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89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89화
이런……. 빈터발트에 대한 선왕의 원한이 상상 이상인 모양이다.
“루카가 빈터발트 가의 후계자인데 어떻게 상종을 안 해요.”
“뭘 굳이 상종해야 해. 루카만 따로 왕궁으로 불러 만나고 하면 되지. 이제 굳이 빈터발트에 신세질 필요도 없고. 그레타의 이름으로 된 영지며 저택이며 다 네가 물려받게 될 것 아니냐. 내가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전부 붙여주도록 하마.”
“네? 아뇨. 그러실 필요까지는.”
“어허. 어른이 주는 건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되는 거야.”
“아…….”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선왕은 거절은 거절한다는 기세였다.
어찌나 강경한지, 차마 내 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일단 이럴 때는 전략상 후퇴다.
나는 조금이라도 처량하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애써 착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목소리에 바이브레이션을 넣어 떨림을 강조했다.
“그,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호, 혼란스러워서 머리가 어질어질해요, 할아버지.”
더듬는 건 기본, 마지막에 할아버지는 애교였다.
그리고 효과는 성공적이었다!
“어이구. 내가 널 너무 오랫동안 잡고 있었구나. 그래. 오늘 일이 많긴 많았지. 이제 좀 쉬거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선왕은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배웅하기 위해 따라 일어섰지만, 그는 쉬고 있으라며 나를 만류했다.
선왕이 나가고 나서 하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하녀들의 손길에 지금껏 답답하게 차려입었던 드레스와 보석들을 벗어내고 나서야 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나는 방 천장의 무늬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정말 폭풍과 같이 몰아친 하루였다.
출생의 비밀이라니.
그건 드라마 속에나 나오는 남 얘기인 줄 알았는데……. 애초에 원작에도 있던 설정이었던 거야, 이거?
하여튼 오늘을 기점으로 원작과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그러고 보니 선왕이 저렇게까지 빈터발트를 질색하는 줄은 몰랐네……. 그러면 뤼디거는 어떻게 되는 거야? 혹시 내가 그랑 사귀겠다고 하면 발칵 뒤집히기라도 하는 거 아냐? 그러면 곤란한데…….’
이제 루카 엄마가 아니라 이모라는 게 밝혀졌으니까 뤼디거랑은 좀 더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내심 기뻤는데…….
선왕은 뜻밖의 난관이었다.
에이, 설마. 그래도 그렇지 다 큰 손녀 연애에 그렇게까지 간섭하려고.
게다가 왕이 뤼디거를 죠세핀의 결혼 상대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면 딱히 빈터발트 가와 왕가의 결합이 안 되는 것도 아닌 거 같고.
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밀려오는 수면욕에 몸을 맡겼다.
* * *
다음 날 아침, 선왕과의 조찬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는 중 왕가의 초상화가 걸린 롱갤러리를 지났다.
족보를 방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롱갤러리는 왕족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누군지 짐작도 안 가는 이들부터 내가 알고 있는 이들의 초상화도 걸려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할머니의 젊었을 적 초상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이십 대 초의 모습이었다.
확실히 닮았다.
색소 엷은 금발, 연보라색 눈동자. 이목구비도 엇비슷했다. 마치 유디트의 이십대 초를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유디트의 이십대 초는 저렇게 화려한 드레스는 꿈도 꿀 수 없었겠지만.
‘이렇게 닮았으니 선왕이 나를 딱 보고 알아봤지.’
할머니의 초상화를 지나자, 바네사 왕녀의 초상화 또한 눈에 띄었다.
빈터발트에서도 한 번 봤던 얼굴이니만큼 눈에 익었다.
그걸 제외한다 해도 잊기 힘들 정도의 미인이었으니 기억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목구비가 크게 닮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할머니랑 닮은 것 같단 말이야. 역시 눈색 때문인가.’
연보라색 눈동자. 이걸 가진 건 할머니와 바네사뿐이었다.
다른 왕족들은 모두 벌꿀과도 같은 짙은 금안이었으니, 두 사람의 눈동자 색이 유난히도 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확실히 흔한 눈동자 색은 아니지만…….
‘선왕이 바네사 왕녀만 편애한 것도 그녀가 자녀 중 유일하게 연보라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소피아도, 말리나도 나에게 잘해준 것은 내가 바네사의 눈동자를 닮았기 때문이니까.
요나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런 선상에서 보면 전부 이해가 갔다.
선왕에게 있어 요나스는 그레타와는 전혀 닮지 않았을뿐더러, 하는 짓만 보면 그레타를 홀려 데려간 우리 할아버지와 똑 닮았을 테니까.
‘결국은 바네사 또한 선왕에게 있어서 그저 할머니의 대타였을 뿐이었네.’
입이 썼다.
나 또한 바네사와 할머니의 대타로서 꽤 이득을 누리곤 있지만, 그 기저에 깔린 것이 내가 아닌 타인에 관한 호의 때문이라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거북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왠지 바네사에게 동질감이 들었다.
내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흔들려는 선왕의 갑갑한 행동을 실시간으로 겪고 있으려니 더 그러했다.
나는 한숨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서는 루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했어.”
“뭘. 그냥…… 밥만 먹는 거였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상은 그냥 밥만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식은 뭐냐, 포크를 쥘 때 손이 조금 비스듬하구나, 와인은 어느 쪽이 입에 맞느냐 등등…….
