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78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78화
당황한 내 반응을 에스코트 제안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페터가 껄껄 웃으며 호쾌히 말했다.
“하하, 혹시나 제가 추근대는 걸까 걱정은 마십시오. 아무리 저라 해도 친구의 여자에게 추근댈 정도로 쓰레기는 아닙니다. 게다가 제 취향은 마이바움 양과는 전혀 다르니까요!”
“이 녀석 취향은 꽃도 못 꺾을 것처럼 착한 외모로, 이기적인 짓을 서슴지 않는 여자죠. 고약하기 짝이 없는 취향이랍니다.”
“뭐가 어째. 남의 취향을 그렇게 폄훼하다니.”
투덕거리는 대화는 듣고만 있어도 꽤 유쾌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황을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영 신경 쓰인단 말이지…….
해명하기 위해선 역시 뤼디거의 도움이 필요하려나. 나는 뒤에 있는 뤼디거를 부르려 돌아 봤다.
커튼에 비스듬히 가려진 위치에 있던 뤼디거는 한참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상대는 딱 보기만 해도 높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때, 내 곁에 있던 루카가 불쑥 끼어들며 물었다.
“누구야?”
“응? 아, 뤼디거 씨의 사관학교 동기분들이야.”
“어라, 웬 아이입니까? 오늘 연회에 어린아이는 참석 못 할 텐데.”
페터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이렇게 밝힐 생각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그, 제 아이인데…….”
페터가 허리를 숙여 루카와 눈을 맞췄다.
루카를 바라보는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루카 또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페터는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굉장히 익숙한 얼굴인데…….”
그제야 페터와 다니엘은 우리 쪽을 향해 계속해서 꽂히는 시선을 인식했다.
조금 더 일찍 눈치를 챈 쪽은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다니엘이 나를 보며 물었다.
“혹시, 레이디. 레이디가 고텔로 백작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페터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버럭 외쳤다.
“뤼디거 빈터발트, 이 미친 새, 읍읍!”
외침이 연회장을 울리기 전, 간발의 차로 다니엘이 페터의 입을 막았다.
입이 막힌 상황에서도 페터는 한참을 읍읍거리며 공분을 토해냈다.
조금 진정된 것처럼 보이고 나서야 다니엘이 페터를 놓아주었다.
페터는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뒤늦게 내 눈치를 보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물론 레이디에게 한 소리는 아닙니다. 그놈이, 아니, 난 당연히…….”
“죄송합니다. 빈터발트 대령이 그리 대하는 여성이 처음이라, 레이디를 뤼디거의 애인이라 착각했습니다. 설마 레이디께서 소문의 아이리스 방의 주인이었을 줄이야…….”
횡설수설하는 페터 대신 다니엘이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한마디로 나를 뤼디거의 애인, 혹은 결혼 상대 정도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리 착각하게 한 데에는 내 태도도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머쓱히 사죄했다.
“착각하게 해서 죄송해요.”
“아뇨, 레이디가 죄송할 일이 아니라……. 그, 실례지만 빈터발트 대령과는 아무 관계도 아닌 거 맞으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백을 받긴 했지만 실제로 아무 관계도 아닌 건 맞으니까.
내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다니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빈터발트 대령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저희야말로 착각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뤼디거 그놈이 행실을 똑바로 안 한 탓입니다!”
이렇게 들으니 정말 뤼디거가 사방팔방 티를 내고 다니긴 한 모양이다.
그러니 루카도 뤼디거라면 눈을 세모꼴로 뜨고 경계했지.
눈치 빠른 루카는 페터와 다니엘의 말만 듣고도 재빨리 정황을 눈치챘다.
“밖에서도 그러고 다녔구만. 뻔하지, 뻔해.”
예, 그러고 다녔습니다…….
엄청 그랬습니다…….
내가 뤼디거의 태도에 익숙해져서 잠시 자각을 못 했는데, 되짚어 생각해 보니 확실히 형의 애인을 소개하는 자리라기보단 자신의 애인을 소개하는 자리체럼 느껴졌다.
페터와 다니엘이 착각한 것도 당연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내가 원작을 몰랐더라면 그의 노골적인 행동을 좀 더 일찍 눈치챘을 텐데.
뭐, 일찍 눈치챘다 해서 바뀌는 일은 없었을 테니 의미 없는 일일 테지만…….
그나저나 이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 요나스의 여자인 채로 뤼디거와 사귀거나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같았다.
‘그래. 역시 미친 일이라니까? 무슨 형사취수제도 아니고……. 뤼디거가 하도 당당해서 귀족들 사이에선 흔하게 벌어지는 일인가 싶었지 뭐야.’
