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90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90화
* * *
그날 오후, 느지막한 시간. 갑작스레 왕궁 시녀가 빈터발트 가에서 방문자가 왔다 말했다.
당연히 뤼디거일 거라 생각한 나는 시녀를 재촉했다.
“얼른 들여보내!”
하지만 기대와 달리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바로 로라였다.
로라는 나를 보기가 무섭게 호들갑을 떨었다.
“마님!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 도련님께 상황을 들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고요.”
물론 로라도 반가웠다.
반갑지만……. 나는 최대한 로라를 반기는 것처럼 보이려 노력하며 물었다.
“저기, 로라. 뤼디거 씨는? 너 혼자 왔니?”
“아……. 도련님이요…….”
뤼디거 이야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로라가 어물쩍 말을 흐렸다.
“그……. 오래지 않아 오실 거예요. 지금은 밀린 일이 좀 있으 셔서…….”
“밀린 일? 연회가 어제 끝났는데 무슨 밀린 일? 연회 전에 어지간한 일은 다 끝낸 거로 아는데…….”
나도 모르게 로라를 몰아붙였다.
무슨 의부증 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애인도 아니고, 그저 조카의 숙부인 뤼디거의 행동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남들에겐 꽤나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군에 관련된 일이 갑자기 떨어졌다고.”
로라는 그리 말하면서 계속해서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마치 입막음 당한 것처럼…….
에이, 설마. 내가 과민반응하는 거겠지.
어차피 뤼디거는 당장 못 오는 거겠다, 나는 한발 늦게 로라를 반겼다.
“그래, 로라. 그러면 넌 당분간 여기 있는 거니?”
“네! 아무래도 마님 가까이에서 시중을 드는 건 제가 편하실 테니까요. 원래는 왕궁에 이런 식으로 사사로운 하인을 들이는 일은 없다 해요. 음……. 선왕 전하께서 편의를 많이 봐주셨어요.”
선왕에 대해 언급하는 로라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뭐, 선왕의 괴팍한 성격을 조금이라도 겪었다면 로라의 반응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나는 별것 아니겠거니 넘겼다.
나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뤼디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었음에도 뤼디거는 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지금껏 입궁 안 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
없는 시간이라도 쪼개서 잠깐 들렀을 것이다. 아니면 서신이라도 남기거나.
처음에는 마냥 서운했는데, 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걱정이 됐다.
뭔가 있다.
그제야 나는 빈터발트라면 질색했던 선왕의 모습을 떠올렸다. 로라의 이상한 반응도.
생각해 보면 현재 휴가를 낸 뤼디거에게 갑자기 군대 일이 생기는 것도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친목을 위해 찾아온 빅토리아 왕녀를 통해 나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네? 뤼디거 씨가 왕궁 출입 금지요?”
“그래. 할바마마가 직접 내린 출입 금지령이라 이도 저도 못 하는 모양이야. 어휴. 할바마마 눈 밖에 나도 단단히 났다니까. 역시 그 연회에서 할바마마한테 반론한 것 때문일까 싶긴 한데.”
지금껏 있던 서운함이 싹 가시다 못해 뒷목이 서늘했다.
그리고 뒤늦게 아차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뤼디거가 로이텐을 죽이면 안 되는데…….
로이텐에게서 프란츠에 관한 정보를 빼내는 게 먼저였다.
밀려오는 초조함에 나는 전전긍긍했다. 빅토리아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돌연 말했다.
“뭐야. 빈터발트 대령의 짝사랑인 줄 알았더니, 쌍방향이었던 거야? 시시하기는.”
뭐, 뭐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갑작스레 던져진 왕녀의 폭탄 발언에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뤼디거의 짝사랑은…….
뤼디거가 여기저기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리는 없고. 그렇다고 얼굴에 티가 나는 사람도 아닌데.
뤼디거야 어찌어찌 알았다 해도 내가 뤼디거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눈치챈 거야?
내 태도인가? 나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군 거야?
그게 아니라면 혹시……. 나를 찔러보는 건가?
그게 제일 가능성이 컸다.
내가 로이텐의 안전 확보로 전전긍긍하는 걸 뤼디거를 걱정하는 거로 오해한 게 틀림없다.
물론 그 또한 틀린 건 아니지만, 굳이 빅토리아에게 밝혀서 좋을 리는 없다.
나는 일단 오리발을 내밀고 봤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왕녀님.”
“왕녀는 무슨. 우리 이제 서로 존대는 그만하자고. 결국 사촌지간 아닌가.”
빅토리아는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존대를 그만하라고는 하지만 그게 쉽진 않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소파에 몸을 느긋이 기댄 그녀는 호박색 눈동자를 가늘게 빛내며 내 면면을 살폈다.
마치 사냥감의 약점을 노리는 늑대 같았다.
“하여튼……. 나는 빈터발트 대령이 수 쓰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합의돼 있던 거야? 그랬던 거면 정말 연기 실력이 뛰어난데?”
“뭐가요?”
“뭐긴 뭐야. 아바마마 앞에서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대와 빈터발트 대령을 엮어줄 리 없잖나.”
