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67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67화
그들의 시선은 이내 나에게로 꽂혔다.
무언의 의도를 가득 담은 채 나를 빤히 바라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이, 이건 좀…….
뤼디거는 눈이 마주치든 말든 잘도 못 본 척하던데,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새삼스레 뤼디거의 신경줄이 존경스러워졌다.
나는 떨떠름하게 뤼디거와 사내들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저 이분들은……. 그, 말씀 나누고 계시던 게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갑시다.”
“아니, 빈터발트 대령 무심하기가 빈터발트 날씨 같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거 참 너무하네!”
엷은 갈색 머리를 너저분하게 기른 사내가 버럭 외쳤다.
그는 뤼디거를 지나쳐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잔뜩 멋들어지게 신사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저는 저머밀 소령입니다. 페터라 불러 주십시오.”
그의 손이 무척 자연스레 내 손으로 향했다.
얼마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는지, 나는 그의 입술이 내 손등으로 다가오기 전까지도 내 손이 그의 손에 잡혀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내 손등에 닿지 못했다.
뤼디거가 바로 그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뒤로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힘이 얼마나 센지, 그리 세게 힘을 준 것 같지 않은데도 단단한 체격의 저머밀 소령이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어쩌면 저머밀 소령이 체격에 걸맞지 않게 허약한 걸 수도 있겠다.
저래서 장교라니.
혹시 가문으로 뒷공작 해서 들어간 건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뤼디거는 저머밀 소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건방지다, 저머밀 소령.”
“아니, 이건 그냥 인사라고!”
바닥에 고꾸라져 체면을 구긴 저머밀 소령이 억울한 듯 외쳤다.
하지만 뤼디거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나에게로 다가와 안부를 살폈다.
“기분은 좀 괜찮습니까?”
뤼디거의 질문이 영 엉뚱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기분이 나쁠 이유가 있나요?”
“처음 보는 사내가 다짜고짜 당신 손을 잡았잖습니까. 당신은 그런 거 싫어하잖아요.”
응?
아니, 물론 탐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싫다 할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러던 찰나 퍼뜩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바로 뤼디거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가 뤼디거인 걸 몰랐을 때, 나는 도와주려는 그의 손을 대놓고 무시한 채 도망친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첫 마차에서의 에스코트도 무시했었지…….
맞아, 그때 결국 고의가 아니었다 사과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 이후로는 뤼디거와 급속히 가까워졌고, 이 세계의 에스코트 문화와 인사에도 익숙해서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뤼디거는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 안 되었던 당시의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황급히 말했다.
“그, 그렇게 싫어하진 않아요. 그저 인사였을 뿐인걸요.”
“……그렇습니까.”
어딘지 모르게 시무룩해 보이는데…….
내가 자기만 피했다고 생각한 건가, 혹시.
아니야. 뤼디거가 그런 거로 시무룩할 리가 없지. 그냥……. 자기가 예민하게 굴어 머쓱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뤼디거는 그런 일로 머쓱해하는 이도 아니었지만, 시무룩보다야 옳은 설명 같았다.
그런 뤼디거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또 다른 장교가 나섰다.
“소문 이상인데요.”
“소문이요?”
검은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정리한, 가는 눈매의 사내였다.
저머밀 소령의 선례로 배웠는지, 그는 나에게 정도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빈터발트 대령이 오늘 여성분을 에스코트해 왕궁에 왔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다들 거짓말이다, 에스코트가 아니라 그냥 같은 길을 걸었을 뿐이다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런데 참, 정말 에스코트였군요.”
뭐?
뤼디거와 같이 왕궁에 온 건 불과 몇 시간 전이다. 그사이에 맞닥트린 사람도 몇 없는데……. 나는 당황하여 물었다.
“그게 그새 소문이나 돌 일인가요……?”
“물론이지요. 차마 믿을 수가 없어 저머밀 소령과 함께 확인하러 온 겁니다. 클럽에서 내기가 벌어졌거든요.”
“내기?”
“빈터발트 대령이 과연 언제쯤 에스코트를 할 것인가? 그가 사교계에 나선 날부터 매년 집계했으니, 이제 열네 번째쯤 되었군요.”
“…….”
귀족 남성들이 클럽에서 내기를 하는 등 쓸데없는 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한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무려 십사 년 동안 내기를 지속하고 있단 말이야?
어처구니없었던 내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새, 뤼디거가 그를 핀잔주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하. 그래도 숙녀분께 어느 정도 설명은 드려야 당황치 않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모두 빈터발트 대령이 여성의 외모를 보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평소 수도에서 아름답다 소문난 숙녀들에게도 시선 한 점 안 주던 분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거, 참. 이리 아름다운 숙녀분을 에스코트해서 오실 줄이야.”
