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8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86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나는 뻣뻣이 굳었다.
시골구석에서 여생을 보낸 할머니와 선왕이 무슨 관계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설마 할머니가 선왕의 전 애인이었다거나…….
유난히 들뜬 듯 들리는 목소리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법했다.
아니면 선왕이 사람을 착각하고 있다든가.
선왕은 내가 어안이 벙벙한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기쁨에 취한 목소리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쩐지, 딱 봤을 때 알아봤다. 그레타와 쏙 빼닮았으니 어찌 몰라 봤겠느냐.”
물론 유디트는 할머니를 꽤 닮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유디트의 콤플렉스였고.
왜냐면 마이바움 가의 모든 미모 유전자는 바로 할아버지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라리사의 화사한 외모와 비교하며 베갯잇을 얼마나 눈물로 적셨는가!
그랬던 외모가 이런 식으로 신분 증명하는 데 이용될 줄이야. 생각도 못 한 일에 나는 눈만 깜빡였다.
“철없는 말괄량이였을 때 얼굴만 반반한 놈에게 홀라당 빠져 왕궁을 나가더니, 그 뒤로 소식도 없고 말이야…….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연고가 닿지 않아 모르고 있었는데, 네가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났구나.”
얼굴만 멀끔한 놈이라면 할아버지를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정황상 선왕이 말하는 그레타가 우리 할머니가 맞는 거 같기는 했다.
그래서…… 내 할머니가 누군데?
선왕의 전 애인이라도 되나 싶었는데, 선왕이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애인이라기보다는…….
결국, 궁금증을 참다못한 내가 운을 떼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전하. 저희 할머니와는 무슨 관계이신지…….”
선왕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레타가 말을 안 했나 보구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레타는 바로 내 누이, 마가렛 럼가트 왕녀란다.”
“네?!”
선왕이 태연스레 꺼낸 말은 어마어마한 진실을 품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 높여 외치며 펄쩍 뛰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저 여자가 마가렛 왕녀님의 손녀라고?”
“마가렛 왕녀님이라니……. 그럼, 마가렛 왕녀님이 가출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이야?”
“마가렛 왕녀님이 누군가? 나는 처음 듣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왕국의 연회장이 마치 도떼기 시장처럼 변했다.
루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린 채 어안이 벙벙해 있었고, 뤼디거 또한 폭풍처럼 돌변하는 상황이 당혹스러운지 미간에 주름이 하나가 있었다.
모두의 경악 속에서 나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왕녀였다고? 그것도 집, 아니, 궁 나간?
선왕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할아버지랑 사랑의 도피라도 한 거 같은데……. 도대체 왜?
아무리 마이바움 가가 몰락한 것이 아버지의 도박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지 않는가.
애초에 할아버지가 가진 게 없으니 그 정도로 단숨에 쇠락한 것이었다.
돈도 없어, 작위도 끽해야 자작이야.
할머니는 도대체 할아버지의 뭘 보고 왕궁을 박차고 나선 걸까?
하지만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얼굴……. 역시 얼굴 때문이었겠지. 얼굴만 뜯어먹어도 삼십……. 아니, 오십 년은 행복할 만한 미모였으니까.’
나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할아버지와 알콩달콩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철없던 시절의 치기였을 거라는 선왕의 생각과 달리, 할머니는 궁을 나선 것에 대해 조금의 후회도 없을 게 분명했다.
모두에게 충격을 준 선왕은 홀로 감격에 겨워 있었다.
가늘게 뜬 호박빛 눈동자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추억에 젖어 있었다.
“그레타는 내가 마가렛에게 붙여준 애칭이지……. 가문도, 이름도 모든 걸 버리고 떠나갔지만 내가 붙여준 애칭만큼은 가져간 모양이로구나.”
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나도 눈치가 있지,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좋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았다.
“……어쩐지. 마이바움 양이 누군가를 많이 닮았다 했더니, 그게 바로 마가렛 고모님이었군요.”
왕 또한 놀란 듯 말을 받았다.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뜻밖의 가족 상봉으로 인해 왕가 사람들이 화기애애하니, 주변 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치를 보았다.
선왕은 괴팍하다는 평이 거짓말인 것처럼 종일 싱글벙글했다.
선왕은 웃는 낯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래서, 방금까지 무슨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냐?”
“그, 그것이…….”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누가 먼저 운을 뗄 것인가 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만약 나에게 죄가 있다면 왕족 기만죄였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왕가의 핏줄을 이었다는 사실이 변수가 되었다.
왜냐면 왕족 내의 문제는 왕족법으로 처리되기 때문이었다.
반역과 같이 큰 문제라거나 대놓고 왕을 폄훼한 것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의 문제는 가족 문제 정도로 퉁쳐져 흐지부지되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프란츠의 속셈과 로이텐의 의도는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로이텐에게 남은 것은 뤼디거의 결투 신청뿐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건 당사자였다.
로이텐의 얼굴이 죽은 물고기의 허옇게 드러난 배처럼 하얗게 질렸다.
나야 갑자기 떨어진 행운에 횡재일 뿐이지만, 로이텐 입장에서는 다 된 밥에 재 뿌리기를 넘어 목숨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선왕은 그런 로이텐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를 지목하며 물었다.
“그래, 거기 자네. 아까 보아하니 바닥을 기며 무언가 간청하고 있던데.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느냐?”