얼굴을 맞대기가 무섭게 대뜸 뤼디거도 좋은 남자라며, 재혼할 생각이면 뤼디거도 좋은 선택이라고 어필하던 그녀의 기행이 떠올랐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거, 설마 합의되어 있던 내용이었어요? 뤼디거 씨랑?”
“정말 몰랐나?”
되레 빅토리아가 화들짝 놀랐다.
시시하다며 축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눈에 그제야 흥미가 돌았다.
“저는 그저……. 죠세핀 왕녀님이 뤼디거 씨와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그래서 말을 돌리려고 하시는 건 줄 알았어요.”
“그건 또 눈치가 빠르네.”
빅토리아는 죠세핀이 뤼디거와의 결혼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내가 본 게 맞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아니, 도대체 언제 물밑작업을 해놓은 거야?
뤼디거의 부지런함에 혀가 절로 내둘러졌다.
“그럼 연회 전에 미리 말이 오갔던 거예요?”
“그래. 갑자기 찾아오더니 다짜고짜 제안하더라고.”
“제안이요?”
“그래. 왕권 싸움에서 내 편을 들어줄 테니, 아바마마께서 자기를 죠세핀과 엮으려는 걸 포기시키시라고 말이야. 아, 더불어 그대랑 분위기를 그럴싸하게 조성해 달란 말도 잊지 않았지.”
그래 놓고 죠세핀이 빅토리아를 조심해라 운운할 때 시침 뚝 떼고 모르는 척 있었다 이거지…….
은근히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단 말이야.
티가 하나도 안 나서 나도 껌뻑 속았다.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는 미리 언질 줬으면 좀 덜 당황스럽잖아. 특히나 빅토리아 입에서 들어서 더더욱.
“처음 들었을 땐 깜짝 놀랐지 뭐야. 그대가 요나스의 연인이었던 걸로 알고 있었으니까. 뭐, 애초에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을 남자기는 하지만……. 지금 보니 빈터발트 대령, 그 작자 그대가 대타인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네.”
나는 머쓱히 웃었다.
연회장에서는 혹시나 내가 저지른 일들에 뤼디거가 휘말릴까 거짓말했는데, 경위를 대충 짐작하는 빅토리아에게까지 사실을 숨길 순 없었다.
“뭐……. 형의 연인을 좋아하는 건 별반 문제가 아니야. 솔직히 빈터발트 대령이 요나스의 연인이 아니었던 여자와만 사귀어야 한다면 사귈 수 있는 여자가 대폭 줄어들었을 테니까. 그래도 그렇지, 형의 애를 낳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좀 곤란하잖아? 아무리 그라 해도 말이야.”
“…….”
“그래서 내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걸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냐고, 내 손에 순순히 쥐여줬다가 내가 이걸 어떻게 휘두를 줄 알고 대뜸 알려주느냐 했더니 그 남자, 뭐라 한 줄 알아?”
빅토리아는 그때를 회상하며 작게 쿡쿡 웃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뤼디거를 따라 하듯 말했다.
“‘이런 건 내 약점이 아닙니다. 그저 마이바움 양이 주변 시선을 신경 쓰는 것 같으니 최대한 주변을 정리하고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왕녀님이 나서면 구설수 대부분은 정돈되지 않겠습니까.’ 이러지 뭐야. 난 그래서 알았지. 아, 빠져도 단단히 빠졌구나.”
빅토리아의 위로 뤼디거의 얼굴이 겹쳐졌다.
갑자기 울컥 치미는 무언가가 가슴 한구석을 때렸다.
홧홧하게 타오른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빅토리아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세상천지에 바라는 것 하나 없는 빈터발트 대령이 짝사랑에 쩔쩔매는 꼴은 어떠한가 궁금했는데……. 아아. 아쉽다, 아쉬워.”
그건 나도 좀 궁금한데…….
내 앞에서도 항시 무덤덤한 표정인 남자다 보니, 쩔쩔매는 얼굴을 상상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린디거가 쩔쩔매는 모습은 과연 어떨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빅토리아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물었다.
“보아하니 아직 사귀는 것 같진 않고. 빈터발트 대령도 그대가 그를 좋아하는 걸 알아?”
“아뇨. 아직……. 대답은 미뤄 둔 상황이라.”
“대령이 고백하기는 한 모양이네?”
“…….”
이런, 낚였다.
자기가 원하는 정보를 낚아채 가는 실력이 아주 수준급이었다.
결국, 그녀는 뤼디거와 내 연애 진척 상황 대부분에 대한 정보를 거머쥐게 되었다.
빅토리아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는지 킬킬 웃었다.
채신머리없는 태도였지만 묘하게 빅토리아가 하니 여유가 느껴졌다.
“그럼 빈터발트 대령은 지금 엄청 마음 졸이고 있겠군. 난데없이 할아버지가 그대와 갈라놨으니 말이야. 뭐, 생각해 보면 할바마마의 등장만으로도 빈터발트 대령에게 충분한 장애물이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