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74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74화
연보라색 공단에 흰색 레이스를 겹쳐 화려한 느낌이 나는 드레스였다.
잘 보면 레이스를 하나하나 드레스에 꿰맸다. 엄청나게 섬세한 작업이다.
드레스를 처음 보았을 때 절로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안 그래도 레이스 소재는 걱정되는데. 어디에 걸려서 뜯기기라도 하면…….
특히나 모두가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고 모이는 연회라면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레이스의 사이사이에 진주도 달려 있었다.
원래는 진주가 없었는데 내 자개 머리 장식과 맞춘다고 로라가 뤼디거에게 담판을 지어 얻어낸 진주로 일일이 수작업한 것이었다.
아니, 평소엔 말을 나누는 것도 기겁하더니…….
로라가 뤼디거에게서 얻어냈다며 함 한가득 진주로 채워왔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하물며 그 진주를 치맛단에 장식한다고 했을 때는 정말이지…….
‘걷다가 하나라도 똑 떨어지면 아까워서 어떻게 해?’
‘아니, 마님. 제 솜씨 못 믿으세요? 제가 바로 빈터발트의 용접꾼 로라라구요!’
‘아니, 도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진주는 드레스에 용접하는 게 아니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자자, 분명 진주를 다는 쪽이 더 예쁠 테니까요! 이번 연회만큼은 마님이 주인공이셔야 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루카를 소개하는.’
‘마님이 바로 루카 도련님의 체면이에요! 마님이 누구보다도 눈이 부셔야 루카 도련님도 으쓱하게 된다니까요!’
그래도…….
무언가 반박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지만, 로라의 기세가 자못 위협적이었다.
내가 한마디 하면 열 마디로 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나도 이사벨라와 요나스의 행적을 외우는 데 골몰해 있던지라, 결국 로라 마음대로 하라 그냥 흘려 넘겼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물론 예쁘긴 정말 예쁘지만…….’
나는 거울 너머로 드레스를 입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보랏빛 공단 위를 반투명하게 덮은 레이스 위 반짝이는 진주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보석은 당연히 소피아가 선물한, 걸기만 해도 목디스크가 올 것 같은 무시무시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세트였다.
드레스에 달아둔 진주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반짝임의 향연에 나는 끙, 신음을 흘렸다.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제각기 반짝이는 수없이 많은 다이아몬드와 마주하자니 기가 죽었다.
혹시나 내가 마음을 바꿀까 싶었는지, 로라는 단단히 쐐기를 박았다.
“오늘은 무조건 이걸 하셔야 해요. 알고 계시죠, 마님?”
“알아, 나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정말 평생 안 하겠지.
나는 결국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로라 또한 엄숙한 표정으로 경건히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들었다.
목덜미에 닿는 금속의 감촉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러트렸다.
착시 현상인지, 내가 그리 믿어서 보이는 환각인지는 모르겠는데 목에서 뭔가 빛이 나는 기분이었다.
아마 연회장에 가면 다이아몬 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가려 내 얼굴은 하나도 안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그건 좀 괜찮은 것 같았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준비가 거의 끝나갔다. 장장 여덟 시간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물론 그동안 그저 준비만 하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처음엔 뭐 이리 일찍부터 부산스레 호들갑을 떠나 싶었는데, 이래서야 조금만 더 늦게 준비했다간 요기할 시간도 없었을 뻔했다.
해가 느릿느릿 머리 위를 지나갔다. 슬슬 출발할 시기였다.
로비로 내려가자, 방계 모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차려 입은 뤼디거와 루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카는 금색 자수가 놓인 감색 벨벳 어린이용 정장을, 항상 장교복만 입던 뤼디거는 드물게 예식용 정장을 입었다.
칠흑처럼 검은 옷감에 은으로 장식한 블랙 다이아몬드 단추가 촘촘히 달린 자태가 근사했다.
매끈히 쓸어 넘긴 머리카락 아래 짙게 뻗은 눈썹까지, 한 올 한 올 전부 그려낸 듯 매끄러웠다.
나만 이리 화려하게 차려입은 거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두 사람도 만만치 않아 조금 안도했다.
