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63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63화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부터 왕궁에 입궁할 준비를 했다.
왕실 연회가 열리기 전, 샤프롱인 말리나 왕녀와 만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첫 왕궁 출입이다 보니 뤼디거가 함께 가주기로 했다.
물론 나야 든든하지만…….
괜히 나 때문에 그가 왕궁까지 일부러 발걸음 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나는 작게 덧붙였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국왕 전하를 알현하는 길에 겸사겸사니까요. 마음만 같아서는 말리나 왕녀님과 만나실 때도 동행하고 싶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따라올 생각이었던 거야?
뤼디거의 뉘앙스를 보아하니 말리나 왕녀가 뤼디거의 동석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은데…….
확실히 둘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면……. 말리나 왕녀가 내 샤프롱으로 함께하는 동안은 뤼디거가 자연스레 거리를 두겠네.
어딘지 모르게 섭섭했다. 말로는 귀찮다 유난 떤다 하면서도 내심 그런 그의 챙김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섭섭함을 지운 채, 의연히 뤼디거를 말렸다.
“금방인걸요. 서로 끝나고 보면 되죠.”
하지만 뤼디거는 그걸로는 만족 못 하겠는지 혀를 찼다.
그 시선이 얼마나 못마땅한지……. 뤼디거가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본다더니, 그게 이런 눈빛이었구나 절로 느낄 수 있었다.
오죽 걱정되었으면. 그렇게 내가 못 미더운가?
도대체 내 무슨 점이 뤼디거를 걱정하게 만드는 걸까.
프란츠와의 티타임? 암살자 앞에 불쑥 튀어나간 거?
겨우 그런 일로 걱정을 하다니……. 그러면 이번 사교계에서 내가 저지를 일은 완전히 대형 사고네, 대형 사고야.
혹시 이번 일로 사고뭉치 딱지가 완전히 붙어버리는 건 아닐까.
그때의 뤼디거의 표정이 어떨까를 상상하다가 나도 모르게 작게 웃어버렸다.
소리 내 웃었는지, 뤼디거는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웃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람이 웃을 수도 있지, 뭘 그렇게까지 보시나.
조금 머쓱했던 나는 큼큼 헛기침하곤 로비 계단을 성큼 걸어 내려갔다.
로라를 통해 소문을 퍼트린 보람이 있는지, 뤼디거의 배려인지 과보호인지 모를 행동에도 튀는 시선이 없었다.
좋아. 나는 흡족히 미소 지었다.
그때, 계단 밑 로비 반대쪽에서 루카가 다가왔다. 배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루카가 기특했던 나는 반갑게 루카를 불렀다.
“루카.”
“말썽 피우지 말고 얌전히 다녀와, 알았지?”
하지만 돌아오는 건 잔소리 어린 핀잔뿐이었다.
너까지 그러기야?
뤼디거에 이어 루카까지. 남들이 들으면 내가 어지간히도 사고를 치나 싶을 것이다.
오죽하면 열 살 난 애한테도 저런 소리를 듣나 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 몇이 작게 웃었다.
날 비웃는다기보단, 내 보호자처럼 구는 루카가 귀여웠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루카가 첫인상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아 다행이네…….
처음에는 다들 루카가 제2의 요나스, 혹은 쁘띠 요나스가 될까 봐 잔뜩 긴장했었는데…….
이제는 루카가 건방지게 구는 건 전부 나를 유난히도 과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지, 다들 그런 루카를 귀여워했다.
그래……. 내 이미지 정도야 희생하지, 뭐.
뤼디거의 이미지를 희생해서 쌓아 올린 내 이미지를 희생해서 루카의 이미지를 쌓아 올렸다.
이 무슨 이미지 관리 피라미드인지, 원…….
솔직히 루카가 얌전하고 조곤조곤하게 군 건 아니었다. 그냥 딱 귀족 자제답게 굴었을 뿐이다.
하지만 원체 기대치가 나빴기 때문일까. 루카가 패악을 부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들 감격했다.
물론, 루카의 평판이 순식간에 좋아진 것에는 저 아기 천사 같은 외모도 꽤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럼 루카랑 쏙 빼닮은 요나스는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저 외모로도 커버가 안 쳐지는 거야?’
나는 작게 혀를 내둘렀다.
내가 답을 안 하고 있으니 루카는 푸른 눈을 건방지게 빛내며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정말 귀엽단 말이야.’
나는 발그레 혈색 좋은 루카의 뺨을 슬쩍 잡아당겼다. 루카의 미간에 주름이 팍 졌다.
예전이었다면 하지 말라며 손을 쳐냈을 텐데, 이제는 미간만 찡그릴 뿐 순순히 대주고 있다.
아마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게 더 귀엽다니까.’
나는 손을 놓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말썽은 너나 피우지 말고. 갔다 와서 사칙연산 시험 볼 거니까.”
“시험 안 봐도 잘해.”
“잘하는 거 알아. 그래도 계속 시험을 봐서 긴장감을 유지해 줘야…….”
“알았어, 알았어. 잔소리를 듣느니 그냥 시험 한 번 더 보는 게 시간 덜 걸리겠네.”
루카는 질린 듯 투덜거렸다.
그러고도 미련을 못 버렸는지 계속해서 걱정을 덧붙였다.
