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72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72화
오, 그건 좀 쉽지.
나는 바로 단답했다.
“음……. 불륜?”
“그런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가정 말고 말입니다.”
뤼디거의 미간에 다시 주름이 졌다.
평소엔 얼굴 근육을 잘 안 쓰더니, 오늘은 유난히 표정이 변화무쌍했다.
그만큼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이번도 아무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애써 대답을 쥐어 짜냈다.
“그러면…… 도박?”
도박으로 집안을 폭싹 날려먹은 유디트 부친의 전적이 있는 만큼,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바로 도박이었다.
‘귀족 남자들 사이에서 도박이니 내기니 하는 게 유희거리처럼 퍼져 있는 게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도박에 흥미가 없거나 피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어울리게 된다.
사회적으로 불건전한 풍습이야, 정말.
하지만 뤼디거는 자제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루카와 카드게임 할 때도 느꼈던 건데, 그런 종류의 사행성 게임엔 지금껏 딱히 흥미도 없었던 듯싶고.
그래서 난 뤼디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덧붙였다.
“그런데 뤼디거 씨가 도박하는 성격은 아니잖아요.”
근데……. 잠깐, 잠깐만.
뭔가 마음속 한구석에 걸리는 게…….
나는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무엇이 그리 찜찜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저기, 뤼디거 씨.”
“예.”
“혹시, 정말 혹시나 해서 물어 보는 건데요……. 헵스퍼트 중령에게 절 에스코트할 거라고 미리 알려줬어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싶긴 하지만 찜찜하니까…….
이런 건 확실히 해둬야 괜한 사람 오해하지 않는 법이다.
뤼디거는 반반한 얼굴로 뻔뻔히 말했다.
“네. 적당히 지분을 가져오는 것으로 타협했습니다. 처음엔 믿지 않는 것 같더니, 오늘 보니 제대로 반영해 뒀더군요.”
뭘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 말해?
어처구니없었던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그거 사기 아니에요?”
“뭐……. 사기는 아니고, 융통성을 부린 정도죠.”
평소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던 사람이 융통성 운운하니 기가 찼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돈도 많은 사람이!”
“제가 돈이 많은 것과 별개로 돈이 쌓여 있는 걸 아는데, 굳이 그 돈을 얻지 않을 이유는 없잖습니까.”
아니, 그건 그렇지만…….
내 말문이 탁 틀어막혔다.
그래. 부자라 해서 돈을 가볍게 여기리란 법은 없지. 뤼디거의 뻔뻔함의 압승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돈을 중히 생각하면, 카드 게임 같은 내기에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조금 포기한 나는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에 내기에 져주면서 나가는 돈은 뭐구요?”
“그건 제 나름의 사교를 위한 적당한 윤활유입니다.”
뤼디거는 그리 말하곤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내가 불편해한다고 생각한 걸까. 뤼디거는 아까의 뻔뻔함이 거짓말인 듯 조심스레 덧붙였다.
“하지만 유디트 씨가 그런 걸 싫어한다면……. 그냥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
아, 아니. 그렇게까지 싫다는 건 아니고.
저도 좋아해요, 불로소득.
사리사욕적인 인간이 괜히 결벽한 척 군 것 같아 민망했다.
그 돈이 얼마인데…….
수도에 타운하우스는 못 사도, 근교에 작은 저택 하나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와,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어마어마한데.
갑자기 욕심이 조금씩 밀려왔다. 생각해 보면 그 내기가 성립하게 된 것도 내 덕분 아닌가?
하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하자니 내 체면이 걱정되었다.
지금껏 욕심 없는 모습을 잔뜩 어필했는데…….
아, 뤼디거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그런 검소한 면 때문일 수도 있겠다.
사준다 하는데 거절하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거 말이지.
괜히 입 댔다가 정만 떨어지는 거 아닌가 몰라.
나는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선택은 빨랐다.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나는 턱 끝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 적당한 지분에 절 끼워주시면 봐드릴게요.”
* * *
걱정했던 것과 달리 뤼디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제 지분도 유디트 씨께서 가져가는 게 응당한 일입니다.”
그러며 제 몫까지 다 넘기려 하는 게 아닌가.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손을 내저었더니, 뤼디거는 ‘유디트 씨는 너무 욕심이 없습니다.’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이 사람 진짜 기준 이상하단 말이지.
전부 준다는 뤼디거와 몇 번을 옥신각신한 끝에 힘겹게 지분을 정했다.
딱 반절.
하지만 나로서는 정말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뤼디거가 주는 보석은 거절했으면서 내기로 얻은 돈은 반절 갈라 갖는 내 행태가 이중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나름 정당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는 획득이었다.
‘원작에서는 뤼디거가 누군가를 에스코트하는 일이 없었을 테니, 계속 클럽에 묻힌 돈으로 있었을 거 아냐. 이건 정말로 내 덕분이지.’
