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84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84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귓가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소용돌이치듯 휘몰아쳤다.
내가 이사벨라를 몰아갔을 때 그녀 또한 이런 압박감을 느꼈던 것일까.
이렇게까지 인스턴트적인 공감 상황은 필요 없는데. 나는 나직이 혀를 찼다.
“게다가 어린아이인 루카에게 엄마라 하라며 거짓말까지 시키다니. 하물며 당신은 루카 빈터발트를 학대하지 않았습니까? 엠덴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더군요. 낯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어쩐지, 독하게 생겨서…….”
“저렇게 어린아이를……. 안쓰러워라.”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과거의 유디트가 루카에게 저지른 짓은 학대가 맞았지만…….
그게 이렇게 되돌아올 줄은 몰랐네.
나는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나 갈지 머리를 굴렸다.
지금껏 내가 해온 일들의 업보인가…….
아니, 그게 굳이 지금 벌어지는 건 너무하잖아.
나를 엿 먹이기 너무나도 좋은 시점이었다. 누군가의 개입이 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내 시선 끝에 프란츠가 보였다. 그는 언제나와 같은 선량한 낯으로 빙긋 미소 지은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당혹스러움도 없이, 그저 곤혹스러워 하는 내 모습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이 판을 이렇게 짜놓은 게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나에 대해 알아보라 로이텐을 찌른 건 바로 프란츠 버켄레이스, 저 작자가 틀림없다.
한마디로 로이텐은 프란츠의 바람잡이였다.
어쩐지. 우연찮게 내 약점을 잡았다면 보통 뒤로 접선하여 제 잇속을 챙기지, 이렇게 대놓고 공론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 저들 장단에 휘둘릴 수는 없지. 이를 악문 나는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나서기 전, 루카가 새치기하듯 먼저 뛰어나갔다.
“엠덴의 누가 그리 말하던가요, 그린할텐 경? 잘난 듯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는데, 당신이야말로 당신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요?”
나를 지키려는 듯 내 앞에 선 루카의 작은 등에 괜히 눈이 핑 돌았다.
아직 작은 아이였지만 기세만큼은 어지간한 성인 남자 못지 않았다.
루카의 기세에 밀린 로이텐은 저도 모르게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지, 그는 이내 자신만만히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빈터발트의 작은 후계자님. 전하, 증인이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 또한 부디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허하노라.”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이텐이 손짓했다.
주저하던 시종들이 연회장 밖으로 나가더니, 한 사내를 데려왔다.
제법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어깨를 잔뜩 구긴 채 시종일관 주변의 눈치를 보는 것이 무척 초라해 보였다.
사내는 귀족답게 차려입었다.
하지만 얼굴에 흐르는 땟국물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익숙한 얼굴이다.
빚다 만 반죽 같다고 놀렸던 그 얼굴은 이제 오븐 속에 너무 오랫동안 있던 빵처럼 시커멓게 질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슬며시 열린 내 입술이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마이바움 양께서도 이자를 잘 아실 겁니다.”
“…….”
로이텐이 데려온 것은 바로 토마스였다.
나에게 치근대던, 내가 뤼디거와 함께 엠덴을 떠날 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굴었던 그 토마스.
“이자는 엠덴 마을의 토마스라는 평민입니다. 유디트 마이바움 양과 꽤 오랜 시간 교제해 왔죠.”
뭐?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로이텐의 말은 마치 내가 토마스랑 사귄 것처럼 들렸다.
아하, 그런 식으로 내 행실을 문제 삼겠다?
나는 바로 도끼눈을 뜬 채 그에게 따졌다.
“발언 똑바로 해주시죠. 그는 제 이웃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같은 마을에서 함께 자라온 친구였을 뿐입니다.”
“뭐…… 당신이 그리 주장하신다면.”
로이텐은 어깨를 으쓱였다.
일부러 비꼬는 듯한 말투는 내 주장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다.
“이 개…….”
발끈한 루카가 욕과 함께 뛰쳐 나가려고 했지만 나는 루카를 낚아챘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건 없다.
토마스는 불안해하며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그의 낯만 봐도 그가 여기에 원해서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걸 잘 알 것 같았다.
뻔했다. 그린할텐 백작가는 엠덴의 영주였다.
영지민인 토마스로서는 그의 명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로이텐은 거들먹거리며 명령했다.
“토마스는 답하라. 유디트 마이바움과 루카 빈터발트는 어떤 사이였지?”
