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80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80화
네?
갑자기 왜 화살이 저에게로 향했죠?
왕을 비롯해 말리나도, 죠세핀도, 모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빅토리아를 보았다.
빅토리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비리비리하고 쪼잔한 남자를 만나느니 빈터발트 대령이 훨씬 낫지. 아바마마께서 죠세핀을 붙여주려 할 정도니, 품질은 보증함세.”
품질을 보증하느니 뭐니, 빅토리아는 무슨 사람을 종마처럼 평가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평을 받는 당사자인 뤼디거는 표정이 온건했다.
되레 나를 바라보며, 어딘지 모르게 뿌듯한 눈길을 보냈다.
당황한 왕이 빅토리아를 질책했다.
“뭔 소리냐, 빅토리아. 뤼디거는 요나스의 형제가 아니냐. 어떻게 형의 여자와…….”
“아바마마도 참 고루하십니다. 결혼이 뭐 별거입니까. 결국 필요에 따라 하는 거죠. 어차피 피도 안 통한 관계 아닙니까.”
가벼이 어깨를 으쓱이는 빅토리아 말은 거침없었다.
빅토리아의 등장으로 왕가의 가풍이 어떠한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왕은 끙, 혀를 차며 빅토리아를 타일렀다.
“그래도 세간의 상식에 어긋나는 일 아니냐.”
“아버지의 말씀대로라면 요나스의 동생인 뤼디거도 우리 사촌이나 다름없는데, 그런 이와 죠세핀을 짝지어주려 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에 비하면 십여 년 전에 하룻밤만을 보낸 남자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요. 솔직히 어느 쪽이 더 괴상하게 느껴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아주 입만 살았구나!”
왕이 탄식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빅토리아가 은연중 죠세핀과 뤼디거의 결혼을 비꼬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그에 내가 이용된 것 같아 기분이 좀 그렇긴 하지만…….
뭐, 빅토리아가 뤼디거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가 되니 피장파장이다. 나는 작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다 하여 뤼디거를 나와 엮으려는 의도가 마냥 거짓은 아닌지, 빅토리아는 자못 진지하게 나에게 덧붙였다.
“아바마마처럼 호사가들이 이리 이러쿵저러쿵 잔소리할 수는 있겠다마는, 그쯤은 귓등으로 흘려 넘겨야 미남을 쟁취할 수 있는 법이네.”
“아이고. 내가 빅토리아, 너와 이야기만 하면 수명이 팍팍 주는 것 같구나. 마이바움 양, 이 아이의 농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게.”
왕이 손사래를 치며 빅토리아의 말을 애써 덮으려 했다.
그는 빅토리아가 농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기요, 따님 눈빛은 완전 진심이었는데요…….
아니, 어쩌면 왕도 빅토리아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빅토리아. 어느 정도 방종한 것도 좋다만, 너도 왕국의 제1왕녀로서의 체면을 지키도록 하여라.”
“예, 아바마마.”
빅토리아는 그제야 사정없이 놀리던 혀를 멈추고 고분고분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던 중, 빅토리아의 짙은 호박색 눈동자가 뤼디거 쪽을 흘끔거렸다. 뤼디거 또한 마주 끄덕였다.
우연이라 치부할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타인이었다면 가벼운 눈인사라고 생각하고 넘겼을 터였다.
하지만 그 눈인사를 나누는 이들이 뤼디거와 빅토리아여서야.
뤼디거는 물론이거니와, 빅토리아 또한 사사로이 눈인사를 나눌 만큼 다정다감한 성격들은 아니었다.
그래. 눈인사라기보단 마치 거래를 끝낸 듯이…….
‘둘이 뭔가 따로 거래한 게 있나? 아무리 봐도 짜고 치는 거 같은데. 그래. 빅토리아가 난데없이 나한테 재혼 운운한 것도 이상하단 말이지.’
나는 이제 막 수도의 사교계에 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상식적으로 요나스의 여자라는 위치를 이용하는 게 이득이었다.
한마디로, 재혼 운운하며 요나스의 굴레를 벗어던지기엔 시기상조였다.
물론 나로선 되도록 하루빨리 요나스와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뤼디거를 바라보았다.
그런 내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뤼디거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나. 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가 기가 찬 한숨을 뱉는 사이, 왕은 조금 지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난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겠구나.”
“벌써요, 아바마마?”
“나이가 차서 그런지, 일찍 피곤해진단 말이지.”
마냥 나이 때문은 아닌 것 같았지만…….
왕의 기력을 쪽쪽 빼먹은 당사자인 빅토리아 왕녀는 왕이 지쳤다는데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되레 왕의 이른 퇴장을 자신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기회로 삼으려는 듯 재빨리 말했다.