솔직히 두 사람은 연회가 아니라 대관식을 치르러 가는 것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뭐…….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지. 루카가 사교계에 입성해서 공작가 후계자로서 공표되고 나면, 빈터발트 공국의 대관식을 치르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미래의 소공작, 이제는 빈터발트 가에 입적하여 루카 빈터발트가 된 루카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자.”
“뭐야, 오늘은 네가 에스코트하려고?”
꼬마 신사 같은 루카의 모습에 나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이 사교계 데뷔랍시고 어른스러운 척하나 싶어서 귀여웠다.
뤼디거도 그리 생각해서 양보한 모양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뤼디거를 돌아보았는데, 왠지 표정이 뚱했다.
단숨에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불만스러운 기색이 노골적이었다.
뤼디거가 그러거나 말거나, 루카는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내가 이겼으니까.”
“그새 내기를 했어?”
“그냥 단순한 내기였을 뿐이야.”
루카는 태연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얘는 왜 이렇게 내기를 좋아할까.
어휴. 그나마 내기에 강한 걸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나저나 문제는 뤼디거였다.
어떻게 한 번을 못 이기나. 카드게임만 약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정말 이런 건 쥐약이구나. 나는 뤼디거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최대한 루카와 내기 같은 건 하지 말았으면……. 하는 족족 지는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내가 딴생각하는 사이, 루카가 장갑 낀 내 손을 냉큼 낚아챘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갔다.
빈터발트의 화려한 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가 작은 루카가 어떻게 마차에 타는 나를 에스코트하나 싶었다.
루카는 훌쩍 마차의 계단에 먼저 올라탄 채 한쪽 손으론 문틀의 손잡이를 잡고, 다른 쪽 손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작은 손에 몸을 맡기며, 나는 픽 웃었다.
“제법인데? 우리 루카도 다 컸네.”
“정말로 다 컸다고 생각 안 하면서 그런 말 하는 거 나도 알아.”
루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슥 시선을 피했다.
예전엔 어린애 취급을 질색하더니, 이제는 어느 정도 포기한 모양이었다.
뤼디거는 불안스레 내 뒤에서 이리저리 오갔다.
혹여나 내가 미끄러지면 받아 줄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뤼디거를 비웃듯, 루카는 훌륭하게 내 에스코트를 해냈다.
뤼디거까지 마차에 타고,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는 순간부터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맨날 마차 탈 때마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러다가 나중에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되는 거 아닌지 몰라.’
뭐, 차멀미라고 생각하면 큰 문제는 아니다.
나는 애써 좋게 생각하려 했다.
붉게 물들인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나는 입술을 깨물지 않으려 노력했다.
정문을 지나 왕궁에 다다르자, 내 긴장은 극에 달했다. 심장이 얼마나 펄떡이는지, 입을 열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긴장했던 것이 우습게도, 정작 마차가 멈추고 나니 냉수라도 끼얹어진 것처럼 머리가 싸늘히 식었다.
마치 고요한 새벽녘의 호수처럼. 설산 깊은 곳에 있는 나뭇잎의 흔들림처럼.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말과 함께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나를 반긴 것은 고요한 정적과 시선들이었다.
궁으로 들어서려는 이들, 막 마차에서 내리려던 이들 모두가 일시 정지한 것처럼 멈춰 선 채,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만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나와 루카를 보기 위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까.
이 시선을 느끼는 게 나만은 아니었다. 루카가 뤼디거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원래는 왕녀님을 뵐 때까지 내가 계속 에스코트할 생각이었는데, 이번엔 그냥 봐줄게요.”
그리 말하는 루카는 조금 분한 기색이었다.
자신의 에스코트로는 타인의 접근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일 터였다.
아무리 뤼디거가 곁에 있다 하더라도, 그가 에스코트하고 말고의 유무는 컸다.
나도 어지간해서는 그냥 루카의 기를 세워주는 방법을 택했겠지만, 잘못하다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오도 가도 못하게 생겼다.
뤼디거는 의기양양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의 손을 잡고 마차를 나섰다.
왠지 뤼디거를 인간 퇴치제, 혹은 인간 방파제로 써먹는 기분에 양심의 가책이 들었지만…….
양심의 가책이 무색할 정도로 효과는 정말 끝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