어차피 클럽에선 귀족들의 사치품인 와인이나 시가 따위로 바꿨을 터였다.
그에 비하면 내 쪽이 좀 더 건실하게 써줄 수 있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노후 자금이라든가…….
노후 자금, 이 얼마나 건실한 울림인가!
안락한 노후를 위해서는 지금부터 차곡차곡 잘 모아둬야 했다.
내가 돈을 벌만 한 일이 딱히 마땅치 않으니까.
그렇다고 루카한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도 모양새가 좀 그렇고.
나는 희희낙락하며 머릿속으로 돈을 셈했다.
뤼디거에게 고백받은 순간이 마냥 거짓말 같았더라면, 지분을 나눠주겠다는 말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십칠 년간 살아온 천성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타운하우스로 돌아왔다.
마차가 멈추고, 먼저 마차 밖으로 나선 뤼디거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젠 익숙해진 에스코트였다.
하지만 손의 온기는 그렇지 않았다.
묘하게 뜨거운 체온이 유난히 생생히 느껴졌다.
그의 눈빛에서 느끼지 못한 열기가 전부 손바닥에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나 좋아하나, 이 남자.
나는 내 손이 마치 작은 새라도 되는 듯 소중히 감싸고 있는 뤼디거의 굵은 나뭇가지 같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간신히 진정했다 생각한 심장이 또다시 약동했다.
마차 앞에는 루카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내가 왕궁에서 사고라도 칠까 봐 그리도 걱정되었니……?
루카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와 뤼디거 사이를 번갈아 가며 빤히 바라보았다.
“……둘이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순간 심장이 철렁였다.
뭐야, 얘 어떻게 알았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딱히 이상하게 군 건 없었는데. 나, 나름 표정 관리도 했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거리감을 되짚어 보며 나는 애써 침착하려 애썼다.
이럴 땐…… 오리발이다.
그래, 오리발이 해결책이다.
뤼디거에게 고백받았다는 이야기를 루카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물론 굳이 숨길 일도 아니지만…….
지금껏 뤼디거를 대하는 루카의 태도를 보아하건대, 고백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뒤집어질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모를 때만 하더라도 나와 너무 친밀한 척하지 말라며 사사건건 경계했었으니까.
왜 그렇게 뤼디거한테 날을 세우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뤼디거의 고백을 유보해 둔 만큼, 지금 당장 일을 끄집어내 괜히 소란 피울 이유는 없었다.
나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뻔뻔한 낯으로 되물었다.
“이상하긴 뭐가?”
“…….”
내가 당당하게 나서니 루카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의심스러운 눈빛을 한 번 더 보냈을 뿐.
“흐음……. 그래?”
아니, 무슨 열 살짜리 애가 저렇게 능구렁이처럼 굴어?
저, 정말 눈치 못 챈 거 맞겠지…….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루카가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뤼디거에게 눈치를 주었다.
애써 상황을 넘겼는데 뒤늦게 불을 지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래도 뤼디거가 눈치가 전혀 없진 않은 모양이었다.
내 시선을 받은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
“…….”
그렇게 무언의 침묵 아래 협정이 체결되었다.
하긴, 루카의 견제를 몸소 겪은 사람이니 루카에게 일찍 사실이 밝혀지면 엄청 시끄러워질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뤼디거와 나 둘 다 쉬이 입을 열 생각을 않자, 루카는 그에 대해 캐묻는 걸 포기했는지 질문을 돌렸다.
“뭐, 좋아. 왕궁에서 별일은 없었지?”
“음……. 응.”
왕녀의 의미심장한 말이라던가, 노신사를 만난 거라던가, 뤼디거의 동기들을 만난 거라던가 별일이랄 건 많았지만…….
딱히 큰일은 없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왕녀가 했던 말이 좀 찜찜하긴 하다.
빈터발트를 조심하라는 그 말.
뤼디거야 그럴 생각이 없다 해도 막시밀리안의 속내가 어떨지는 모르는 거니까.
괜히 불안해진 나는 내가 없는 동안 타운하우스에 혼자 남아 있었을 루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물었다.
“너야말로 별일 없었지?”
“당연히 별일 없지. 저택에만 있었는데.”
루카는 의아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내가 과잉반응을 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로선 그런 말을 듣고 온 뒤니,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었다.
“빈터발트에 가는 기차에서 튀어나온 암살자는 뭐, 거기가 위험한 곳이라서 튀어나왔니?”
“기차야 유동 인구가 많지만 타운하우스는 아니잖아. 하여튼, 잔걱정은.”
루카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 투덜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잔걱정으로 따지자면 루카 쪽이 더 심한 것 같은데…….
하지만 그리 말했다가는 논쟁으로 번질 테니 부러 말을 꺼내진 않았다.
루카와 말씨름을 해서 이길 자신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그때, 루카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집사가 뭔가 준비하는 거 같던데, 그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