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64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64화
나는 말문이 틀어막힌 채 상자 속 목걸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제일 입맛이 쓴 건, 소피아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말리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소피아가 얼마나 실망할까, 그 생각을 하니 입이 바싹 말랐다.
내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든 말든, 말리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 그대에게 이걸 돌려주고 다른 샤프롱을 찾아주려 했네. 왕족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빈터발트 가에 부족함이 없는 숙녀로 말이야.”
왕녀가 직접 샤프롱을 또 찾아 주는 것만 하더라도 큰 배려다.
소피아가 그렇게까지 머리를 조아리며 부탁했는데, 매정하게 내칠 순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말리나로서도 빈터발트 가와 대놓고 척을 지고 싶진 않겠지.
그래도 샤프롱 없이 연회에 등장하지 않아도 될 테니, 소피아의 노력이 아주 의미 없진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왕녀님의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럼 제 샤프롱은…….”
“그런데 마음이 바뀌었어.”
“네?”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지만, 말리나는 그를 지적하는 대신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자네의 샤프롱이 되어주겠다, 이 말이네.”
당황한 나는 눈만 깜빡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 쉬이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말리나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뭘까.
내가 섣불리 짐작하기보단 묻는 게 좀 더 정확하리라. 나는 떨떠름함을 최대한 감춘 채 조심스레 물었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꾸셨는지 여쭈어도 되나요?”
“글쎄. 내 변덕이라 말하면 그대는 믿을 것인가?”
“…….”
믿을 수 없더라도 수긍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상황 아닌가.
그런 내 뜻을 읽은 것일까, 말리나가 폭 웃음 지었다. 처음으로 본 그녀의 미소는 마치 금잔화 꽃 같았다.
말리나는 내 쪽을 향해 보석함을 밀었다.
“이건 다시 가져가도록 하게. 소피아, 그녀가 왜 자네의 샤프롱을 나에게 맡겼는지 알 것 같군.”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향수에 젖어 있었다.
과거의 추억을 그리듯, 그녀의 벌꿀주 색 눈동자가 먼 곳을 향했다.
난 그제야 말리나가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나에게서 바네사를 겹쳐 보고 있었던 것이다.
“소피아가 그대에게 잘해주는가?”
“예. 무척이나 친절하십니다.”
“그래……. 그녀는 그래도 믿을 만하지. 아직도 바네사 언니를 추모하는 건 그녀와 나밖에 없으니까.”
바네사의 자리를 꿰찬 소피아를 증오할 거라 지레짐작했는데, 말리나의 감정은 그것 하나만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복잡한 심연을 들여다본 기분에, 나는 쉬이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바네사를 아꼈다고 했던 이가 하나 더 있지 않았었나?
그래. 맞아, 선왕.
하지만 말리나의 말은 마치…… 선왕이 바네사를 추모하지 않는다는 듯이 들렸다.
말을 잇던 말리나의 표정이 돌연 뒤바뀌었다.
“하지만 다른 빈터발트들은 아니야.”
원한에 가까운 감정이 수면으로 올라왔다.
갑작스레 분위기가 돌변했다. 표독스레 눈을 뜬 말리나는 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빈터발트를 너무 믿지 말게.”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기시감이 들었다.
프란츠가 뤼디거를 믿지 말라고 했던 그 순간이 지금과 겹쳐졌다.
그때는 프란츠의 열등감이라 생각해서 흘려 넘겼지만……. 말리나가 하는 말마저 그러려니 할 수는 없었다.
“……그 또한 변덕 어린 말씀으로 느껴지지는 않는군요.”
나는 딱딱하게 받아쳤다.
이번 말리나의 말은 변덕이라는 핑계가 먹히지 않을 만한 발언이었다.
말리나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손을 허공에 흔들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하녀들이 썰물처럼 전부 빠져나갔다.
로라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눈을 굴렸지만, 왕족의 축객령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는 괜찮다는 듯 눈짓을 했고, 그제야 로라가 주저하며 발을 옮겼다.
말리나 왕녀와 단둘이 남은 방은 깃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먼저 입을 떼야 하는 당사자, 말리나가 끝없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침묵은 깨어지지 않았다.
한참 끝에 말리나가 입을 열었다.
“언니가 결혼하기 전날, 나에게 귀띔해 준 내용이 있어.”
“뭔가요?”
“이 결혼은 잠깐의 계약일 뿐이라고. 애만 낳아주고 나는 돌아올 거라고.”
그녀는 단단히 닫힌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 바람과도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내가 들은 것이 맞는지 다시 한 번 곱씹었다. 그러니까 이혼하고 오겠다고 한 거 맞지?
입이 떡 벌어졌다.
평범한 결혼도 아니고, 왕가와 공작가의 결혼이 아니던가. 그런데 애만 낳아주고 돌아온다고? 왕녀가?
나는 더듬더듬 물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요?”