무엇 때문이었느냐 묻고는 있지만, 얼굴은 전혀 궁금한 기색이 아니었다.
되레 전혀 관심 없는 듯 심드렁할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등장할 때부터 재판장으로 가라느니 뭐라느니 했으니까.
선왕쯤 되면 연회장에서의 소란 정도는 충분히 보고받을 만한 눈과 귀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잠깐…….
설마 진작 등장할 수 있었는데, 지금껏 인상 깊게 등장할 만한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건 아니지?
선왕을 바라보는 내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기가 무섭게 내 시선을 느낀 선왕이 나와 마주 보며 잘했냐는 듯 빙긋 웃었다.
선왕의 질문에 차마 대답하지 못한 로이텐이 입술만 달싹이고 있을 때, 거침없이 나서는 이가 있었다.
당연지사, 침묵의 압박감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는 뤼디거였다.
“저자가 유디트 마이바움 양을 모욕하였습니다.”
뤼디거는 당당히 말했다.
그 전에 루카의 엄마로 사기 쳤던 것으로 왈가왈부했던 내용은 싹 뺀 채였다.
이렇게까지 약삭빠른 남자였나.
하긴 클럽의 내깃돈을 빼돌리는 걸 보면…….
그래도 놀랍긴 놀라웠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뤼디거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뤼디거는 깨알 같은 자기 어필까지 잊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그린할텐 경에게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그린할텐 경은 아직 결투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은 상태고 말입니다.”
로이텐을 바라보는 뤼디거의 눈길에선 어떻게든 로이텐을 처리하겠다는 의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하! 소인배로구나! 입을 가벼이 놀릴 때는 그에 대한 대가도 생각했었어야지. 그래, 기특한 청년. 경은 어느 가문의 누구인가?”
로이텐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선왕은 손바닥 뒤집듯 뤼디거에게 호의가 가득한 시선을 보였다.
뤼디거는 군대식 절도 있는 경례를 올리며 답했다.
“빈터발트 가의 뤼디거입니다. 럼가트 육군 대령으로 복무 중입니다.”
선왕과는 말도 나누기 싫다던 말이 거짓말처럼, 그는 한껏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어찌나 예의가 바른지, 곁에 있던 왕이 눈썹을 불쑥 치켜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뤼디거의 말투와 행동 하나에서 예의가 묻어났다.
마치 장인에게 잘 보이려고 기웃대는 새신랑처럼…….
설마 내가 왕족이라는 걸 알게 되기가 무섭게 바로 선왕 공략으로 들어간 건 아니겠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선왕에게 있어서 나는 간신히 만난 여동생의 손녀였고, 공교롭게도 나는 혈혈단신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선왕이 내 보호자를 자처하기 충분한 상황이다, 이 말이었다.
그러니 좋게 보여 나쁠 게 없겠지.
그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순식간에 거기까지 계산하고 행동으로 옮긴 뤼디거의 행동력에는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뤼디거의 의도는 충족되지 않았다.
빈터발트라는 이름을 듣기가 무섭게 선왕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빈터발트! 내 딸 바네사를 데려가서 그리 보낸 가문이 무슨 염치로 내 앞에서 목소리를 내느냐!”
아, 맞아.
이 사람 빈터발트 별로 안 좋아했었지.
나는 정원에서 선왕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왜 빈터발트를 안 좋아하나 했더니, 바네사의 문제 때문인 모양이었다.
아……. 그럼 뤼디거랑 내가 혹시 연애라도 하게 되면 펄쩍 뛰며 반대하는 거 아냐?
산 넘어 산이네. 간신히 요나스의 여자에서 벗어나 자유가 된 줄 알았더니……. 내심 속 시원하기도 했는데.
뜻밖의 고난이 예상되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뤼디거는 빈터발트에 대한 선왕의 거부감을 알고 있는 듯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선왕 전하께서 빈터발트에 역정을 내시는 마음은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유디트 마이바움 양이 어린 조카에 대한 선의로 한 일이, 저 작자에 의해 파렴치하고 추잡한 일로 변질되어 사교계의 눈총을 샀습니다. 이 일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쪽이 먼저가 아니겠습니까.”
뤼디거가 구구절절 변론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정치적인 달변인일 줄은 생각도 못 한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다들 나 같은 표정이었다.
뤼디거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지, 선왕은 머쓱히 헛기침했다.
“흠, 흠. 그래. 네 말도 마냥 틀리진 않구나. 하여튼…… 저기 바닥을 구르는 저놈은 빈터발트 놈팽이의 결투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하도록 하고, 저 여자는 감히 왕족을 기만하려 했으니 일단 감옥에 가둬두는 것이 좋겠구나. 어떠하느냐.”
역시! 다 알고 있었구나!
로이텐의 문제라면 모를까, 이사벨라에 관한 문제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걸 보아하니 미리 보고 받고 있던 게 틀림없다.
보고 받고 있었으면 미리 나타나서 힘 좀 실어주지…….
괜히 전전긍긍하며 졸였던 마음고생이 헛고생인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참으로 사람 마음이 간사하기도 하지.
모든 걸 다 내려놨다고 생각했을 땐 그리도 마음이 가볍더니, 고새 또 그 마음고생한 게 아까워져서…….
‘아무리 인생사 새옹지마라지만, 그래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은 하고 싶지 않다고.’
나는 나직이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