“일찍 들어가서 쉬세요. 연회는 제가 남아 있을게요.”
“그럼 제가 보필할게요.”
반면 착한 딸인 죠세핀은 왕의 곁에 다가서며 걱정스레 눈썹을 늘어트렸다.
하지만 왕은 고개를 내저었다.
“되었다. 죠세핀 너는 좀 더 연회를 즐기려무나. 젊은 애가 연회를 일찍 뜨는 것도 좋지 않아.”
“하지만.”
죠세핀과 왕은 작게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는 사이 나는 초조해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에서 한 여인이 왕,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사들의 당황이 파도를 타고 넘실넘실 우리가 있는 곳까지 흘러왔다.
웅성거리는 소란에 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무슨 소란인가?”
“흑, 흐흑. 흑, 너,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자 소란의 근원이 눈에 띄었다. 한 여인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고 있었다.
반짝이는 금발은 가련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푸른 눈은 눈물에 젖은 채 글썽거렸다. 딱 봐도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왕이 주최한 연회에서 소란을 피워 분위기를 망치다니.
왕의 체면에 물을 끼얹는 일이니만큼, 아무리 왕이 무골호인이라 하여도 분노할 만한 일이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왕이 여인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고, 도대체 무엇이 그리도 억울하기에 경사에 찬물을 끼얹느냐?”
“흑……. 전하, 저는 이사벨라 앤더슨이라 합니다. 부끄럽지만, 젊은 날의 실수로 인해 결혼하지 않은 몸으로 애를 가져 키우고 있습니다.”
그녀가 바로 이사벨라 앤더슨, 요나스의 여인으로 가장한 프란츠의 내연녀였다.
원작 그대로의 등장이었다.
그녀의 구슬픈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렸고, 난데없는 상황에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들 앤더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느냐 수군거렸다.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저 평범한 평민 가문이니까.
“설마……. 평민 아닙니까?”
“평민이 어떻게 오늘 연회에? 백작가인 저희 집안도 오늘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얼마나 동분서주했는데……!”
“사생아가 있는 걸 부끄럼도 없이 밝히는 걸 보아하니, 누군가의 정부 아니에요?”
“꽤 한 가닥 하는 이의 정부인가 보네요. 오늘 연회에 참석할 정도면.”
사실과 아주 다르지는 않았다.
내연남인 프란츠의 뒷배가 아니었으면 못 들어왔을 테니까.
‘그나저나 프란츠는 아직 작위를 물려받지도 않았는데 제법 여기저기 영향력을 끼친단 말이지…….’
그러니 훗날 버켄레이스 가문을 물려받고 나서는 아주 제 세상처럼 날뛰지.
나는 나직이 혀를 찼다.
당황한 것은 귀족들만이 아니었다.
왕 또한 어처구니없어하며 이사벨라를 질책했다.
“그것이 뭐가 그리도 억울한가? 혹여 루카 빈터발트와 달리, 자네의 아이는 사생아로서 고통 받기 때문인가? 하지만 루카 빈터발트가 운이 좋았을 뿐이지, 네 아이의 고통은 온전히 네 미숙한 선택 탓이다.”
엄격한 왕의 말에 이사벨라는 눈물을 뚝뚝 흘려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나조차도 측은지심이 절로 들 정도였다.
‘이야……. 배우로 전직했다면 극장의 프리마돈나가 됐을지도 모르겠는 걸……. 지금 자기 재능을 잘못 쓰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작게 혀를 내둘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사벨라는 제 연기에 취한 듯 몸을 들썩이며 세상 서럽게 울었다.
그녀의 두 뺨이 눈물로 흥건했다.
“저도 제 행실의 부덕함을 잘 압니다. 하지만 저 아이만 인정받는 것을 도저히 못 보겠습니다. 억울합니다!”
“그리 억울하다고 말하는 네 아이의 부친이 도대체 누구더냐?”
드디어 왕에게서 이사벨라가 기다리고 있던 말이 떨어졌다.
나는 이사벨라의 푸른 눈동자에 찰나의 빛이 스치는 걸 놓치지 않았다.
바싹 마른입을 잠시 축인 이사벨라는 이내 또박또박,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제 아이의 부친은…… 바로 요나스 빈터발트입니다.”
이사벨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연회장이 웅성웅성 소란으로 가득 찼다.
“뭐? 요나스 빈터발트란 말이야?”
“그러면 요나스 빈터발트에게 아이가 하나 더 있다고?”
“오늘 데뷔한 루카 빈터발트는 어떻게 되는 거야?”
“하긴, 그렇게 놀아재꼈는데 사생아가 하나뿐인 것도 우습지.”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이사벨라와 나, 그리고 루카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 지금 이 사건은 그저 흥미로운 가십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나야 미리 알고 있었다지만 루카는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