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5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5화
* * *
다행히 내 걱정이 기우였는지, 사내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무사히 약재상에 들른 나는 캐 온 약초를 정산해서 루카의 약을 할인받을 수 있었다.
“뭐? 루카 약이라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약재사의 표정이 기묘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도 이제는 익숙했다. 나는 뻔뻔스레 턱 끝을 치켜들며 말했다.
“루카가 아파서 보양시킬 겸 소시지 사다 줄 거니까, 약초 값 좀 더 쳐줘요. 요즘 오월제 준비한답시고 다들 숲에 안 가서 약초 모자란 거 알아요.”
“별……. 알았다, 알았어.”
약재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약재사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조금 더 굴러 들어온 동전을 세며 시시덕거렸다.
그 돈으로 푸줏간에 들러서 소시지를 샀다.
집에 당근도, 순무도, 부케가르니도 있으니, 이걸로 포토푀나 끓여야지.
나는 품 안 가득한 약과 고기에 뿌듯함을 느끼며, 희희낙락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마을 한구석에 몰려 있던 내 또래 여자들이 나를 발견하곤 말을 걸었다.
“어라, 유디트?”
“너 왜 여기 있어?”
“뭐가?”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여자 무리 중 제일 기세등등한 한 명이 날 새치름하니 질투 어린 눈길로 쏘아보았다.
그게 바로 토마스가 말한 레아였다.
한참 귀족 나으리한테 눈독 들이고 있다는 애가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
내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레아는 자존심 상한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고는 황급히 제 속내를 감추듯,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까 젊은 귀족 남자가 있어서 꼬시려고 했더니, 너희 집만 물어보고 쌩하니 가더라고. 그래서 난 네가 꼬셔서 집으로 불러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뭐? 귀족 남자?”
“응. 장교복을 입은 체격 좋은 남자. 좀 무뚝뚝하니 무섭게 생기긴 했지만……. 몰라?”
군복을 입은 남자가 우리 집을 찾아올 만한 일이 없는데…….
“잠깐.”
그때, 무언가가 퍼뜩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안색이 해쓱해졌다.
설마 뤼디거가 찾아오는 게 이번 오월제였던 건가?
하지만 분명, 작중에서는 루카가 열 살 때 빈터발트에 간다고 나와 있었는데…….
그제야 깨달았다.
‘아, 미친 유디트 마이바움! 어떻게 제 조카 나이도 제대로 모를 수가 있어!?’
일 년이 남았을 거란 내 추측은 전적으로 유디트의 왜곡된 기억 탓이었다. 유디트는 정말로 루카가 아홉 살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루카의 체구도 작아서 나도 영락없이 아홉 살인 줄 알았지…….’
하긴,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하는데 체구가 큰 쪽이 이상했다.
‘어쩐지. 오월제 딱 맞춰 루카가 아픈 게 이상하다 했어. 올해도 아프고, 내년도 아프고…….’
예상치 못한 일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하지? 아직 루카한테 해주고 싶은 것도 많이 남았고, 마음의 준비도 제대로 안 됐는데…….
심란한 내 맘을 추호도 모르는 레아는, 그저 내가 그를 어떻게 꾀었는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은근히 캐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꼬신 거야? 솔직히 얼굴만으론 꼬시기 어려운 사람 같던데. 되게 까다로워 보였다고.”
하지만 나는 레아에게 장단 맞춰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 뤼디거 빈터발트가 우리 집 앞에 서 있을 걸 생각하니 피가 바짝 말랐다.
“어……. 미안, 레아.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 일단 가볼게.”
“뭐? 야, 유, 유디트!”
황급히 레아와의 대화를 얼버무린 나는 짐을 품에 끌어안고, 바로 집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 내 뒤로 레아의 외침이 쩌렁쩌렁 따라붙었다.
“야, 친구보다 남자가 더 급해? 너 진짜 너무한다, 유디트!”
* * *
레아가 소리치거나 말거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허겁지겁 달렸다.
가는 길은 또 왜 그리도 먼지,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달리면서 나는 이 모든 게 레아의 착각이기를 바랐다.
사내가 찾는 것이 내가 아닌 다른 상대였다든가…….
그런 기대가 부질없게도,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뤼디거로 추정되는 커다란 체구의 사내가 우리 집 앞에 오뚝이 서 있었다.
그래도 루카가 아픈 몸을 이끌고 내려와 문을 열어주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헐떡이는 숨을 애써 고르며 뛰던 발을 천천히 옮겼다.
