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65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65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진실에 나는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말리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뻔하지. 공작은 요나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게다가 제가 사랑하는 소피아의 자식이 있는데, 당연히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고 싶지 않겠니? 소피아가 원체 요나스를 싸고도니 삼십사 년간 두고 본 모양이지만…….”
머릿속에서 정보가 뒤섞였다.
내가 알고 있는 막시밀리안은 뤼디거를 후계로 삼으려는 어떠한 의욕도, 생각도 없는 사내였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웠던 나는 멍하니 앉아, 말리나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요나스의 사생아가 후계자가 된다고 했을 때 놀랐네. 소피아의 아이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라면, 요나스의 사생아를 가문에 받아들일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루카의 이름이 거론되기가 무섭게 입이 바짝 타들어 갔다. 반대로 치마를 그러쥔 손은 흥건히 젖었다.
내 안색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말리나가 재빨리 덧붙였다.
“어쩌면 내가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걸 수도 있지만……. 자네의 아이 또한 바네사의 핏줄이 아닌가. 그러니 조심하라 말하는 거네. 조심은 암만 많이 해도 부족하니까.”
하지만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막시밀리안이 루카를 죽일지도 모른다니. 뜻밖의 복병이었다.
그것도 무척 강력한 복병.
나는 힘겹게 답했다.
“명심……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이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야. 그저 빈터발트를 너무 믿진 말란 소리지.”
말리나는 그리 말했지만, 찜찜함을 완전히 털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리나와의 대면은 끝이 났다.
걱정했던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수월히 해결되었지만, 그보다 더욱 큰 걱정거리를 떠안게 되었다.
* * *
나는 비척비척 말리나의 방을 빠져나왔다.
나를 본 로라가 화들짝 놀라며 종종걸음으로 뛰듯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마님?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기에 안색이 이리 해쓱하세요?”
로라의 부축을 받으니 좀 살 것 같았다.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눈 나는 숨을 골랐다.
“말리나 왕녀님께서 마님을 혼내셨어요? 역시, 제가 같이 있었어야 했는데…….”
“……왕녀님께서 뭐라 하시는데 네가 뭘 어쩌려고.”
“뭘 어쩌긴요? 우리 마님께 그런 소리 마시라, 빈터발트에서 가만히 있을 줄 아시느냐 대꾸해야지요!”
말은 어찌나 당당한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로라 덕에 심각함에서는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지만, 역시 이대로 뤼디거와 직면하는 것은 무리였다.
표정 관리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면 분명 뤼디거는 말리나와 무슨 대화를 했느냐 캐물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 뭐라고 하겠는가.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서 당신 형을 죽였대요.
그래서 루카도 죽을지도 몰라서 불안해하고 있었어요.
그러면 뤼디거는 예의 그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겠지. 그러곤…….
‘그게 신경 쓰이십니까? 제가 아버지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저는 후계를 이을 생각이 없다고 말입니다. 만약 제 말을 들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아버지를 처리하는 수밖에.’
이런 소리나 할 게 분명하다……. 앓느니 죽지. 괜히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내가 순순히 대답하지 않거나 거짓말하는 기색을 들키기라도 하는 것 또한 문제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진실을 캐 낼 사내니까. 은근히 집요하단 말이지…….
나는 지끈지끈한 편두통에 끙, 신음을 흘렸다.
“잠깐 기분 전환할 겸 정원에 들르는 건 어떠세요?”
그런 내 마음을 읽듯 로라가 제안했다.
그래. 바람을 쐬며 머릿속을 정돈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뤼디거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조금 여유가 있기도 하고…….
때마침 나오는 길에 잘 관리된 정원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우리는 정원으로 향했다.
왕실 정원은 아직 여름 꽃이 다 지지 않은 채였다.
살굿빛 천일홍이 군락을 이루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가을이라 그런지, 노랗고 하얀 소국 또한 소담하게 피어 있었다.
“어쩜 이렇게 색이 고울까. 마님, 이것도 보세요!”
“그래, 그래.”
로라는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꽃을 살폈다.
참 나. 내 기분 전환인 줄 알았는데, 로라의 기분 전환이었나 보다.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서 이상한 사람이 다가오면 떼어내겠다 루카에게 호언장담을 하더니…….
하긴 북쪽에 살다 보니 꽃 볼 일이 드물어 이렇게 화려한 정원이 생소하기도 할 것이다.
뭐, 로라가 왕궁을 또 언제 와 보겠나 싶기도 하고…….
