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5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56화
“왜요?”
“빈터발트의 겨울은 일찍 찾아오고 그만큼 어마어마하니까요. 잘못하다가는 발이 묶여 내년으로 미뤄질 수도 있었습니다.”
“아하…….”
하긴, 다른 곳은 다 여름일 때도 빈터발트는 서늘했다.
여름이라는 말이 없었더라면 여름인 줄도 몰랐을 정도였다.
‘아아, 차라리 내년으로 미뤄졌으면 좋았을 텐데.’
마감 일이 다음 날인 줄 알고 밤새워 간당간당 리포트를 제출하고 나서야 마감 일을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던 대학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정작 연회의 주인공인 루카는 태연한데 내가 더 긴장하는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마른 입을 축이며 루카를 흘끔 보았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루카를 귀족들에게 소개하는 것인데, 본인은 별달리 자각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이번 수도행을 꺼리는 내 심정을 빤히 읽었는지, 뤼디거가 대뜸 말했다.
“그래도 겨울이 되어가는 시기라 다행입니다. 적어도 선왕 전하와 마주칠 일이 드물 테니까요.”
“선왕 전하요?”
“예, 현 국왕 전하의 아버님이자 선대 국왕 전하 말입니다. 요나스의 어머니인 바네사 왕녀의 부친이시니, 루카에겐 증조할아버지가 되겠군요.”
“그……. 정정하신가 봐요.”
이 시대의 평균 수명이 70세 정도인 걸 생각했을 때, 루카의 증조부 되시는 분이 살아계신 건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왕실의 큰 어른이시죠. 아직도 전하께서는 선왕 전하의 눈치를 봅니다.”
말투만 듣고 보면 아직도 내정에 간섭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양위했으면 유유자적하게 노후를 즐기실 것이지…….
뤼디거는 끝이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까다롭고 괴팍하신 분입니다. 눈에 들기가 쉽지 않고, 트집 잡기가 일쑤에, 맘에 드는 이는 또 그리도 아끼는 기분파시죠.”
“아…….”
뤼디거가 괴팍하다고 말할 정도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성격 파탄자인 걸까.
그제야 나는 선왕과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말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최대한 안 얽히는 게 좋은 사람이다 이거지…….’
“한때는 집무실이나 회의실에 화병 같은 물건들을 전부 치웠을 때도 있었습니다.”
“설마.”
“네. 집어 던지시거든요.”
뤼디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그쯤 되면 분노조절장애가 아닐까?
“그래도 나이를 이기실 순 없으신지 겨울에는 따듯한 남부에 있는 별장으로 내려가십니다. 시기가 애매하다 보니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금방 남부로 떠나실 겁니다. 게다가 애초에 두문불출하시는 분이라서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아, 아니, 걱정하지 말라 해도 걱정이 되는데…….
선왕과 안 마주치는 게 제일 좋은 결과일 테지만, 혹시라도 마주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치솟았다.
적어도 선왕이 어떤 사람을 싫어하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들어라도 놓는 쪽이 좋지 않을까.
나는 걱정스레 물었다.
“선왕께서 주로 어떤 분을 아끼셨는데요? 아니면……. 뭐, 이건 하면 안 된다 같은, 행동에 주의사항이라던가…….”
“선왕께서 아끼신 것으로 유명하신 분은 바로 바네사 왕녀님이죠.”
“요나스의 어머니요?”
“네. 일찍 세상을 뜬 누이를 닮았다며 그리도 싸고도셨다 합니다.”
아앗, 바네사 왕녀를 아꼈으면 그래도 루카는 안정권이 아닐까?
요나스는 바네사 왕녀를 쏙 빼닮았고, 루카는 요나스의 판박이니까.
나는 반색했다.
“그러면 루카는 귀여워해주시겠네요. 바네사 왕녀님의 손자잖아요.”
“음……. 요나스는 또 싫어하셨습니다.”
“아…….”
요나스는 또 싫어했어? 남자라 그런가? 영 종잡을 수가 없네…….
나는 나직이 혀를 찼다.
“그리고 바네사 왕녀와 달리 말리나 왕녀에게는 냉담하셨죠. 국왕 전하께도 별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선왕께서 좋아하시는 건 무척 드물고 싫어하시는 건 너무 많아, 유디트 씨의 질문에 답변드리기가 어렵군요.”
뤼디거의 어깨가 조금 아래로 쳐졌다. 왠지 시무룩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뤼디거의 잘못이 아니었다. 기분파에 분노조절장애인 선왕의 문제지.
나는 말을 돌렸다.
“말리나 왕녀님이라면, 제 샤프롱이 되어주실 그분 말이죠? 어떤 분이신가요?”
