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55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55화
나는 뤼디거를 좋아했고, 가끔 툭툭 튀어나오는 그의 엉뚱한 귀족적 면모 또한 매력으로 받아들였지만, 루카가 그럴 거라 생각하니 등줄기가 오싹했다.
‘지금도 약간 그럴 기미가 보이는데……. 안 돼, 절대 안 돼.’
나는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그런 마음이 나도 모르게 드러났는지, 던지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퍽, 글러브에 제법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뤼디거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제 글러브 안에 놓인 공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정말 잘 던지시는군요.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게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네?”
“암살자 때 말입니다. 후추통으로…….”
“아! 아아! 그, 그때 말이죠! 하, 하하. 별것 아니었어요!”
그걸 루카 앞에서 말하면 어떻게 해!
나 때문에 암살자가 죽은 건, 아니, 죽었을지도 모르는 건 루카에게 비밀이었잖아……!
딱히 루카에게 지켜야 하는 이미지가 남아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암살자를 죽인 이모라니, 역시 애 교육상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소란을 떨었다.
어떻게든 뤼디거의 암살자 발언을 묻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다.
그에게 연신 눈을 찡긋거리며 입 다물라는 신호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암살자? 후추통? 무슨 소리야?”
하지만 내 노력은 부질없이 흩어졌다.
또랑또랑 되묻는 루카의 눈빛에 벌써 의심의 기색이 스며 있었다.
이, 이럴 땐 그냥 말을 돌리는 게 최우선이다.
나는 황급히 뤼디거에게 다가가 글러브와 공을 빼앗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 하하! 이쯤 운동했으면 된 것 같네요. 우리 이제 돌아가죠!”
그러고는 뤼디거의 등을 떠밀며 성큼성큼 걸었다.
루카가 뭔가 의심스레 묻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듣지 못한 척 모르쇠 댔다.
* * *
드디어 수도로 가는 일정이 잡혔다.
왕가에 루카의 존재를 알리는 서신을 보냈는데, 드디어 그에 대한 답신이 돌아온 것이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막상 코앞에 닥치니 숨이 턱 막혔다.
‘으으. 미루고 미뤘던 과제가 데드라인에 걸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진 기분이란 말이지…….’
나는 참담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도에 가는 일행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수발을 들어줄 하인과 마부들을 비롯하면 수가 적진 않았지만, 빈터발트에서는 나와 루카, 뤼디거 셋뿐이었다.
원래는 소피아도 함께할 예정이었다. 내 샤프롱이 되어주기 위해서였다.
샤프롱은 젊은 여인이 사교장에 나갈 때 곁에서 보살펴 주는 나이 많은 여인을 일컬었다.
특히나 첫 사교계 데뷔에는 샤프롱이 함께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때마침 소피아가 앓아 누웠다.
사실, 소피아는 건강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다.
이렇게 허약한 몸으로 어떻게 왕궁의 시녀 일을 해냈는지가 궁금할 정도였다.
알음알음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어보건대, 예전에는 건강했던 것 같은데…….
하여튼 소피아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보니 공작이 소피아의 수도행을 강경히 막았다.
나 또한 괜히 따라 왔다 큰일이라도 치를까 걱정되었던지라, 혼자서도 할 수 있다며 그녀를 만류했다.
“걱정 마세요. 보통 스물일곱쯤 되면 남의 샤프롱이 되어주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예외 상황이니 다들 그러려니 할 거예요. 게다가 뤼디거 씨도 있잖아요. 그가 에스코트해 주니 크게 걱정 되지는 않아요.”
하지만 소피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친척 사내의 에스코트만으로는 부족하단다. 여자 샤프롱이 꼭 필요해.”
그녀의 단호한 말에 내 입이 다물렸다.
솔직히, 불안한 점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더군다나 넌 사교계가 처음 아니냐. 그럴수록 격식을 잘 갖춰야 나중에 이야기가 안 나와.”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그렇다고 소피아가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딱히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애꿎은 찻잔만 매만지며 우물쭈물했다.
그때, 소피아는 우아하게 차를 들이켜더니 고요히 말을 이었다.
“내 이럴 줄 알고 네 샤프롱을 부탁해 놨다.”
“네? 누구에게요?”
예상치 못한 소피아의 발언에 깜짝 놀란 내가 되물었다.
설마 방계 사람 중 하나는 아니겠지…….
나는 방계 모임 때 찾아왔던 나이가 지긋한 부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다들 인상이 별로였던 기억밖에 남지 않았다.
그중 누가 돼도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사사건건 트집 잡을 것 같고 말이야.
하지만 소피아는 전혀 생각지 못한, 예상 밖의 인물을 거론했다.