“하여튼, 이상한 사람 만나서 따라가지 말고. 왕녀님이랑도 만나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
처음엔 얘가 나를 놀리나 싶었는데, 막상 말하는 루카의 얼굴에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이번에 왕궁에 함께 가는 로라가 바로 곁에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도련님. 저도 함께 가니까요. 제가 마님 곁에 찰싹 달라붙어서, 이상한 사람이 꼬이면 냉큼 치워드릴게요.”
그래도 빈터발트에서부터 함께 해서 그런지, 로라는 루카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곤 했다.
루카도 그런 로라의 말에는 제법 대꾸해 주는 편이었다.
이렇게 사교성 좋은 로라가 뤼디거에게는 말도 안 붙이려고 하는 걸 보면, 뤼디거가 정말 어지간하긴 한가 보다.
나는 웬만해서는 로라에게 뤼디거에 관한 심부름을 시키지 않겠다 다짐했다.
“음……. 그래. 너라면 그래도 믿을 만하지.”
잠깐. 김루카. 뭐라고?
생각지 못하게 들려온 루카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농담이지?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루카의 표정은 진지했다.
로라는 자기만 믿으라며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 물론 로라가 똘똘하고 야무지기는 하다지만…….
열 살짜리한테 열여덟 살만큼도 믿음을 주지 못하는 스물일곱의 나……. 갑자기 허무함이 밀려왔다.
내가 도대체 루카한테 뭘 잘못한 걸까.
로라한테 밀렸다는 생각에, 나는 왕궁에 도착할 때까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떻게 마차를 타고 왔는지가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왕궁을 보니 앞으로 닥칠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나라 해도 왕족과 처음 대면하는 이 상황이 긴장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루카도 왕족이라지만……. 그거랑은 상황이 다르니까.
시, 실수하진 않겠지.
나는 차게 식은 손을 매만지며 긴장을 풀려 노력했다.
왕궁의 부지는 빈터발트 성과 엇비슷할 정도로 넓었다.
하지만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잔재가 남아있는 빈터발트 성과 달리, 왕의 거주지로서의 호화로움이 돋보였다.
벽마다 세워져 있는 반짝이는 금빛 조각상들이 가을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마치 왕궁에 들어온 이들을 화려함으로 짓누르려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발을 옮겼다.
“그러면, 면담이 끝나고 봅시다.”
뤼디거는 나를 말리나 왕녀의 방 앞까지 에스코트했다. 왕궁 하녀들이 방문을 열었다.
이제는 정말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던 중에 뤼디거와 흘끗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청회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 하니, 내가 빈터발트에 처음 들어섰을 때가 생각났다.
그래. 그때도 엄청 걱정하고 긴장했는데, 결국 잘 풀리지 않았던가.
각오를 다진 나는 한결 차분해진 발걸음으로 왕녀의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의 한가운데, 황금과 상아를 꼬아 만든 것 같은 화려한 의자에 고아하게 앉은 말리나가 나를 반겼다.
바네사 왕녀의 동생인 말리나 왕녀는 바네사와 별반 닮은 점이 없었다.
머리카락은 갈색에 가까운 짙은 금발이었고, 눈동자는 벌꿀주 색이었다.
그녀는 소피아 뺨칠 만큼 깐깐해 보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주의하며 최대한 예법에서 어긋나지 않게 인사를 올렸다.
“말리나 왕녀님을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
말리나 왕녀는 현왕의 동생으로, 왕비가 없는 지금 왕실의 실세였다.
그녀는 슬쩍 눈을 치뜬 채 날 보곤, 대답 없이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그녀가 차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일 때까지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앉게.”
그제야 앉으라는 허락이 내려졌다.
역시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유지한 채 그녀의 앞에 주어진 내 자리에 앉았다.
“솔직히, 나는 이 제안이 달갑지 않았네.”
왕녀는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아니, 앉아서 숨 돌릴 시간은 줘야지…….
이쯤 되니 무례를 넘어 참으로 호쾌하게 느껴질 정도다. 다짜고짜 한 대 맞은 듯 머리가 얼얼했다.
가까스로 표정을 무너트리지 않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말리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 자네가 요나스의 첩만 되었어도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그도 아니고, 그저 하룻밤 상대였던 평민이 아니던가. 그런 이의 샤프롱으로 나서는 건 나로선 불명예스러운 일이지. 잃을 게 많아.”
그녀의 말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던 것이다.
솔직히 나 또한 도대체 그녀가 왜 소피아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인지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소피아가 막무가내로 과한 선물을 보내서 말이야. 마냥 거절하기도 곤혹스러운 상태가 되었네.”
말리나는 소피아를 공작 부인이라는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그것이 친하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소피아를 공작 부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걸까…….
말리나가 곁의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시녀가 바로 보석 상자를 내 앞에 대령했다. 이게 바로 소피아가 왕녀에게 선물한 보석인 모양이었다.
루비와 황금이 어우러진 목걸이가 상자 속에 놓여 있었다.
소피아가 나에게 선물한 다이아몬드만큼이나 찬란한 목걸이였다. 짙은 금발의 말리나에게 무척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이것도 한두 푼이 아닐 텐데, 나에게 샤프롱을 만들어주려고 이렇게까지 했단 말이야……?
소피아가 선물까지 안겨가며 로비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가슴 한구석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먹먹히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