하지만 이들이 이런 반응인 걸 보니, 역시 요나스의 여자인 채로 뤼디거와 이어지는 것이 얼마나 경우 없는 일인지는 똑똑히 알 것 같았다.
뤼디거는 도대체 어쩔 생각인지…….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일이 끝나고 그에 대해 뤼디거에게 한번 제대로 말을 해봐야겠다 싶었다.
그때, 말을 마친 뤼디거가 바로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며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지?”
“야, 뤼디거! 너 정말…….”
패터가 발끈했다.
뤼디거를 보기가 무섭게 간신히 잦아들었던 분기가 탱천한 모양이다.
패터는 애써 이를 악문 채, 심각하게 뤼디거를 불렀다.
“좋아, 빈터발트 대령. 잠깐 저 쪽에서 말 좀 하지.”
“나는 유디트 씨 곁을 지켜야 한다만. 할 말이 있으면 여기서 하거나, 그냥 입을 다물고 있지.”
뤼디거는 꿈쩍도 안 할 기세였다.
시선만 내리깐 채 서늘한 눈빛으로 페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들끓었던 페터의 기도 죽었다.
페터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에 들리지 않게 나직이 속삭였다.
“너 설마 진심으로 마이바움 양에게 마음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작게 죽인 목소리는 주변의 소란스러움에 묻혔지만 가까이 있는 나에게 훤히 들렸다.
저기, 그런 걸 제 앞에서 말하지 말아주실래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하니까!
뤼디거는 아까보다도 더 시린 낯으로 정색한 채 되물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아, 이 자식 이렇게 대답하는 걸 보니 맞네, 맞아.”
와, 친구는 친구인가 보다. 저걸 찰떡같이 알아듣네.
당당하기 그지없는 뤼디거의 반응에 질렸는지, 페터가 작게 중얼거렸다.
“도덕도, 상식도, 남 눈치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점만큼은 동감입니다.
페터와 다니엘은 그래도 금방 표정을 수습했다.
여기서 왈가왈부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바로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빈터발트 대령, 아까 자네 사촌과 마주쳤네.”
“사촌?”
“그 흐리멍덩한 놈. 프란츠랬나.”
페터의 표현에서 그가 프란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느껴졌다. 동감이 하나 더 늘었네.
그나저나 프란츠가 있다니, 확실히 오늘 일이 벌어지는 게 맞긴 한 모양이다.
확신을 얻게 된 내 입 끝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때마침 시종이 나팔을 불었다. 시끄럽던 연회장이 물을 끼얹은 듯 일순 정적으로 휩싸였다.
나팔을 분 시종은 거드름을 피우며 턱 끝을 치켜들고 배를 내밀며 제 주인의 입장을 알렸다.
“럼가트의 태양, 평원의 주인, 패트릭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왕이 들어섰다.
모두 왕에게 예의를 갖추며 무릎을 꿇었다.
“모두 고개를 들라.”
왕의 허락에 그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모두가 묵묵히 자리에 앉은 채 왕을 우러러보았다.
“루카 빈터발트는 앞으로 나오라.”
호명이 되기가 무섭게 내 옆에 있던 루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라진 인파 사이로 루카가 걸어 나갔다. 모두의 시선이 루카에게 쏠렸다.
내 심장이 다 쿵쿵 뛰었다.
소프트볼 대회 결승전 때도, 대학 졸업하기 전 꼭 좋은 점수를 따야 했던 조별 과제 발표 때도 이만큼 긴장하진 않았으리라.
내가 이 정도인데 시선을 받는 당사자인 루카는 얼마나 긴장될까.
실제로 원작에서는 루카가 이 자리에서 긴장으로 비틀거리다 실수로 넘어지는 장면이 있었다.
그 때문에 그 뒤로도 계속해서 실수 연발, 말을 몇 번이나 더듬었다.
물론 왕은 어린 루카의 실수를 질책할 정도로 속이 좁은 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처음 만난 어린 조카 손자가 아니던가.
왕은 너그러이 루카를 다독였지만, 루카는 자신의 실수에 무척이나 속상해했다.
더군다나 내가 실제로 곁에서 느낀 루카는 소설로 읽었을 때보다 더욱 자존심이 높은 아이였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루카가 실수하지 않길 빌었다.
그런 내 걱정이 우습게, 루카는 당당히 걸어 나섰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꼿꼿이 선 몸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루카는 무사히 왕의 앞에 다다랐다.
“루카 빈터발트, 태양의 부르심에 대령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껏 인사만 했다 해도 믿을 정도로, 누구도 흠집 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