“……어, 그게…….”
“어허. 뭘 그리 주저하느냐. 빈터발트 대령이 너에게 해코지할까 신경 쓰여 그러는 것이냐? 여기는 폐하의 앞이다. 되레 거짓 진술을 하는 것이 더 큰 죄가 된다.”
로이텐은 은근슬쩍 뤼디거를 끼워 넣었다.
아마 프란츠의 사주를 받고 뤼디거를 견제하기 위함으로 추측되었다.
점점 가관으로 치달아가는 상황에 뤼디거가 끼어들려는 듯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뤼디거를 막았다.
여기서 그가 나를 비호하고 변명해 봤자 일만 더 복잡해질 뿐이었다.
뤼디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토마스는 한참을 말을 않고 어물거렸다.
기다리다 못한 로이텐이 짜증스레 그를 재촉했다.
“내가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라 했나? 그저 사실만을 말하라, 이 말 아닌가.”
“……라리사가 죽고 유디트가 홀로 루카를 키웠습니다. 두 사람의 사이는 뭐……. 썩 다정다감하진 않았지만, 원체 사는 게 팍팍하니…….”
“팍팍한 현실에 언니의 애까지 키워야 하니 진절머리가 났겠지. 그래서 루카를 학대한 모양이로군?”
“아니, 학대까지는 아니고……. 그냥 자주 혼을 낸…….”
확대 해석하는 로이텐의 반응에 토마스는 내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변명했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라는 것을 나 또한 알았다.
졸지에 아동 학대범이 되어버린 나를 향해 사람들은 적의를 보였다.
보다 못한 루카가 다시 한 번 나를 두둔하며 나섰다.
“자꾸 이상한 쪽으로 몰아가려고 하는데, 그 저열한 속셈을 모를 줄 알아?”
“저런, 가엾어라. 완전히 세뇌 된 모양이에요.”
“빈터발트 대령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요?”
하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한 번 잠식한 여론을 되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군대는 사람들 사이로, 로이텐은 빙긋 웃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유디트 마이바움 당신은 죽은 언니 대신 조카를 팔아 공작가에서 호의호식하려 한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계속 부정해? 아니면 슬슬 사실을 밝혀?
사실을 밝히면 그 사실은 어떻게 조각난 채 받아들여질까?
내가 입술만을 달싹이고 있는 도중, 프란츠와 로이텐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프란츠는 나를 향해 입을 벙긋했다.
그의 입 모양만으로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의미가 분명했다.
‘제 청혼을 받아주시지요. 그러면 이 모든 걸 없던 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개소리!
말로는 나를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제 잇속 챙기려는 일이었다.
그걸 나에게 은혜라도 베푸는 듯 구는 게 재수 없고 역겨웠다.
어차피 이사벨라라는 수가 허사가 됐고, 그녀에 이어 나까지 진짜 요나스의 여자가 아니었다는 결과가 나와버리면 빈터발트 측에서는 앞으로 그 누구도 들이지 않을 게 뻔했다.
어차피 루카가 요나스의 자식인 건 확실하니까.
빈터발트의 정보를 빼돌릴 다른 사람이 필요한 프란츠로서는 그런 상황이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프란츠로서도 내가 루카의 이모라는 걸 밝히는 이번 일은 제법 강수였다.
‘이렇게라도 해서 나를 회유하겠다?’
하지만 차라리 왕족 기만죄로 감옥에 가고 말지, 프란츠가 바라는 대로 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궁지에 몰린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증인까지 데려온 터라 마냥 부정하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그래.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다.
일단 이사벨라를 쳐냈으니 큰 불은 껐기도 하고.
지금까지야 프란츠가 대놓고 수작을 부리지 않아 그의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움직였으니 뤼디거 또한 이 모든 음모의 원흉이 프란츠라는 걸 금방 눈치 챌 것이다.
그것 또한 원작과 다른 점이다.
이 정도면 본디 목적은 달성했다.
비록 내 미래는 풍랑 치는 파도 위 조각배처럼 떠밀렸지만.
뭐, 원작대로라면 결국 프란츠에게 이용당하다 죽는 처지인데. 그에 비하면 감옥행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루카와 뤼디거가 사식은 잘 넣어주지 않을까?
나는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각오를 다졌다.
좋아. 마음의 준비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턱 끝을 치켜들고 당당히 말했다.
“맞아요. 저는 뷜로 백작과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에요. 전 루카의 이모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