현관문을 몇 번 두들긴 그는 집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작은 한숨과 함께 뒤돌아섰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아니, 작가 선생님. 이 남자 이렇게까지 잘생겼단 말은 없었잖아요……!
군모 아래 능숙하게 쓸어 넘긴 검은 머리카락은 마치 물 먹은 물총새의 깃처럼 푸른 기가 돌았다.
그의 머리카락만큼이나 일자로 뻗은 눈썹과 속눈썹도 짙고 뚜렷했다.
그 밑으로 나를 또렷이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는 마치 비 온 날의 하늘처럼 몽환적인 매력이 있었다.
날카로운 콧대에서 이어지는 굳게 다물린 입술과 단단한 턱은 고지식하고 고집이 세 보였지만, 매력적이라는 것을 부인하긴 힘들었다.
그뿐이랴.
깃을 세운 칼라가 품위 있어 보일 정도로 곧은 목과 군복을 절도 있게 소화해 내는 딱 벌어진 어깨.
쭉 뻗은 팔다리는 근육으로 촘촘히 짜여져 마치 종마와도 같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도 모르게 발이 멈춘 채였다.
정신 차리자, 정신.
보는 눈만 없었어도 내 뺨을 내리치고 싶을 정도로 갑자기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루카의 천사 같은 외모도 처음 봤을 때는 감탄뿐이었는데…….
아무래도 이성으로 느낄 만한 나잇대의 상대다 보니, 잘생긴 외모가 더더욱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심장이 어느새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긴, 밭에 굴러다니는 감자처럼 생긴 마을 남자들만 보다가 사과처럼 예쁘게 생긴 남자를 봤으니 가슴이 뛰는 것도 당연했다.
어떻게 레아는 이런 남자를 ‘무뚝뚝하니 무섭다’ 정도로 표현한 거지?
너무 키가 커서 얼굴을 제대로 못 봤나?
그럴 수도 있다.
레아는 나보다도 한 뼘이 더 작으니까.
도무지 레아를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는 사이, 뤼디거로 추정되는 사내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멀찍이 있을 때도 크다고 생각했는데,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자, 잠깐. 역시 너무 크니까 당황스러운데.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유디트도 그리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내 시선이 딱 닿는 곳이 그의 가슴팍이었다.
나는 당황했을 뿐인데, 사내는 내가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나에게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걸음을 멈췄다.
사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강렬할 정도로 응시하는 시선에서는 항상 강자로 살아온 이 특유의 여유가 흘렀다.
‘부, 부담스러워…….’
내가 바짝바짝 마르는 입을 그저 달싹이고만 있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군요.”
어떻게 사람이 잘생기고 키도 큰데 목소리까지 좋아?
신의 불공평한 애정을 그대로 빚어낸 듯한 상대의 존재에 감탄하느라, 나는 한 박자 늦게 그의 말을 이해했다.
“……네?”
다시 만나다니. 이런 남자를 한 번 봤으면 잊을 리 없는데.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뤼디거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길에서.”
“아, 아아…….”
그제야 나는 그를 어디서 마주쳤는지 깨달았다.
마을 광장에서 나와 부딪혔던, 목소리가 좋았던 그 사내였다.
나직이 울리는, 솜털이 바짝 설 것 같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그래. 이런 목소리를 지닌 사람이 두 명일 리는 없지.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어떻게 엮여도 이렇게 엮이냐.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딱 그 짝이었다.
뤼디거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는 부축의 의도였지만, 이번엔 악수를 위해서였다.
“저는 럼가트 왕국군 중앙사령부 육군 대령이자 작센 자작, 뤼디거 빈터발트라고 합니다. 집주인 되십니까?”
“네. 빈터발트 공작가의 귀하신 분이 저희 집은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사정을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천연덕스레 물으며 그의 장갑 낀 커다란 손을 마주 잡았다.
“요나스 빈터발트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요나스요?”
알다마다. 하지만 그게 ‘유디트’가 알고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과장된 반 응을 보였다.
“요나스가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집을 잘못 찾아오신 게 아닐는지.”
“아닙니다. 여기가 마이바움 가가 맞다면, 제대로 찾아온 게 맞습니다.”
뤼디거는 단호했다.
자신의 결정에 조금의 틈도 없으리라 확신하는 태도가 마치 판결을 고하는 판사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대꾸했다.
“뭐……. 마이바움 가를 찾아온 게 맞다 하시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서서 이야기하기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