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87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87화
선왕의 제안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그리 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 뜻을 기민하게 읽은 왕은 고분고분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선왕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어허. 이제 네가 왕이니 네가 결정을 해야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왕의 그런 대답을 흡족히 여기는 게 얼굴에 드러났다.
애초에 왕이 결정하게 둘 거였으면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았을 테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왕이라지만 선왕 장단 맞추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이 난 선왕은 껄껄 웃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내 오늘 이손과 처음 만난 기쁨에 무척이나 들뜨는구나. 유디트, 우리 같이 방에 가서 두런두런 그레타에 관한 이야기나 하지 않겠느냐.”
선왕의 제안에 나는 당혹스레 왕의 눈치를 보았다.
왕이 떠나기 전에 자리를 뜨는 건 왕이 도착하기 전에 연회장에 도착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예의에 어긋났다.
하지만 왕은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되레, 선왕이 빨리 자리를 뜬다는 소리에 반색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십시오. 날씨가 찹니다. 빈터발트 대령, 마이바움 양이 이제 왕가의 일원이 되었으니, 당분간은 왕성에서 머물도록 하겠네. 이해해 줄 수 있는가?”
왕은 당연히 뤼디거가 그의 명을 받잡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좀 더 정확히는, 아무리 뤼디거라 해도 선왕의 명에 토를 달 거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뤼디거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마이바움 양도 환경이 너무 갑자기 바뀌면 혼란스럽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곁에 두던 하녀도 없는데. 마음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겠다, 오늘은 빈터발트 가로 모시고 내일 아침 다시 왕궁으로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아까는 선왕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 같더니, 숙소를 옮기는 건 또 포기 못 하겠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서야 선왕의 심기만 긁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선왕이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정 그러면 그 하녀를 왕궁으로 부르면 되는 일 아니냐! 당장 빈터발트 가로 마차를 보내!”
선왕의 목에 핏대까지 섰다.
80대 노인이 얼마나 정정한지, 기세가 장난 아니었다.
정원에서 쓰러진 채 숨을 몰아 쉬던 그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지금은 자존심 때문에 목청을 높이고는 있지만 기력이 부족할 것이다.
이러다 뒤로 넘어가기라도 하면 그 덤터기는 뤼디거가 쓰지 않겠는가.
나는 황급히 선왕을 말렸다.
“흥분하시면 건강에 안 좋아요. 진정하세요, 선왕 전하.”
“아이고, 유디트 네가 내 걱정도 해주는구나. 선왕 전하라니, 그 무슨 거리감 느껴지는 호칭이냐. 그래, 할아버지! 할아버지라 부르거라.”
선왕의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가 나오기가 무섭게 파안대소하려던 빅토리아는 가까스로 헛기침으로 무마할 수 있었다.
죠세핀은 제 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고.
지금 반응은 아무리 봐도…….
저기, 친손녀들도 지금 선왕 전하를 할아버지라고 안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런 편애는 좋지 않다.
나는 떠듬떠듬 거절하려 애썼다.
“그,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는지…….”
“어허. 나는 지금 그저 왕위에서 물러선 촌부나 다름없느니라. 그에 무슨 예의가 중하겠느냐?”
아, 완전 막무가내인데. 지금 저걸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선왕의 평판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기회였다.
뤼디거도 어지간히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선왕 또한 다른 의미로 말이 안 통했다.
그래도 나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였다.
로이텐의 처절한 외침이 분위기를 찢기 전까지는.
“서, 선왕 전하! 속지 마시옵소서!”
이대로 사건을 무마할 수 없었던 그는 최후의 발악을 했다.
“그 여자는 이미 신분을 속인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저 선왕 전하께서 그 여자를 그레타 왕녀 저하의 손녀로 착각하고 있는 걸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게…….
물론 할머니와 가출한 왕녀의 이름이 같다는 우연이 흔한 일은 아닐 테지만, 확인도 안 하고 이렇게 나를 왕실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그런 의문과는 별개로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뤼디거와의 결투에 대한 선왕이 내린 결론을 뒤집기 위해서였다.
안 그래도 성격이 괴팍한 선왕이다.
그의 결정에 반발해 봐야 눈 밖에 나기만 할 뿐인데, 과연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결투하는 쪽이 나을 것 같은데…….
선왕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말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어조로 쏘아붙였다.
“내 그조차 확인 안 했을 줄 아느냐? 이미 다 확인이 끝난 일이다.”
언제? 아, 어쩐지 정원에서 유난히도 꼬치꼬치 신상을 캐묻더라니…….
선왕의 확인 사살에 로이텐은 허망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해쓱한지, 마치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 같았다.
나만 로이텐을 이해 못 하는 건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주변 또한 왠지 모르게 로이텐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용기 있게 나섰지만 역시 만용이었군요.”
