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52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52화
나는 차마 고개를 들어 뤼디거의 낯을 확인할 수 없었다.
왜 죄를 지은 기분이 드는 거지…….
아니, 내가 뤼디거를 짝사랑하면 짝사랑하는 거지, 서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뭐가 어때서!
하지만 뤼디거가 몇 번이고 프란츠와 어울리지 말라 거듭 강조했던 일이 있으니, 마냥 뻔뻔스레 잘못 없다 주장하기도 좀 그랬다.
게다가 암살자를 보낸 게 프란츠의 가문이라 확신하고 있는 상황 아니던가.
그런 상황에서 프란츠와 한가롭게 티타임에, 청혼까지 받았으니 생각이 없다 여겨져도 할 말이 없었다.
머리통의 크기가 부족하니 마니 했던 건 프란츠가 아니라 날 저격한 말이 아니었을까?
나는 뤼디거의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말을 붙였다.
“저한테…… 실망하셨죠.”
“네?”
“프란츠와 만나지 말라 하셨는데 제가 티타임에 초대해서요……?”
“그걸로 왜 제가 유디트 씨에게 실망합니까?”
뤼디거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레 상처였다.
마치 그 정도로 실망할 만큼의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 같잖아.
괜스레 시무룩해진 내 고개가 잘 익은 벼처럼 밑으로 점점 가라앉았다.
“당연히 유디트 씨를 만나러 온 프란츠 놈의 잘못 아닙니까. 유디트 씨가 제가 실망했을 거라 우려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어지는 뤼디거의 목소리에는 당혹이 그득했다.
그것은 퍽 진실 같아, 혹여나 그가 실망했을까 싶었던 걱정이 단숨에 날아갔다.
그나저나 참 화법 이상하단 말이야…….
논점 자체를 바라보는 방식이 틀린 느낌이었다.
보통 실망을 했냐 안 했냐 물으면 실망 안 했다 하지, 왜 실망하냐 대꾸하진 않지…….
‘내 입장에서는 그만큼 오해하기도 좋고, 착각하기도 좋단 말이지…….’
가끔은 이런 뤼디거의 전적인 호의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지금이야 저 호의가 나를 향해 펼쳐져 있지만, 언제 손바닥 뒤집듯 뒤바뀔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프란츠한테도 예전엔 무난히 대한 것 같았지……. 역시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면 안 돼.’
혹여 내가 뤼디거의 아량을 믿고 건방지게 굴었다가 그가 정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휴. 프란츠에게 했던 모습을 보니 찬바람이 날려도 단단히 날릴 게 분명했다.
그의 그런 날 선 시선의 목표물이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거듭 주제를 알자 조용히 곱씹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뤼디거가 돌연 물었다.
“그래서, 거절하셨습니까?”
“뭘요?”
“교제 제안 말입니다.”
그의 안색에 초조함이 언뜻 스쳤다.
초조함이라니!
뤼디거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초조한 게 아니라 화를 참는 게 아닐까.
그래. 역시 말로는 실망 안 한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멍청한 짓 했을까 신경 쓰이는 거지…….
나는 그런 뤼디거의 우려를 덜어주기 위해 황급히 대답했다.
“당연하죠! 뤼디거 씨가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거절한 뒤였어요. 처, 청혼도. 단호하게 거절했으니까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뤼디거는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나는 모든 취조를 성공적으로 통과했다는 안도감에 해실,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모든 게 끝났다 생각했는데 돌연 튀어나온 접속사에 내 몸이 뻣뻣이 굳었다.
이건 뭐 압박 면접도 아니고…….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뤼디거가 무슨 말을 할지를 기다렸다.
“상대가 프란츠라 거절한 겁니까? 그게 아니면 결혼 생각이 아직 없으시기 때문입니까?”
“……저 지금 루카 엄마로 와 있거든요?”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지요.”
아니, 문제가 된다니까?
어처구니가 없었던 내 목소리가 커졌다.
주제를 알고 건방지게 굴지 말자 다짐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원래는 미혼이니 상관없다지만 지금은 루카 엄마가 아닌가.
게다가 얼마 전에 죽은 요나스의 아내 비슷한 위치로 성에 머무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 상황에서 결혼은 무슨 놈의 결혼이란 말인가?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도 재혼할 생각이면 중매해 주겠다 운운하더니…….
