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6화
* * *
사실, 뤼디거의 목소리를 오래 듣고 있으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치 귓가에 강아지풀이나 깃털을 흔드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여자들은 좋아 죽는데 남자들은 기분 나빠하는, 수컷 티 풀풀 나는 목소리 그 자체였다.
일단 뤼디거를 집에 들이기는 했지만, 딱히 머물라 안내할 곳이 없었다.
결국 나는 그를 식탁 의자에 앉혔다. 그는 응접실이 아니라 식탁으로 안내된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듯 눈을 치떴지만, 그 당혹스러움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집에 애가 있는데, 끙끙 앓고 있어요. 일단 약부터 먹여주고 와도 될까요?”
“네. 그러십시오.”
뤼디거는 흔쾌히 허락했다. 애초에 허락할 줄 알고 꺼낸 말이기도 했다.
나는 약재상에서 받아온 약과 꿀 한 스푼을 갖고 2층으로 올라갔다.
“루카.”
앓고 있던 루카가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내 쪽을 돌아보았다. 가늘게 뜬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안쓰러워라, 쯧쯧.
그래도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끙끙 앓는 것도 이제 끝이다.
곧 빈터발트로 갈 테니까.
나는 아쉬움을 애써 삼킨 채, 밝게 말했다.
“자, 약 먹자.”
쓴 약에 루카는 얼굴을 와락 찡그렸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먹었다.
“아이고, 우리 루카, 약도 잘 먹네.”
“……호들갑 떨긴내가 무슨 어린애야?”
응. 너 어린애 맞아.
나는 반박하는 대신 빙긋 웃으며 잔뜩 찡그린 루카의 입에 꿀 한 스푼을 물려주었다.
“오늘 포토피 해 먹자.”
“……돈이 어디서 나서.”
“그 정도 돈은 있다니까.”
유디트가 얼마나 닦달하면서 키웠으면 어린애가 말끝마다 돈, 돈 거리는지…….
나는 픽 웃으며 약그릇을 들고 일어섰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무섭게, 루카의 눈이 불안스레 흔들렸다.
“바빠?”
좀 더 옆에 있어주길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월제를 다녀와도 좋다던 어젯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어린애라면 자고로 응석을 좀 부리고 그래야지. 루카는 너무 속으로 삼키는 경향이 있었다.
마음만 같아선 계속 루카의 옆에 있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 아쉬웠다.
“바쁘진 않은데, 손님이 오셨어.”
“……남자?”
“응. 어떻게 알았어?”
“밖에서 소리가 나서.”
“많이 시끄러웠어?”
“아니. 이모 찾아온 거야?”
‘내가 아니라 널 찾아온 거야. 네 삼촌이거든.’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지만 나는 애써 삼켰다.
“아니. 날 찾아온 건 아닌 것 같고…….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봐야겠네. 좀만 더 쉬고 있어, 루카.”
나는 루카의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당겨 준 뒤, 가슴팍을 가볍게 도닥여 주곤 자리를 떴다.
혹여나 뤼디거와의 대화 소리가 새어 들어올까 싶어 문을 닫는데, 루카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마치 불쾌한 듯이…….
하지만 루카가 기분이 나쁠 이유가 아무리 짐작해도 없던지라, 나는 그 일을 흘려 넘겼다.
* * *
뤼디거는 내가 2층에 올라가기 전과 다를 바 없이 그대로 오도카니 의자에 차렷 자세를 한 채 앉아 있었다.
“차라도 한잔하실래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는 화로에 주전자를 올렸다. 금방 주전자가 김을 뿜었다.
차를 내린 나는 뤼디거의 앞에 찻잔을 내려두며 걱정스레 덧붙였다.
“그냥 길에 피는 꽃을 말려서 우린 차예요. 입엔 안 맞으실 테지만, 집에 이런 것밖에 없어서.”
“향이 좋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미간에 주름이 한 겹 는 것이, 좀 떫게 우려진 모양이었다.
유디트와의 공통점 또 한 가지.
둘 다 차 우리는 데에는 솜씨가 별로 없었다.
차를 내리는 사이, 나는 주의해야 할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을 정리했다.
첫째, 최대한 뤼디거에게 루카를 떠맡기는 느낌이 나지 않도록 하기.
둘째, 내가 알고 있는 ‘소설’의 정보를 내뱉지 않기.
어차피 뤼디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루카를 데려가려 할 테니까, 나는 이 정도만 주의하면 되겠지.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는 일이라 결심은 빨랐다.
나는 뤼디거의 맞은편에 앉으며 집 앞에서 하던 대화를 이었다.