“그럴 리가! 언니를 아끼는 부왕께서도 그 사실을 아셨다면 길길이 날뛰었을걸? 왕족으로서의 책임감을 무엇보다도 중시하시는 분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게다가 바네사 왕녀와의 결혼을 대가로 빈터발트에서는 철도 부설권을 가져갔다고 들었는데요.”
“나도 모르지. 하지만 확실한 건, 철도 부설권은 핑계라는 거야. 그 누가 그게 눈속임이라는 걸 알았겠어? 실제로 그 결혼으로 빈터발트 공작이 얻게 되는 건 소피아였어.”
“현…… 공작 부인이요?”
설마 싶었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예전이었다면 말도 안 된다 했겠지만, 이제는 빈터발트 사람들이 종잡을 수 없는 일을 눈 깜짝 안 하고 저지른다는 걸 충분히 느낀 뒤였으니까.
말리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짙은 호박색으로 번들거렸다.
“빈터발트 공작은 소피아를 사랑했어. 이전부터 계속. 언니와의 결혼은 소피아와 결혼하기 위한 빈터발트 공작의 노림수였을 뿐이야.”
말리나가 인지할 정도로 그는 노골적이었던 모양이다.
그걸 용케도 소피아에게 들키지 않았네 싶다.
소피아가 모를 거라 생각한 건 내 추측이었다.
내가 아는, 그리고 모두가 말하는 소피아는 바네사 왕녀를 성전처럼 여겼다.
그런 그녀가 막시밀리안이 바네사를 이용하려는 걸 알았더라면, 결코 그에 순순히 휘둘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결혼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하지만 노련한 막시밀리안은 제 속내를 꼭꼭 숨긴 채 기어코 소피아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언니가 후계자를 낳아주고 공작과 이혼하면, 언니의 핏줄인 요나스가 홀로 가문에 남으니까. 소피아는 결코 그걸 두고 보지 못해.”
“하지만……. 그렇게까지 돌아갈 이유가 있나요? 굳이 그럴 것 없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면 소피아는 결코 바네사를 홀로 두고 공작과 결혼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 또한 그렇다.
한마디로 막시밀리안은 요나스를 인질로 삼은 것이었다.
“물론 언니가 빈터발트에 후계자를 두고 올 테니 철도 부설권과 관련된 계약도 계속될 테고. 그로서는 일거양득인 계약이었지.”
말리나의 엷은 입술에 조소가 덧그려졌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좀처럼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의문을 토해냈다.
“그래도…… 잘 모르겠어요. 바네사 왕녀께서 공작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게 제일 문제야. 언니의 심정을 모르니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거 말이야.”
말리나는 지친 듯 한숨과 함께 소파에 몸을 기댔다.
황금빛 소파에 그녀가 미처 올리지 못해 빠져나온 머리카락 몇 가닥이 금사처럼 드리워졌다.
“하지만 사실을 알려줄 언니는 세상을 떴고……. 공작은 결코 진실을 밝혀주지 않겠지.”
말리나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마치 바네사가 세상을 떠나며 말리나까지 데려간 듯, 모든 것을 손에서 놓아버린 듯한 허무함이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말리나가 바네사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이 더 신기할 정도였다.
바네사 왕녀가 죽은 것이 공작의 계략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공공연할 정도니까.
그것만큼은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정말 아니라는 확신이 있는 것일까.
말리나는 바네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접고, 화제를 돌렸다.
“물론 단지 그 때문에 자네에게 빈터발트를 조심하란 말을 하는 건 아니야. 요나스의 사인이 뭔지 알고 있나?”
“예……. 낙마라고 들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술김에 말을 탔다가…….”
“그래. 낙마……. 낙마였지.”
말리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조소하는 그녀의 입 끝이 들썩였다.
그녀는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한참을 쿡쿡거렸다.
웃는 듯도, 오열하는 듯도 한 기묘한 소리가 끊어질 듯 말 듯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참 끝에 그녀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거 아나? 요나스는 승마는 정말 쥐약이었어. 자존심이 세서 다른 이들한텐 절대 말 안 했지만 말이야. 그 아이가 생전 유일하게 했던 거짓말이 있다면, 승마를 좋아한다는 걸 거야. 요나스가 승마를 싫어했다는 건 아마 소피아도 모를걸?”
이죽거리는 말리나의 목소리 끝에는 우월감마저 도사리고 있었다.
마치 요나스의 모친으로 있는 소피아보다 자신이 좀 더 요나스와 친밀하다는, 그런 종류의 우월감이었다.
“그래서 걔는 말을 탈 기회가 생기면 항상 뺀질거리면서 피하곤 했지. 그런 애가 술을 마시고 말을 탄다고?”
말리나는 기가 찬 듯 조소했다.
싸늘히 내리 식은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말리나는 씹어 뱉듯 말했다.
“요나스가 술김에 수도 없이 많은 기행을 해왔으니 다들 그러려니 하나 보지만, 나는 속지 않아.”
“그렇다면 왕녀님께서는 요나스의 죽음이…….”
순간 소름이 돋았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말리나의 말인즉슨, 요나스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살인이라는 말이었다.
그것도 정황상, 부친인 막시밀리안의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