사내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유들유들 말을 이었다.
내 외모를 칭찬하고는 있지만, 왠지 뤼디거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 강했다.
왠지 모르게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 혹은 정치인 같은 사내였다.
사내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렸다 싶으니, 그제야 나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물론, 입맞춤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저는 다니엘 헵스퍼드. 계급은 중령입니다. 빈터발트 대령과 저머밀 소령과는 사관학교 시절 동기였습니다.”
아아. 그제야 이 엉뚱한 모임이 어떻게 성사된 것인지 깨달았다.
어쩐지. 아무리 같은 직장이라 해도 그렇지, 좀처럼 공통분모가 없어 뵈는 사람들이다 싶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뤼디거 씨 친구시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유디트 마이바움이라고 해요.”
“친구가 아니라 동기입니다, 유디트 씨.”
내가 말하기가 무섭게 뤼디거가 정정해 주었다.
어찌나 칼 같은지, 잠시나마 그에게 친구 같은 살가운 것이 있으리라 기대한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보통은 그런 동기도 친구라고 퉁치지 않나?
하긴, 가문에서도 빈터발트와 방계를 딱 잘라 방계는 가족 취급 안 하는 남자가 아닌가.
그런 그에게 내가 뭘 기대한 건지…….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뤼디거는 이 자리가 불쾌한 듯 시종일관 자리를 뜨고 싶은 기색이었다.
어지간해서 나도 그의 의도에 따라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궁금한 게 남아 있었다. 뤼디거에게 묻자니 절대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고…….
“그런데……. 그러면 뤼디거 씨는 단 한 번도 사교계 에스코트를 한 적이 없으신 거예요?”
“네. 한 번도요.”
“전 몰랐어요. 뤼디거 씨가 무척 신사적이라……. 다른 숙녀분들께 인기가 많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플러팅해 대는 솜씨나 돈 쓰는 솜씨나.
생긴 것도 그렇고 가문도 저러하니 뤼디거가 비혼주의자인 걸 알면서도 접근하는 여자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굳이 사귀지 않더라도, 적당히 알아두기 나쁜 남자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내 말을 듣기가 무섭게 저머밀 소령, 페터가 기가 찬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숙녀분들에게 인기가 많아요? 천하의 빈터발트 대령이?”
페터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었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기가 찬 눈빛으로 뤼디거를 바라보았고, 나 또한 덩달아 뤼디거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뤼디거는 뻔뻔한 얼굴로 뭐가 문제냐는 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페터는 억울하다는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긴 낯 거죽은 멀쩡하다 못해 잘생긴 편이기는 하죠……. 그래서 처음 사교계에 나섰을 땐 모두가 술렁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러면 뭘 합니까? 숙녀를 숙녀로 취급 안 하는데.”
숙녀를 숙녀 취급 안 하면 어떻게 해?
그렇다고 뤼디거가 무뢰한처럼 구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내가 아는 뤼디거는 기본적으로 무심하고 무뚝뚝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무척 예의 바른 사내였다.
그들의 말이 이해 가지 않았던 나는 눈만 깜빡였다.
“빈터발트 대령은 기본적으로, 타인을 대할 때 참으로 평등한 사람이라…….”
다니엘 헵스퍼드가 곤혹스레 말끝을 흐렸다.
한마디로, 귀족 여성에게도 그들 대하는 듯이 군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매정하게.
잠깐……. 나한테는 뤼디거가 ‘귀족 신사라면 숙녀분을 보필하는 게 당연하다’라고 했었는데?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는 발언이다.
그날이 바로 뤼디거를 좋아한다 자각하기가 무섭게 차인 날이었으니까.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뤼디거가 햇빛 아래 반짝이는 얼음 조각처럼 화사하게 미소 짓던 모습이 망막에 눌어붙은 듯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는 다른 귀족 숙녀들에게도 나에게 하듯이 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내가 그에게 있어 예외적 대상일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다시 한 번 싹텄다.
찬물을 끼얹은 쇠처럼 식었던 마음이 다시 벌겋게 담금질 되었다.
물론 예외의 대상이라 해서 좋아한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는 건 아니고…….
그, 그래도 이건 아니지.
유디트 마이바움, 또 설레발친다. 김칫국도 어지간히 마셔야지.
나는 도리질을 쳐 머릿속을 뭉게뭉게 메우기 시작한 생각을 흩어 보냈다.
그런 내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듣다 못한 페터가 투덜거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솔직히 말하지그래, 다니엘. 대령은 애초에 다른 사람을 같은 인간 취급 안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