딱히 바쁜 것도 아니요, 정원에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니 눈치 볼 일도 없다.
나는 흔쾌히 로라에게 제안했다.
“로라, 사람도 없고 하니 실컷 구경하다 오렴. 나는 찬찬히 걷고 있을게.”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당연하지. 사실, 머리가 복잡해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거든.”
“그러면 제가 필요하면 바로 부르셔야 해요, 아셨죠?”
로라는 몇 번이나 당부하고 나서야 발을 옮겼다.
가벼운 발걸음이 보는 나조차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런 로라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로라가 이내 모습을 감추자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아……. 진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바닥에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귀족답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알게 뭔가. 어차피 지금 보는 사람도 없는데.
나는 곰곰이 내가 아는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도 결국 막시밀리안은 루카를 후계자로 삼았단 말이지……. 루카에게 드리운 위협이라고 해봐야 전부 프란츠 때문인데. 막시밀리안이 프란츠를 사주해서 루카를 처리하려고 한 건 아닐까? 아니야. 그랬으면 뤼디거까지 죽게 둘 리가 없어.”
막시밀리안에 대한 내 인상은 소설을 봤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소피아를 제외하면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게 제 아들, 뤼디거라 해도 다를 바 없다.
막시밀리안과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은 없지만, 그와의 짧은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이가 뤼디거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요나스를 죽인다?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아니면……. 말리나의 말대로, 그녀가 요나스의 죽음에 대해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
그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수도에서 할 일은 정해져 있으니까.
일단 이사벨라 문제를 확실하게 끝낸 뒤에 고민해도 늦지 않다.
“어휴, 이게 뭔 고생이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에 양손을 얹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실 정원에 왔는데, 이대로 땅만 보다 가는 것도 억울하다.
고개를 든 나는 그제야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시선에 담을 수 있었다.
나는 느긋하게 발을 옮기며 정원을 거닐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지도 오래되었다.
항상 로라나 루카, 뤼디거 셋 중 하나는 함께했었으니까.
‘역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긴 하단 말이지…….’
하지만 빈터발트에 가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루카가 질색한단 말이지.’
참 나, 내가 혼자 있으면 사고 치는 멍멍이도 아니고 말이지.
뤼디거나 루카나 둘 다 유난스러웠다. 하여간, 귀찮기는…….
그리 투덜거리며 정원의 모퉁이를 돈 순간, 나는 길 한가운데 어떤 사람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신사였다.
그는 주저앉은 채 지팡이에 몸을 반쯤 기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노신사에게 다가갔다.
아직 정신을 놓지는 않았는지, 호박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나를 향했다.
“괜찮으세요?”
나는 노신사를 부축하며 물었다.
노신사는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고개를 내젓더니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음……. 정신을 놓지 않았다는 내 추측이 틀렸을지도…….’
노신사는 루카가 아니라 내 할아버지 연배쯤 되지 않을까 싶은 나이였다.
연세가 연세다 보니 한 번 쓰러진 것도 큰일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철렁인 나는 노신사의 걱정에 거듭 질문을 던졌다.
“괜찮으세요? 혹시 말씀이 어려우신가요?”
“아, 아니. 괜찮, 괜찮네. 도와 줘서 고맙네.”
노신사는 더듬더듬 답했다.
발음이 분명한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노신사를 부축해 근처의 벤치로 향했다.
그냥 걸어가면 단숨에 도달할 거리였지만, 천천히 한 걸음씩 노신사의 속도에 맞추다 보니 한참이 걸렸다.
그것도 힘들었는지 노신사는 땀을 뻘뻘 흘렸다. 넘어진 탓에 흙도 이곳저곳 묻어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노신사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휴, 손수건을 갖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노신사의 손을 끌어다 손바닥에 묻은 흙도 털어내었다.
노신사는 가만히 앉아 내 손수건에 수놓아진 아이리스 자수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정신은 차렸지만 아직도 멍한 것 같았다.
역시 의사라든가 다른 사람을 불러 도움을 받아야겠다.
나는 노신사에게 손수건을 쥐여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기 잠시만 계세요. 제가 사람을 불러올게요.”
“아, 아니. 잠깐만. 잠깐만 여기 앉아보게.”
노신사가 다급히 나를 붙들었다.
뜻밖의 상황에 나는 눈만 깜빡이며 당혹스럽게 말을 흐렸다.
“하지만…….”
“아니, 정말 괜찮아서 그러네. 내 잠시 앉아 도란도란 대화 몇 마디만 하면 씻은 듯 싹 나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