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68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68화
“…….”
“레이디께는 안 그럽니까? 참 나,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시는 모양인데……. 뤼디거 빈터발트가 이렇게까지 가식적일 줄은 또 몰랐네.”
지금까진 계급을 붙여 일일이 다 존대했는데, 이젠 그마저도 없었다.
다니엘과 뤼디거를 이름으로 부르는 페터의 얼굴이 억울로 가득 찼다.
내가 생각한 뤼디거가 다른 숙녀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저 과한 선물은 하지 않고, 일일이 챙기지 않고……. 이 정도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자 하니 뤼디거가 나를 예외적 대상 취급하는 걸 넘어,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심각하게 문제가 있어 보였다.
아니, 나도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뤼디거의 성격은 내 짐작보다도 더 이상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본인 앞에서 너무 막말하는 거 아냐?
혹시나 뤼디거가 불쾌해하지는 않을까, 나는 걱정스럽게 뤼디거의 기색을 살폈다.
하지만 뤼디거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페터는 그것 보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저 봐요. 우리가 이렇게 앞에서 대놓고 제 흉보는 걸 듣고만 있죠? 왜 그런 줄 알아요? 우리 말이 사람 말처럼 안 들려서 그래요. 개소리라서. 개가 짖는다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인답니까? 시끄러우면 피하거나, 입 다물게 하지.”
“슬슬 시끄러워진 참이다만.”
“…….”
뤼디거가 입을 떼기가 무섭게 페터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페터가 기세 좋을 대로 입을 놀리고는 있지만, 이 무리의 서열을 꽉 쥐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뤼디거였다.
아까 내가 오기 전에 있었던 대화도 이 비슷했겠구나 대충 짐작이 갔다.
저들은 한참 무어라 무어라 말하고, 뤼디거는 귓등으로도 안 듣고.
페터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내 앞이라 이미지 관리를 한답시고 계급으로 부른 모양인데, 볼 장 다 봤다고 생각했는지 이제는 완전히 말을 놓았다.
“하여튼 너 때문에 우린 돈만 잃게 생겼다. 어휴. 난 올해도 에스코트 안 한다에 걸었는데.”
“우리에서 난 빼.”
“왜? 돈 안 걸었어?”
“아니.”
“그럼……. 뭐야, 너 설마 에스코트한다에 걸었던 거야? 너 혼자? 언제? 맙소사,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페터는 세상 모든 게 억울한 듯 울상을 지었다.
“잠깐, 내 기억이 맞다면 올해 에스코트한다에 건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거 같은데……. 그러면 십사 년 치 내깃돈이 쌓여 있으니까……. 너, 완전 횡재한 거 아냐? 그 돈이면 수도에 집도 살 수 있을걸!”
이 세상도 수도 집값이 만만찮긴 한 모양이다.
바로 집도 살 수 있단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아니, 잠깐. 내깃돈이 뭐 그 정도야? 그쯤이면 거의 로또나 복권급 아니야?
저렇게 눈먼 돈이 클럽 같은 데 잔뜩 묻혀 있단 말이지……. 이 나라 경제도 어지간할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매년 돈만 걸고 수거는 안 한 모양인데. 다들 무슨 성금하듯 돈을 넣은 모양이다.
귀족들이란, 쯧쯧.
하지만 로또 당첨자가 된 것 치곤 다니엘의 표정이 마냥 밝지 않았다.
다니엘은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아냐, 생각해 봐. 작년까지 걸렸던 금액이…….”
페터가 이리저리 손을 꼽아가며 돈을 셈하는 사이, 다니엘이 뤼디거를 향해 슬쩍 눈짓했다.
뤼디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페터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두 사람 사이에 눈빛이 오갈 만큼 오간 뒤였다.
뭔가 수상한데……. 설마…….
내가 상황에 합당한 의심을 떠올리려 하기가 무섭게 페터가 또 입을 열었다.
그는 참으로, 정말로 말이 많은 사내였다.
“그런데 뤼디거, 이런 분이 계시면 전하께서는 지금 열심히 헛발질하고 계시는 거 아냐? 이번에 너 진급 이야기도 하시던데. 장관급으로. 그거 아무리 봐도 왕녀님이랑…….”
왕녀님이랑?
내가 궁금해하며 잔뜩 귀를 기울이기가 무섭게 뤼디거가 휙 하니 자리를 떴다.
“이제 갑시다.”
그리고 나 또한 마치 사교댄스를 리드당하는 것처럼 자연스레 그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한쪽 손이 도대체 언제부터 내 손을 붙들고 있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잠깐, 이봐! 빈터발트 대령! 야, 뤼디거!”
뒤에서 페터가 뤼디거를 부르짖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로라 또한 부랴부랴 우리를 따라왔다.
