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57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57화
카드에 이름이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이름이 있어?”
“그림카드에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다 어깨너머로 알음알음 들어서 배운 거지, 뭐.”
루카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루카에게선 왠지 전문 꾼의 냄새가 났다.
이거, 루카한테 완전 발리는 거 아냐……?
나는 조금 불안스레 눈을 굴렸다.
그때, 읽고 있던 신문을 접고 이쪽에 관심을 보이는 듯한 뤼디거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 둘만으로는 조금 재미가 없지. 나는 바로 뤼디거를 꼬셨다.
“뤼디거 씨도 하실래요?”
“군에 있을 때 몇 번 내기 삼아 해보긴 했습니다만……. 그리 잘하진 못합니다.”
뤼디거는 머쓱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을 의례적인 겸손이라 생각한 나는 괜찮다며 덧붙였다.
“저도 잘못해요. 십 년 전에 잠깐 해본 게 다라서…….”
수학여행이나 MT 때 해본 게 전부였던지라 포커 같은 경우는 룰을 기억하는 것도 가물가 물했다.
그래서 여행을 오기 전에 하녀들에게 룰을 다시 배워왔지만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점도 있고, 여전히 미숙한 점이 많았다.
아마 상황을 보아하건대 내가 완전 깔아주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게임을 이기려고 한다기보단 즐기려고 하는 편이었다.
일주일 동안의 기차 여행을 낱말 맞추기만 하면서 보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정해진 패배를 겸허히 수용했다.
그렇게 셋이 둥글게 모여 앉았고, 패가 돌아갔다.
만약 루카나 뤼디거가 같이 어울려주지 않았더라면 혼자서 솔리테어를 하거나 로라랑 짝 맞추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이 순간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처음은 가볍게 도둑 잡기로 시작했다.
그런데 루카가 진짜 잘했다. 카드 뒷면이 보이기라도 하는지 조커를 쏙쏙 피해 가는 게 아닌가. 연전연패였다.
뜻밖인 건 뤼디거였다. 뤼디거는…… 정말 못했다.
나도 게임의 승패에 연연하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게임을 할 때는 이길 생각을 하고 하지, 질 생각을 하고 하진 않았다.
하지만 뤼디거는 게임의 승패에 정말 초탈했다. 필사적임도 없고, 장고도 없었다.
무슨 패를 보기만 하면 바로 불쑥불쑥 내는데, 처음엔 그만큼 머리 회전이 빠른 줄 알았다.
근데 사실은 아무 생각 없는 것이었을 줄이야…….
내 두 개 남은 패에서 고민도 없이 홀랑 조커를 가져가는 걸 보며, 나는 뤼디거가 그냥 감으로 한다는 걸 확신했다.
그래……. 뤼디거가 겸손 따위를 부리는 인간은 아니었지. 잘하지 못한다는 말이 정말일 줄이야…….
계속해서 뤼디거의 패배가 이어졌다.
도둑 잡기가 생소한 걸까?
이건 아닌가 싶어 뤼디거가 익숙할 포커로 넘어갔다. 하지만 결과가 딱히 달라지지는 않았다.
‘아, 진짜 못한다…….’
나는 나직이 탄식했다.
루카가 이기고, 나는 중간, 뤼디거가 꼴찌인 구도가 계속해서 이어지니 게임이 영 재미가 없었다.
내기 삼아 해봤다며! 아니, 내기나 걸고 할 정도면 어느 정도 실력이 되어야 하는 거 아냐?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뤼디거로선 내기에서 이기든 지든 별 상관이 없었으리라는 것을.
군 장교들의 판돈 몇 푼을 따려고 아등바등하느니, 그냥 줘버리는 게 속 편했을 테지. 그리고 그런 뤼디거를 동료들도 반겼을 테고…….
‘뤼디거 동료들도 뤼디거가 얼마나 재미있게 게임을 하는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겠지…….’
뭔가 게임에 대한 기본적 마음가짐이 다른 듯한 기분이…….
나는 뤼디거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가 정말로 재밌어서 어울려주고 있는 건지 아닌지 구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루카가 돌연 말했다.
“역시 뭔가 걸고 하죠.”
“도박은 안 돼!”
나는 냉큼 제지했다. 얘가 엠덴에서 뭘 하고 다녔든, 이젠 내가 두 눈 뜨고 지켜보는 이상 그런 방종한 행동은 허락할 수 없었다.
루카는 픽 웃으며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도박이 아니라, 간단한 내기야. 그리고 내기는 신사의 소양이라고.”
“도박과 내기는 같은 말이 거든?”
“도박은 우연성에 기대서 사행심을 자극하는 경향이 크지. 신사의 내기는 좀 더 추론과 분석을 기반으로 한다고.”