“여기가 마이바움 가는 맞아요. 하지만 요나스란 이름은 처음 듣네요. 변방의 저희 집안이 빈터발트 가와 엮일 일도 없고요.”
“그럴 리가요. 5년 전, 요나스에게 서신을 쓰지 않으셨습니까. 요나스의 사생아가 있다고.”
아하. 라리사가 요나스에게 서신을 쓴 모양이었다. 아마 전염병으로 죽기 직전인가 본데…….
유디트의 기억에도, 내 기억에도 서신에 관한 건 없었다.
기실, 요나스가 사생아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5년 전의 서신에 대한 답이 지금 돌아오는 건, 상당히 늦지 않나요?”
“변명의 여지가 없군요.”
뤼디거는 침중하게 고개 숙여 사죄했다.
“저는 요나스의 이복동생입니다. 형은 가문에 아이의 존재를 숨겼죠. 형이 이번에 낙마로 죽고 유품을 정리하다 서신을 발견하고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이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 애를 나 몰라라 한 놈팡이다. 원작에서의 묘사 또한 불한당이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마음만 같아서야 잘 죽었다 싶지만, 그걸 동생인 뤼디거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요나스의 죽음에 가볍게 조의를 표한 나는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티를 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뤼디거 스스로도 이 상황이 버거운지, 썩 내 안색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조금 안심했다.
“서신에 마이바움이라는 성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 보니 찾아오는 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형님이 숨겼다니 어쩔 수 없죠, 뭐.”
나는 흔쾌히 대꾸했다.
사실, 나는 루카만큼이나 뤼디거를 좋아했다. 그러니까 뤼디거 빈터발트라는 캐릭터를.
소설의 주인공과 주인공에게 헌신적인 스승 겸 조력자라니. 좋아하지 않기가 더 힘들지 않나?
게다가 둘 다 잘생기고 예쁘기까지 하니, 호감도가 무럭무럭 자라 생식해서 증식하는 것도 당연했다.
내 호의 넘치는 대답 덕분에 용기를 얻은 건지, 이 잘생긴 조력자는 2층을 흘끔거리며 말을 흐렸다.
“보아하니 위층에 있는 아이가 제 형의 아이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맞는 것 같네요.”
“이름이.”
“루카. 루카라고 해요.”
뤼디거는 루카의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조카가 불쑥 나타났으니 감개무량하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뤼디거는 비혼주의자니까. 자기 자식을 낳을 일이 요원한 만큼 루카가 더더욱 각별할 터였다.
작중에서도 실제 뤼디거가 루카를 친아들처럼 챙기고 신경 쓴다는 묘사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저 외모로 비혼주의인 건 좀 인류에 대한 모욕 같단 말이지…….’
이 우월한 DNA를 확산시켜야 미래의 인류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텐데. 나는 안타까움에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다.
생물은 원래 좀 더 나은 존재로 진화하기 위해 프로그램되어 있는 거 아닌지에 대한 고찰로 심각해진 사이, 어떻게 착각한 건지 뤼디거가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지만 레이디께서는 루카와는 무슨 관계인지…….”
“이모, 이모예요.”
나는 황급히 대꾸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안도한 안색이었다.
그는 한결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루카의 어머니는?”
“5년 전에 전염병으로 그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뤼디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슬쩍 내리깐 그의 청회색 눈동자는 새벽안개처럼 일렁였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들기가 무섭게 단단한 회벽처럼 돌변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침중한 낯으로 가슴팍에 성호를 그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경건한지, 마치 뒤로 후광이라도 내리쬐는 것 같았다.
“요나스의 잘못은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무책임한 짓을 저질렀다니. 같은 빈터발트로서 얼굴이 홧홧하군요.”
“뭐. 대부분의 집안에 그런 사람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죠.”
그리고 마이바움에서는 유디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본인이지만 본인이 아닌 상황이니만큼, 나는 뻔뻔스레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대꾸했다.
뤼디거는 제 앞에 앉아 있는 유디트가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듯, 공감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요나스는 미혼이었습니다. 루카가 요나스의 유일한 자식이죠.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도 루카의 존재를 알고 만나는 것을 무척 고대하고 계십니다.”
뤼디거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제부터 무척이나 면목 없는 말을 꺼내려는 것 같았다.
대충 무슨 말일지 짐작이 갔던 만큼 내 심장이 크게 뛰었다.
뤼디거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이내 각오한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탁자 위에 놓인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가 말했다.
“지금껏 루카를 키워오신 당신께 실례가 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루카를 빈터발트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