“그러게요.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요. 저 여인이 마가렛 왕녀의 핏줄이라니…….”
“일이 이렇게 된 건 어쩔 수 없지요. 솔직히, 왕족인 게 밝혀지기 전에도 빈터발트 가의 손님이었잖아요? 아무리 그녀가 사기꾼이었다고는 하나 공작가의 치부를 사교계에서 공개적으로 터트리다니, 설마 빈터발트 대령에게 결투 신청받을 거란 사실을 몰랐던 걸까요?”
“뭐, 가십거리를 팔아 이름이라도 드높일 생각이었을까요? 자업자득이죠, 뭐. 어휴, 괜히 저자를 옹호했다가 선왕 전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신경 끕시다.”
“그러게요. 어차피 빈터발트 대령과 결투하게 되면 두 번 마주칠 일도 없는 자니까요. 빈터발트 대령의 결투 성적이 어땠죠?”
“공식적인 것만 마흔세 번이었나요? 그리고 사망자도 마흔세 명이었고.”
43전 43킬이요?
아……. 뤼디거와의 결투가 사형집행과 같은 말이었구나.
그래서 로이텐이 저렇게 현실부정하고 있는 거였고.
잠깐, 그건 둘째 치고. 공식적인 결투만 그렇게 많이 했단 말이야?
적어도 사교계에 데뷔한 뒤로 일 년에 두 번씩 한 꼴인데?
비공식적 결투까지 치면 도대체 얼마나 많았을지…….
와, 인생 한번 굉장히 험난하게 살았네. 적을 정말 많이 만들고 살았구나, 뤼디거?
지금은 짐짓 평안해 보이는 것도, 그때 적들은 전부 죽여 없앴기 때문일 테고…….
모두가 예정된 죽음에 로이텐을 외면했다.
로이텐의 절망 어린 눈빛이 돌연 빛났다.
근처에 있던 프란츠를 발견한 그는 프란츠의 발을 잡으며 애원했다.
“프란츠! 프란츠! 빈터발트 대령은 자네 사촌이지 않나. 자네가 좀 중재 좀 해주게. 나는 그저 자네…….”
“어허. 그린할텐 경, 추태를 부리지 말게. 근위병! 그린할텐 경이 정신이 없는 모양이니, 타운하우스까지 보내드리는 게 좋겠네.”
묘하게 로이텐이 말하려는 걸 잘라먹은 기분이 드는데. 그게 착각은 아닐 듯싶었다.
로이텐 입에서 나오면 안 될 말이라도 있나 보지?
그렇다면……
뤼디거와의 결투를 피하는 것을 대가로 그에게서 정보와 증언을 얻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프란츠가 개입했다는 확실한 증거만 있다면…….
뤼디거에게 있어선 연전연킬의 기록이 깨지는 일이겠지만, 그런 사소한 기록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 버켄레이스 경 말대로 하라. 그린할텐 경은 자택에서 근신하도록 하라.”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근위병들이 바닥에 쓰러진 로이텐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발버둥 치는 그를 연회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다음은 이사벨라 차례였다.
앞선 로이텐의 추태와 달리, 이사벨라는 결연히 일어서 제 발로 연회장을 걸어 나갔다.
감옥으로 향하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는 내 심경이 복잡했다.
만약 내 할머니가 마가렛 왕녀가 아니었다면, 나 또한 이사벨라 옆에서 끌려가고 있었을 테니까.
내 운이 좋았다고 치부하고 넘겨도 되지만, 굉장히 입맛이 썼다.
로이텐의 말대로, 그녀가 사기꾼이라면 나도 사기꾼이었으니까.
아냐, 유디트 마이바움.
저 여자와 달리 난 어디까지나 루카를 지키기 위해서였잖아.
그리고 저 여자를 묵인했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어?
아마 나를 쳐내려는 시도는 똑같이 벌어졌을걸?
그러면 결국 원작대로 흘러가는 거야. 그거야말로 최악이지.
그러니 괜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나는 그리 자기 합리화를 하며 애써 죄책감을 떨쳐냈다.
하여튼 큰 분기점이 하나 끝났다.
이사벨라가 빈터발트에 침입하려는 시도를 무사히 쳐낸 것만으로도 정말 큰일이었다.
비록 내 정체가 밝혀지기는 했지만, 나도 모르고 있던 그 이상의 정체 또한 밝혀지기도 했고…….
하지만 역시, 프란츠의 속내를 완전히 까발리고 그의 음모를 모조리 뿌리 뽑기까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직 완전히 장르를 바꾼 건 아니니까.
나는 도망치듯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프란츠의 등을 빤히 노려보았다.
두고 보라지. 나는 반드시 해 낼 테니까.
나는 나직이 속삭이며 결의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