“네 샤프롱은 국왕 전하와 바네사 왕녀 저하의 여동생이신 말리나 왕녀 저하께서 해주시기로 했다.”
“왕녀 저하께서요?”
“그래. 왕녀 저하께서는 요나스의 이모가 되시니까. 이미 말은 다 끝났으니, 수도에 가서 인사만 드리면 될 거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왕녀가……. 샤프롱이 되어준다고요?
예상했던 것보다 커진 스케일에 멍하니 눈만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요나스의 실질적 부인도 아니고, 아직은 그저 평민일 뿐인데……. 왕녀님께서 샤프롱이 되어주시기엔 좀…….”
격이 맞지 않지 않은가, 하는 말이 입술 사이로 달싹이며 흩어졌다.
소피아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평민의 샤프롱이 아니라, 빈터발트 후계자의 모친의 샤프롱이지. 내가 왕녀 저하께 말씀 다 드려놓았으니, 넌 너무 괘념치 말아라.”
괘념치 말라고는 해도…….
소피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지만, 솔직히 왕녀가 왜 그 제안을 허락한 것인지 이해 가지 않을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소피아의 선에서 다 끝난 일이었다.
내가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도 바뀌는 일은 없다.
‘샤프롱이 없는 것도 말이 오갈 테지만, 샤프롱이 왕녀인 쪽이 더욱 말이 오갈 텐데…….’
어느 쪽이든 화제의 중심 예약이었다.
이번 수도행이 결코 조용히 지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이 눈에 훤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사벨라가 등장할 게 예약되어 있는데, 소란 없이 지나가는 걸 기대한 게 우스웠다.
어차피 예정된 소란인데, 뭐.
나는 한숨과 함께 상황을 받아들였다.
* * *
수도로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어찌나 꼼꼼히 준비하는지, 손님을 초대하는 방계 모임 당시보다도 더 번잡스러웠다.
마차로 줄줄이 이어지는 짐들에 벌써 질린 기분이다.
“도대체 얼마나 남은 거야?”
“거의 끝이에요. 루카 도련님이 빈터발트 후계자로서 처음 치르는 공식적 일정이라 다들 완벽하게 준비하려고 하다 보니…….”
로라가 슬쩍 일러주었다. 로라 또한 망토와 모자를 걸친 채였다.
내 수행 하녀로서 함께 수도에 가기 때문이었다.
로라도 수도행은 처음인지, 아직 앳된 양 뺨이 발그레 기대로 상기되어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간다지요? 저 기차는 처음이에요.”
“음……. 소일거리를 좀 챙기는 쪽이 좋을 거야.”
그건 경험에서 우러나온 나의 진심 어린 충고였다.
VVIP로서의 기차 여행은 정말로 안락했지만, 그 이상으로 지루했다.
이번 기차 여행 또한 낱말 맞추기를 부여잡고 보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시간을 보낼 만한 잡동사니를 실컷 챙겼다.
따로 챙긴 자그마한 가방을 믿음직스레 바라보았다.
준비가 끝나고, 소피아를 비롯해 가문의 하인들이 전부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그새 정이라도 든 건지, 성을 떠나는 내 마음 한켠이 아련했다.
“정말 집 떠나는 기분이네…….”
거의 반년 남짓 살았으니…….
내가 유디트에게 빙의하고 한 달 남짓 살았던 엠덴보다 빈터발트 성이 더 애틋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차가 길게 늘어선 가로수 사이의 도로를 지났다.
짧은 빈터발트의 여름은 그새 지나가 있었다.
빈터발트 역에 도착했고, 우리는 기차로 갈아탔다.
예전에 탔던 기차와 다른 기차인지, 아니면 총격전으로 인한 내부 인테리어를 바꾼 건지, 우리가 안내된 기차의 일등석 칸은 이전과 조금 구조가 달라져 있었다.
객실은 지난번과 같이 차량 한 칸이 통째로 방이었다.
예전에는 비어 있던 하녀 방에 로라가 들어선 게 예외라면 예외였다.
로라는 다른 하인들과 함께 기차의 내부에 대해 파악하러 잠시 자리를 비웠고, 나는 소파에 앉아 숨을 돌렸다.
“어휴……. 매번 이렇게 오가는 것도 일이다, 일이야. 루카, 배고프진 않아?”
“괜찮아.”
루카는 변함이 없었다. 멀끔한 얼굴은 심드렁하기까지 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몰히 하는지, 새 기차에 대한 흥미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 첫 기차 여행 때부터 그랬지만……. 쟤는 너무 무던하다니까.’
뤼디거가 외투를 벗어 벽부형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그래도 일정에 맞출 수 있어 다행입니다. 왕실에서 조금만 더 늦게 서신이 왔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