선왕은 내가 뭔 행동을 할 때마다 꼬박꼬박 물으며 하나하나 할머니와 비교하며 흡족해 했다.
아침 식사만으로 진이 빠져 버린 나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어린아이의 특권으로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홀로 아침을 마친 루카가 이토록 부러울 수가 없었다.
루카는 여유롭게 차로 입을 축였다.
어찌나 적응을 잘했는지, 아주 왕궁이 자기 집 같았다.
“그나저나 외증조할머니가 왕녀였을 줄이야.”
“그러게. 나도 몰랐어.”
그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 우연에 우연이 거듭된 결과였다.
“어휴. 그나저나 어제는 네 덕에 살았어. 네가 아니었다면 일이 꽤 복잡해졌을 텐데.”
“나? 별로 도움이 된 게 없는 것 같은데. 아무도 내 말은 안 믿고 말이야.”
루카는 입꼬리를 아래로 잡아 내렸다.
로이텐이 루카가 세뇌되었다며 루카의 항변을 묵살했을 때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때 말고. 이사벨라 앤더슨 때 말이야. 회중시계 도둑맞았다고.”
“아아, 그거?”
“네 증언이 아니었다면 일이 한층 더 복잡해졌을 거야. 뭐, 어차피 선왕이 개입했을 테니 내 신변에는 별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역시 최악은 그녀가 바락바락 버텨서 빈터발트 사람으로 인정받는 거였겠지. 어휴.”
나는 진절머리를 쳤다.
“요나스가 시계를 도둑맞았다고 공작 부인에게 순순히 말한 게 놀랍네. 거짓말은 안 해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정도로 솔직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뭔 소리야? 당연히 거짓말이지.”
루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답했다.
태연자약할 정도로 뻔뻔한 낯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거, 거짓말?”
“당연하지. 자기네들이 정말로 빈터발트까지 전보를 쳐서 확인하겠어?”
“그러다 정말 확인하면 어쩌려고!”
“확인하면 확인하는 거지, 뭐. 할머니 눈치가 좀 좋아? 전보가 가도 빠싹 눈치채셔서 알아서 답해주실걸.”
루카는 내가 너무 순진하다는 듯 혀를 찼다.
저기, 내가 순진한 게 아니라…….
네 나이가 보통 순진한 생각을 할 거라고 여겨지는 나이라고…….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던 나는 입만 떡 벌린 채였다.
내가 방심한 틈을 타 루카가 물었다.
“이모야말로 그 여자가 등장할 걸 알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게 아니면 요나스의 보고서 같은 걸 다 외울 이유가 없잖아. 요 며칠 계속 엉뚱한 거에 집중한다 했더니, 그거 외우느라 그랬던 거지? 빌헬름에게 조사해 오라고 시킨 것도 그거고.”
“…….”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다.
얘는 가끔 핵심을 푹 찔러온단 말이야…….
하지만 내가 다 답변을 준비해 놨지.
이사벨라의 뒷조사를 한 걸 들키진 않은 모양이니, 나는 미리 준비한 변명을 적당히 둘러대었다.
“그 연회장에 참석한 요나스의 여자가 몇 명이었겠어? 더군다나 난 정말 요나스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잖아. 최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어야 여차할 때 실수 안 하지.”
“흐음……. 그래. 확실히 준비해 둔 보람이 있었겠네.”
저기요? 그 반응 뭐죠?
별로 믿진 않지만 네가 그렇다 하니 그리 믿어주마 하는 그 반응은?
나는 루카를 향해 눈을 흘겼다.
루카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쯤 해서 뤼디거가 찾아올 때가 되었는데…….
왕궁의 문이 열리고 알현 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들이닥칠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고도 한참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영 오지 않는 뤼디거를 기다리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뤼디거 씨가 안 오네. 지금쯤 도착했을 것 같은데…….”
“글쎄……. 쉽게 오긴 힘들지 않을까.”
“왜? 어제 연회가 힘들어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런 거로 힘들어할 사람이야?”
“그러면 딱히 안 올 이유가 없잖아…….”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이렇게 뤼디거를 기다리는데 뤼디거는 그러지 않은가 싶어 초조해졌다.
어느새 뤼디거가 나를 챙기는 것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예전에는 분수를 알고 김칫국 마시지 말자 그리도 타일렀는데.
그새 많이 바뀌었다, 유디트 마이바움.
나는 들쑥날쑥한 기분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씩씩거렸다.
그런 나를 빤히 보던 루카가 툭 하니 말했다.
“엄청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음……. 어제 그렇게 헤어졌잖아. 해야 하는 말도 있고. 당연하지.”
나는 황급히 변명했다.
물론 엄청 기다리고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루카에게 말하기엔 눈치가 좀 보였다.
아직 루카는 내가 뤼디거에게 고백받았다는 걸 모르니까.
게다가 갑자기 숙부하고 이모하고 사귄다 그러면 얼마나 애가 싱숭생숭하겠어.
사춘기는 아니라지만 자칫하다 엇나가기라도 하면…….
그건 정말 큰일이다.
루카를 생각해서라도 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갈 생각이었다.
다른 곳에서야 어떻든 적어도 루카가 보는 곳에서는.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목소리를 꾸몄다.
“뭐, 기다리면 언젠가 오겠지. 그치?”
“…….”
루카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