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82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82화
이사벨라의 얼굴이 설마 하는 듯 새하얗게 질렸다.
그런 기록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 같았다.
당연했다.
나도 처음엔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곳엔, 가을에 별다른 방문자가 없다고 적혀 있었어요. 끽해야 요나스의 친우인 신사분들 정도? 아, 물론 잡상인 몇에 관한 기록이 있긴 했죠. 하지만 이상해라. 요나스의 애인이라 주장한 잡상인에 관한 내용은 없던걸요.”
“거, 거짓말 말아요.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요?”
“의심스러우면 당장 빈터발트 가로 사람을 보내 보고서를 가져오라 할까요? 전 자신만만해요.”
내가 뭐 때문에 그 많은 보고서의 내용을 달달 외웠는데.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다.
물론 굳이 외우지 않고 조금의 블러핑으로 허세를 부렸어도 되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하는 것에는 이사벨라를 논파하는 것만이 아니라, 귀족들을 설득하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가문의 후계에 관한 문제이니만큼, 흠잡힐 구석은 조금이라도 없어야 했다.
내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자 이사벨라는 주춤거리며 발을 뺐다.
“가, 가을이 아닐지도 몰라요. 겨울이었을 수도…….”
“음…… 말이 자꾸 바뀌네요.”
“…….”
이사벨라의 손이 치마를 꽉 그러쥐었다.
그녀 또한 자신의 변명이 곤궁했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머리가 빠져나갈 곳을 찾기 위해 맹렬히 돌아가는 것이 훤히 보였다.
솔직히 나라 해서 사람을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게 기꺼울 리 없다.
평소 하지 않던 짓을 한 탓일까. 입은 연습한 대로 술술 움직이고 있었지만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만약 이사벨라가 프란츠에게 이용당할 뿐인, 진짜 요나스의 여인이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그때도 과연 루카를 위해 이렇게 잔인하게 굴 수 있었을까.
나는 작게 웃었다. 내가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이런 순간에 부질없는 생각에나 빠져 있고.
나는 원작의 묘사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이사벨라가 빼낸 정보로 뤼디거와 루카를 기습한 프란츠. 죽게 된 뤼디거.
그리고 죽은 척하기 위해 빈민굴을 떠돌던 루카.
이번에도 그렇게 둘 수는 없다.
항상 착하게 살 수만은 없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독해져야 할 때도 있는 거야.
마음을 단단히 다잡은 나는 더욱 매몰차게 그녀를 몰아갔다.
“문지기에게 시계를 보여줬다 했죠? 그것도 참 이상하네요. 빈터발트의 문지기가 바네사 왕녀님의 시계를 몰라본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때 뤼디거가 끼어들었다.
단호히 부정하는 그의 눈빛이 시리게 빛났다.
“저 또한 그 회중시계를 잘 압니다. 회중시계의 겉은 왕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고, 안에 바네사 왕녀님의 옆모습이 부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회중시계를 몰라볼 만큼 빈터발트의 문지기 교육이 안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집사에게는 보고가 들어갔을 겁니다. 저 여자의 주장은 빈터발트에 대한 모욕입니다.”
문지기는 저택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손님을 맞는 상대이니만큼, 가문의 품격을 상징한다.
한마디로, 이사벨라는 빈터발트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재미 삼아 흥미를 가졌던 귀족들도 돌아가는 꼴이 단순한 가십을 넘어서자 점점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귀족은 자신이 평민을 속이는 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면서, 평민이 자신들을 속이려 한 것에는 무척 분개하는 이들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눈총에 둘러싸인 이사벨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하지만 그대로 침몰할 수는 없는 법.
그녀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제가 거, 거짓말을 했어요. 사실은 따로 요나스를 만났어요. 하지만 그사이 그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서……. 그에게 거부당한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는 게 부끄러워서 그만 타운하우스에 갔다는 거짓말을 한 거예요.”
용케도 잘 빠져나갔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점점 개미 지옥으로 빠져들어 갈 뿐이다.
거짓말을 피해 거짓말을 해보았자, 점점 진실에서 멀어질 뿐이다. 틈도 더 많이 보이고.
그리고 그 틈을 비집어 벌려 본인의 입으로 진실을 털어놓게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뭐, 좋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러면 요나스와 만나서 애가 있다는 사실을 밝힌 거예요?”
이사벨라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그녀의 실수를 유도하려 하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사실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하긴 하지. 대놓고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데.
하지만 상관없다. 그녀가 입 다물고 회피하고 싶다 하여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이사벨라는 연회에서, 왕에게 청원한 시점에서 이렇게 되리라는 걸 짐작했어야 했다.