“결국 그 내기 하는 종목이 카드게임이잖아.”
“이모는 지금 이 결과가 우연성에 기댈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
“…….”
스무 판 가까이해서 순위가 고정이다시피 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나를 구슬리듯 루카가 살살 속삭였다.
“이건 아저씨의 의욕을 촉진하기 위한 간단한 자극 정도라고.”
“뤼디거 씨가 그런 내기를 한다 해서 딱히 승리욕에 불탈 것 같진 않은데.”
자기 얘기가 나오자 뤼디거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좀 너무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긴 사람이 꼴찌 한 사람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물어보는 건 어때? 대답하기 싫으면 돈을 내는 거지.”
“돈은 뭔 놈의 돈이야! 그리고 나 돈 없어. 너도 없잖아.”
빈터발트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보니 내가 따로 가진 돈이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소피아가 여자는 따로 돈 나갈 구석이 필요하다며 다른 사람들 몰래 적지 않은 돈을 찔러주긴 했지만, 그 돈을 써야 하는 시점이 지금 이 순간은 아닐 것이다.
루카 또한 용돈을 따로 받는 것이 없으니 빈털터리일 텐데. 이런 제안을 선뜻 하는 걸 보아하니 질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뭐, 돈 없으면 그냥 대답하면 되잖아?”
말재간이 얼마나 좋은지 번번이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루카 말대로 한 번쯤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뤼디거의 의욕이 고취될 거라곤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루카가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 나한테? 아니면 뤼디거한테?’
루카가 도대체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지 궁금했던 나는 결국 루카의 제안을 허락하고 말았다.
“좋아. 대신 너무 짓궂은 질문은 안 돼.”
“짓궂은 질문이 뭔데?”
“……알면서 묻는다.”
나는 루카를 샐쭉 째려보았다. 루카는 애늙은이처럼 킬킬 웃으며 패를 섞었다.
그럼 내가 이기게 되면 나도 질문할 수 있는 거지? 좋아. 뤼디거한테 무슨 질문을 해볼까…….
물론 루카가 도박을 어디서 배웠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루카가 꼴찌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원래는 뤼디거의 의욕을 고취하기 위한 방향이었지만, 되레 내 의욕이 높게 치솟았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나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아저씨, 이상형은 뭐예요?”
“이상형?”
“좋아하는 여자 타입이요.”
“딱히 그런 식으로 정형화 해 본 적은 없다만…….”
“그게 뭐야. 이건 답 무효예요. 벌칙금.”
짤랑짤랑, 루카의 손으로 뤼디거의 동전이 흘러 들어갔다.
내심 가슴 졸인 채 뤼디거의 답을 기다리고 있던 내 심장도 같이 짤랑짤랑 내려갔다.
질문의 칼자루는 시종일관 루카의 손에 들려 있었다.
루카는 연신 질문으로 뤼디거를 두들겨 팼다.
“그럼 지금 아저씨,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거나 한 건 아니죠?”
“그걸…… 대답해야 하니?”
“당연하죠.”
“…….”
뤼디거는 대답하지 않은 채 루카의 손에 돈을 더 얹었다.
자, 잠깐, 그 반응 뭐야.
혹시……. 정말로 마음에 둔 여자가 있는 거야?
어린 시절 죽은 짝사랑하던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단 내 추측이 맞는 건가, 역시!
그것도 아니면 이미 결혼한 여자를 짝사랑한다든가…….
그런 까닭 때문이 아니면 뤼디거처럼 완벽한 남자가 비혼주의일 이유가 없었다.
아, 물론 완벽이라 칭하기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하여튼 나는 갑작스레 투하된 뤼디거의 폭탄 발언으로 당황해서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게임은 재개되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일까. 처음으로 판도가 뒤바뀌었다.
“이번엔 이모가 꼴찌네?”
승자인 루카가 빙긋 웃음 지었다.
생긴 건 천사 같은데, 지금의 미소는 악마의 미소가 따로 없었다.
“이모는…….”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나를 향한 화살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호, 혹시 뤼디거에게 했던 질문을 그대로 나한테 하면 어쩌지?’
이상형, 좋아하는 사람. 전부 뤼디거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걸 고스란히 대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 당사자인 뤼디거가 있지 않은가!
지금껏 심드렁하던 뤼디거의 청회색 눈동자가 유난히도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아니다. 묘하게 그의 상체가 내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는 분명 등받이에 기댄 채였는데!
역시 강 건너 불구경이 재미있는 건 뤼디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조, 좋아. 양심의 가책을 좀 느끼긴 하지만 거짓말하는 수밖에…….
긴장으로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나는 마음을 졸인 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루카의 질문을 기다렸다.
루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빈터발트 공작가를 잇지 않아도 상관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