프란츠도 전혀 개의치 않고 청혼하더니…….
이 세계라 이런 건지, 아니면 귀족이라 이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빈터발트라 이런 건지.
후자일 거란 생각이 단단히 드는 건 내 편견일까?
“그럼……. 결혼 생각은 있으십니까?”
“왜요. 처음 말씀하셨던 대로 중매 서주시게요?”
난 툴툴거리며 뾰족이 대꾸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받는 중매라니, 생각만 해도 정말 기분 별로다.
나로서는 한껏 비꼰 대답이었다.
하지만 뤼디거는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가 태연히 물었다.
“중매를 원하십니까?”
“아니, 당신이 처음 엠덴에 왔을 때 그렇게 말했잖아요……. 아, 됐어요, 됐어. 결혼 생각 없어요. 결혼은 뭔 놈의 결혼이에요.”
나는 한숨과 함께 읊조렸다.
뤼디거에게는 공감을 요구하는 화법보다 노골적으로 말하는 쪽이 훨씬 대화가 잘 통했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 생각 없다는 확답이 떨어지니 뤼디거는 이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시무룩해 보였다.
‘그’ 뤼디거가?
말도 안 돼. 내 착각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면 뭐야, 나한테 소개해 주고 싶은 남자가 있었다든가 그랬던 거야?
뤼디거가 일부러 소개해 주고 싶을 정도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엔 기분이 나빴는데, 곰곰이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제안 같았다.
어차피 뤼디거는 그림 속의 떡이니까.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됐다, 됐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 마시기는.
뻗어 나가는 내 망상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뤼디거를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 만나는 것도 못 할 짓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뤼디거가 비혼주의인 것도 이해가 갔다.
애초에 타인에게 별로 정을 못 느끼는 성격인데, 또 책임감은 강하다.
결혼 상대에게 책임을 다하려 할 테지만, 그는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충족시켜 주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결혼이 가문 간의 결합이요, 정치적, 사업적 이득이 결부된 일이라고는 하나 본질은 상대에 대한 사랑 아니던가.
그냥 상대를 사랑하는 척 속여도 되는 일이지만, 또 그런 건 비겁한 짓이라 생각할 게 뻔했다.
게다가 뤼디거는 상대가 자신을 좋다 해도 본인이 상대를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류였다.
그러니 차라리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게 그로선 속 편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공작이 되는 걸 포기하고 조카를 차기 공작으로 미는 건 남다른 일이긴 하지……. 보통 그쯤이면 눈 감고 결혼한다고.’
하여간 빈터발트는 유별난 데가 있다. 고집 세고, 타인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루카도 나중에 크면 이리 되려나.
뤼디거처럼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루카를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실소가 절로 터져 나왔다.
* * *
루카의 미래를 떠올리며 웃었던 것도 잠시였다.
나는 내 방 한가운데 오도카니 서서 푸른 눈으로 나를 빤히 노려보는 루카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그놈이랑 티타임을 보냈다? 거기다 청혼까지 받았다고?”
“아, 아니, 루카. 진정하고.”
“내가 그렇게 그놈은 피하라고 말했는데!”
루카가 길길이 날뛰었다. 아까의 침묵은 폭풍 전야의 고요였던 모양이다
루카에게는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들켜버린 걸까……. 되는 일이 없음에 나는 혀를 찼다.
일단 루카를 진정시키자.
나는 루카를 설득하기 위해 온갖 변명을 필사적으로 끌어모았다.
“그……. 우연히 만나서 어쩔 수가 없었어. 어른들 사이에선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만 있진 않으니까…….”
“날 어린애로 알아? 그런 변명이 통할 줄 알아?”
너 어린애 맞거든?
당황한 내 말문이 막힌 틈을 타 루카가 우다다 공격했다.
“내가 이모 허술한 구석이 있어서 어리바리하다가 끌려갈 거라고 했지! 애초에 말을 받지도 말라고도! 무시하라고 했잖아!”
“그, 그래도 네 당숙인데 어떻게 무시를 하니…….”
“당숙인 것 따위 알 게 뭐야, 그 후레자식!”
“루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 온 거야!”
뒷골목 시정잡배들이나 쓸 법한 욕설에 나는 기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