이 판의 장점이자 단점은, 한 번 벌인 이상 절대 제멋대로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이니까.
더불어 그만큼 파급력도 컸고.
나는 빙글 웃으며 이사벨라를 재촉했다.
“그냥 사실대로 말씀 주시면 돼요. 사실이니까, 거리낄 게 없잖아요.”
이사벨라는 나를 노려보았다.
미인인 그녀의 표독스러운 눈길이 나를 흉흉히 찔렀다.
하지만 여기선 대답하지 않으면 이사벨라는 완전히 몰려버린다.
어떻게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였다.
한참의 침묵 끝에,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는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던 저에게, 그 회중시계를 팔아 얻은 돈으로 낙태하라 했죠. 하지만 전 차마 그럴 수가 없어…….”
“회중시계를 팔지 않고 애를 낳았다?”
“……네. 제가 애를 낳았다는 걸 요나스에게 들킬까 봐 지금 껏 쥐 죽은 듯 산 거였고요.”
“그랬는데 갑자기 요나스의 또 다른 사생아가 나타나 빈터발트 공작가를 잇게 되니 무척 억울했겠어요.”
“당연하죠! 내 아이도 요나스의 아이인데, 어째서 저 아이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잘못된 건가요?”
내가 조금의 공감 어린 말을 던져주자, 이사벨라는 바로 그걸 낚아챘다.
한껏 연기에 취한 그녀는 다시 한 번 눈물을 뚝뚝 흘려냈다.
눈물을 흘리는 게 저렇게 쉽게 되는 거야? 정말 천직을 잘못 찾은 듯한데…….
그녀에게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조차도 움찔하게 될 만큼의 기백이 있었다.
좀 더 좋은 관계로 만났더라면 진심으로 배우를 권해봤을 거다. 나는 작게 혀를 찼다.
“당신이 저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는 것도 이해해요. 당신으로선 제가 갑자기 나타난 장애물처럼 보이겠죠.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이사벨라는 한껏 처량한 척하며 원망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타까운지, 몇몇 이들은 나직한 탄식을 흘렸다.
연기에 물이 오른 이사벨라는 주변 분위기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뒤바꾸었다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나를 향해 칼을 빼 들었다.
“십 년 전의 일을 제가 기억 못 할 수도 있죠. 그럼 당신은 십 년 전의 일을 그리도 잘 기억할 수 있나요?”
“저도 잘 기억 못 해요.”
“그러면서……!”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지, 당신처럼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진 않아요.”
“저택에 찾아간 건 그저……!”
“아뇨, 그거 말고요.”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툭 하니 물었다.
“요나스를 만났다는 것도 거짓말이죠?”
“네?”
내가 대놓고 그리 물을 줄 몰랐다는 듯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사벨라는 도대체 내가 뭘 믿고 이리도 그녀의 부정을 뻔뻔스레 주장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 해서 내가 믿는 건 바로 내가 읽었던 소설이라 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소설에서 읽은 정보를, 내가 일찍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말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요나스의 성격이라면 더더욱.
“애초에 요나스가 당신에게 회중시계를 준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만, 좋아요. 한때 그가 당신에게 눈이 멀었다고 하자고요. 그런데 그런 회중시계를 건넬 만큼 사랑한 여자가 임신했다면서 찾아왔는데 내쫓는다?”
“그, 그럴 수도 있죠. 원체 변덕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임신했다며 그를 찾아갔을 때, 그가 그 정도로 정이 떨어졌다면 분명 그 회중시계를 회수했을 거예요. 돈을 싸 안겨서라도요. 그 시계를 팔라는 소리를 할 리가 없어요.”
“그런.”
이사벨라는 망연자실했다.
아무리 프란츠가 요나스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했더라도, 이사벨라가 나만큼 요나스를 잘 알진 못할 것이다.
적어도 요나스를 직접 만나보지 못한 여자 중에선 내가 그를 제일 잘 알았다.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요나스는 바네사를 그렇게 중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애초에 애인을 데리고 아이리스의 방에서 거사를 치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부터가 모친에 대한 존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스트였고, 바네사 또한 자신의 혈통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바네사의 가치가 한때 사귀던 평민 여자보다 낮지는 않았다.
바네사의 물건은 전부 그의 혈통과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었고, 요나스는 그것을 엄청나게 중요시했다.
한마디로, 그는 왕가의 물건이 한낱 평민 여자의 손에 머무는 것을 무척이나 끔찍해 할 만한 사내였다.
“요나스의 다른 애인들은 다들 이해할 텐데요, 제 말을. 당신만 이해 못 한다는 건……. 당신이 만난 게 요나스가 아니라는 말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