다.
친척 몇이 나와 소피아 욕을 해서 내쫓겼다는 이야기가 방계 사람들에게도 퍼졌는지, 그 뒤로는 이전처럼 심문하듯 캐묻지는 않았다.
손바닥을 뒤집듯 살랑살랑 웃으며 아첨을 하는데…….
그전까지는 일방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면, 이제는 나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했다.
빈터발트에서 내가 상당히 높은 발언권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소피아를 만날 수 없는 것도 한몫했으리라.
그녀 대신 그녀가 아끼는 것처럼 보이는 나를 회유해서 그들의 욕심을 채울 생각 같았다.
웃는 낯에 침 뱉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들에게 일일이 대꾸해서 쳐내는 것도 일이었다.
‘차라리 욕을 먹는 게 낫겠다.’
뤼디거나 소피아가 어떻게 그리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사람을 쓱싹 쳐내는지 알 것 같았다. 무뎌진 거겠지.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작 한 번 만나봐야 하는 프란츠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말이야…….’
그렇게 투덜거리기가 무섭게, 복도 맞은편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던 프란츠와 맞닥트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온다더니…….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네.’
나는 최대한 동요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복도의 창을 타고 저녁노을이 들이치며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렸다.
여름이라 해가 길지만, 그렇다고 방심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해가 뚝 떨어질 것이다.
어스름한 노을 아래, 늑대가 개로 가장하여 어슬렁 나에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마이바움 부인.”
휘어 웃는 눈웃음은 여전했다. 수더분한 낯은 무해하고 선량해 보였다.
여전히 낯만 봐서는 악당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좋은 오후입니다, 버켄레이스 경.”
“절 기억해 주셨군요.”
“공작님의 조카분 아닙니까.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야지요.”
나는 여유로움을 가장한 채 느릿하게 대꾸했다. 긴장했는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비꼬기만 하는 다른 방계 사람들에 비하면 예의를 차리고 서글서글한 듯 구는 프란츠가 훨씬 대화하기 편한 상대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제일 위험한 상대지, 제일 위험한 상대야.’
나는 속으로 몇 번이고 경계를 되뇌었다.
그때, 프란츠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제안했다.
“이렇게 마주친 것도 우연인데, 우리 차라도 한잔하지 않겠습니까?”
우연으로 가장했다지만 이 만남은 계획된 것이다.
내 행동반경을 조사하기라도 한 걸까?
어찌 되었건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겠지.
확실한 건 저쪽에서 나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떠보고 싶겠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순순히 휘둘려줄 만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런 속셈은 나 또한 있었다.
그가 접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큰 산을 넘은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그에게 휘둘려줄 수는 없다.
그가 접근했으니, 나도 다시 머릿속을 정돈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설핏 안타까운 척,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쉽게도, 공작 부인께서 부르셔서요. 죄송합니다.”
나는 빈터발트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소피아의 핑계를 댔다.
물론, 소피아가 불렀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프란츠의 낯에 당황이 스쳤다.
내 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조사한 뒤, 아무런 일정도 없는 시간이라 확신하고 나타난 것일 텐데…….
갑작스레 등장한 소피아와의 선약에 그는 물 먹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 얼굴을 정돈했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공작 부인께서 부인을 많이 아끼시는 모양입니다. 저녁 식사도 함께하시는 걸 보아하니.”
“제가 빈터발트에 연고가 없다 보니 공작 부인께서 신경 써주시는 것일 뿐이에요.”
“그게 아낀다는 증거지요. 제가 아는 공작 부인은 타인과 저녁 식사의 여유를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마냥 긍정하기엔 묘하게 소피아의 사교성을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미처 숨기지 못한 적의가 송곳 끝처럼 주머니를 툭 뚫고 나왔다.
하지만 부러 그 점을 지적해서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다.
나는 적당히 멍청한 듯,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이야기를 흘려 넘겼다.
“원래는 항상 티타임을 함께하곤 하는데……. 내일은 일정이 있으시다 하셔서요. 오늘 저녁 식사로 대신하는 거지요, 뭐.”
나는 내일 티타임이 비어 있다는 떡밥을 슬쩍 흘렸다.
실제로는 아니지만, 지금 소피아를 만나러 가는 김에 미리 일러두면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프란츠는 바로 그걸 물었다.
“그러면 내일 오후 티타임에 시간 되십니까? 부인과는 한 번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리 제안 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러면 제가 경을 초대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일견 화기애애해 보이는 만남이었다.
그 가면을 벗겨내면 도사리고 있을 속셈들은 전혀 화기애애하지 않을 테지만.
* * *
다음 날, 약속한 시각이 되었다.
프란츠는 꽃다발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빈손으로 찾아오기 그래서, 선물로 준비했습니다만……. 부인의 미모에 꽃들도 빛이 바래네요.”
와……. 혀에 기름칠하셨어요?
맨날 뤼디거의 노골적이고 직선적인 플러팅만 듣다, 이런 식으로 유들유들한 플러팅을 들으니 또 새롭네.
준비된 멘트인지, 아니면 지금 막 떠올린 건지는 몰라도 그냥 저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빈터발트에 오고 나서 꽃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나는 최대한 여유로운 척하며 꽃을 받았다. 그에게서 꽃을 건네받는 도중, 그의 손가락이 내 손등을 작게 스쳤다.
이 새끼 봐라……?
불편해진 내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날 뻔했다.
나는 서둘러 표정을 정돈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사하게 웃었다.
나는 꽃을 로라에게 넘기곤, 프란츠와 나란히 테이블에 앉았다. 하녀들이 오가며 찻잔과 티 푸드를 준비했다.
먼저 운을 뗀 건 프란츠였다.
“빈터발트에 오셔서 적응하느라 힘드셨겠습니다. 빈터발트 사람들이 다들 살가운 편은 아니니까요.”
사근사근한 낯과 달리 슬쩍 빈터발트에 대한 흠을 잡았다.
별로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더라면 그냥 스쳐 지나갈 정도로 미묘한 정도였다.
그렇게 느껴지는 데에는 그의 말투도 한몫했다.
목소리 덕분인지, 그는 비꼬는 말도 굉장히 부드럽게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직 내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지 못해서 노골적인 비꼼은 피하는 모양인데…….
어지간해서 우리 밑바닥까지 보여주진 말고 헤어지자.
나는 그런 속내를 감춘 채 싱긋 웃으며 모르는 척 그의 말을 받았다.
“글쎄요. 다들 잘 대해주셔서요.”
“그러게요. 사실 깜짝 놀랐습니다. 공작 부인도 그렇지만……. 뤼디거 그 녀석이 그렇게 누군가를 챙기는 건 처음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