“글쎄요. 저와는 별로 친분이 없어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요나스는 무척 아끼셨습니다. 바네사 왕녀 저하와 사이가 좋으셨다 들었거든요. 그러니 유디트 씨와 루카에게도 잘 대해주실 겁니다.”
이런……. 나는 화제를 잘못 골랐다는 걸 깨달았다.
뤼디거의 뉘앙스를 보아하건대, 뤼디거와 요나스 사이에 극단적인 편애가 있는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뤼디거와는 혈연 관계가 없긴 하지…….’
자기 언니가 죽고 나서 바로 재혼한 공작과 자기 언니의 자리를 빼앗은 소피아.
물론 소피아와의 재혼이 요나스를 위함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도 막시밀리안이 원체 소피아에게 잘했어야지…….
말리나가 바네사를 좋아했다면 더더욱 실망했을 터였다.
그러니 말리나로선 뤼디거에게 거리를 두는 것도 당연했다.
그나저나 점점 모든 이야기가 기승전바네사로 끝나는 느낌인데…….
소피아도, 선왕도, 말리나도.
모든 사람이 바네사 왕녀를 좋아하고 그리워하니, 그녀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정작 남편이었던 막시밀리안은 별로 그녀를 그리워 않는 것 같지만…….’
되레 바네사 왕녀의 죽음이 그의 계략이 아닌가 하는 음모론이 있을 정도니까.
선왕과 소피아가 가만히 있는 걸 보아하니 실제 사실은 아닌 모양이지만…….
정말로 막시밀리안 때문에 바네사가 죽은 거라면, 소피아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저질렀을 터였다.
그만큼 소피아는 바네사에게 충실했고 신실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만 놓고 보면 바네사의 위치를 빼앗은 거니까……. 말리나 왕녀로선 소피아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것 같은데, 용케도 소피아의 제안을 받아주셨네.’
소피아의 체면을 봐서라도 최대한 흠잡힐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 나는 작게 다짐했다.
* * *
기차 여행은 지난번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한마디로 지루하다, 이 말이었다.
뤼디거는 우아하게 신문을 펼쳤고, 루카는 무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일단 영지로 돌아와서……. 아니,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소린지 궁금했던 내가 귀를 쫑긋거렸지만, 웅얼대 듯 입안에서 굴리는 소리는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루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루카, 바빠?”
“어? 왜?”
“안 바쁘면 놀아달라고.”
“뭔가 바뀐 거 같지 않아?”
루카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내 열 살짜리 조카는 놀아달란 말을 절대 안 하니까 내가 하는 수밖에.”
“……그래서, 뭐 하고 놀아주면 돼?”
그렇게 어린애와 어른이 뒤바뀐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잡동사니가 있는 가방을 뒤적였다.
뜨개질 거리와 공깃돌, 간단하게 읽을 예법 책과 시집들 사이로 나는 트럼프 카드를 불쑥 꺼내 들었다.
“짜잔.”
“따로 가져온 거야? 진짜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네.”
루카가 질린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트럼프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도 루카의 장난감 상자 속에 고이 잠들어 있던 것이었다. 한 번도 건든 적 없는 듯, 케이스가 뻑뻑했다.
빈터발트 가에서 준비한 것답게 트럼프도 고급이었다. 무늬도 섬세하고, 손끝에 닿는 느낌도 매끄러웠다.
트럼프를 눈앞에 둔 나는 잠깐 고민했다.
역시 어린애니까 포커는 좀 그러려나……. 원카드 정도는 괜찮겠지? 아니면 도둑 잡기라든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트럼프로 할 수 있는 게임을 전부 떠올려 봤다.
그때 루카의 손이 대뜸 트럼프를 잡았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기며, 고사리처럼 작은 손으로 트럼프를 섞었다.
나는 촤라라락, 카드가 섞이는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루카는 능숙한 손길로 카드를 이리저리 옮기며 무심히 물었다.
“뭐 할 거야? 포커?”
저기요, 김루카씨?
어, 언제부터 카드를 그렇게 잘 다루셨나요?
아무리 봐도 엠덴의 뒷골목 패거리들한테 배운 게 분명했다. 맨날 술만 마시고 도박만 하는 치들.
지난번엔 후레자식이라는 말을 쓰더니, 이번엔…….
어휴. 역시 엠덴에서 루카를 떠나보내길 잘했다.
엠덴의 교육 환경에 대한 나의 불신이 한층 깊어졌다.
그때 루카가 잘 섞고 있던 트럼프 카드 사이에서 카드 한 장이 튀어나왔다.
루카는 저답지 않은 실수를 했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카드를 확인했다.
하지만 카드 문양을 확인하곤 픽 미소 지었다. 루카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이모네.”
“응?”
“하트 퀸. 유디트. 이모랑 이름이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