이렇게 자리를 뜨는 게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던지라, 나는 당황해서 뤼디거에게 속삭였다.
“저……. 이렇게 헤어져도 되는 거예요? 그래도 인사라도 해야…….”
“안 해도 됩니다.”
뤼디거의 말만 들으면 참으로 명쾌했다.
“궁금한 것도 아직 있는데.”
“저에게 물으십시오.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느새 마차가 있는 곳까지 빠져나왔다. 눈 깜짝할 만큼 순식간이었다.
로라는 마부석 옆에 앉았고, 마차 안에는 나와 뤼디거만이 마주 보고 앉았다.
궁금한 게 산더미였는데, 또 막상 그와 이렇게 대면하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묘한 위압감 같은 게 있단 말이지…….
‘이래서 페터가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걸 내심 반긴 거였는데.’
뤼디거에게 물어보면 은근슬쩍 회피하거나 이상한 핀트로 대답할 문제들에 대해 일반인의 관점에서 대답해 주는, 무척 좋은 정보통이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슬쩍 운을 떼었다.
“음……. 친구분들이 뤼디거 씨에게 서운한 게 많았나 봐요.”
“친구 아닙니다.”
“네에, 네. 동기분들이.”
어휴,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처음에는 루카의 좋은 엄마, 아빠가 되어주자는 등 말도 안 되는 발언을 하더니, 지금은 으레 친구로 치고 넘어가는 상대마저도 동기라고 딱 잘라버린다.
뤼디거의 거리감에 대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제가 안 가고 대화하고 있어서 기분이 나쁘신 건…… 아니었죠?”
“기분 나쁠 이유가 있습니까?”
“별로 원치 않는 것 같아서…….”
“아닙니다. 솔직히, 제가 정말로 그들의 대화를 불필요하게 여겼다면 그들을 내쫓았을 겁니다.”
그건……. 그래 보이네.
안 그래도 페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자리를 떴으니까.
뤼디거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들의 대화가 불쾌하긴 해도 필요한 구석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상관없었습니다.”
“그 대화가…… 필요할 만한 대화였나요?”
“네. 제가 당신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걸 그들이 좀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뤼디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심장이 철렁였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나는 마음을 추스르려 했지만 좀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뤼디거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사실 지금껏 저 나름대로 열심히 어필을 했습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유디트 씨에겐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서요.”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은 고백이라기엔 건조했고, 늘상 하는 의례적 말이라기엔 너무나 달았다.
착각하지 않으려 해도 착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로선 착각하고 싶어 미치겠는 말이었다.
이대로 그의 말을 듣다가는 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버리겠다 싶었다.
상황을 짚고 갈 필요성을 느낀 나는 이참에 대놓고 물었다.
“그러니까 그 특별함이라는 게…….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전 뤼디거 씨의 말을 잘 못 알아듣겠어요. 그 특별함이 도대체 무슨 특별함이죠?”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열이 올랐는지 얼굴이 뜨거웠다.
“저에겐 ‘귀족 신사라면 숙녀분을 보필하는 게 당연하다’고 했었잖아요. 그건 뭐였어요? 전 당연히 다른 분들께도 저에게 하는 것처럼…….”
“아,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신 겁니까?”
뤼디거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난처한 듯 혀를 차는 그의 입가의 움직임마저 우아했다.
뤼디거는 겨울 하늘 같은 푸른 청회색 눈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고는 또박또박, 내가 혹여나 잘못 듣는 일이 없을 정도로 분명히 말했다.
“귀족 신사라면, 자신이 특별히 생각하는 숙녀분을 보필하는 게 당연한 일이죠. 저에게 있어 숙녀는 당신뿐이니까요. 유디트 씨.”
입이 바싹 말랐다.
아랫입술이 저도 모르게 바르르 떨렸다.
그에게 휘둘리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침착히 말했다.
“제가…… 루카의 이모라서, 하나뿐인 외혈육이라 그런 건가요?”
“이러니 당신이 아직도 제대로 모른다는 겁니다.”
뤼디거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답답해하는 게 절로 느껴졌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달그락거리는 마차의 바퀴 소리와 함께 내 귀를 먹먹히 메웠다.
오늘 하도 부여잡아 조금 구깃해진 치맛단이 다시 한 번 내 손 아래서 우그러졌다.
지금껏 착각이라 애써 넘겨왔지만…….
지, 지금 이건 아무리 착각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착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입술이 달싹거리기를 수십 차례,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좋아, 물어보자.
쪽팔림은 한순간이고, 개운함은 오래가니까.
애써 용기를 낸 나는 불쑥 고개를 들어 뤼디거를 마주 보았다.
나는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뤼디거는 참으로 멀끔한 낯이었다.
“절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