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92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92화
빅토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제가 들은 질문을 곱씹었다.
그러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만 휘둥그레 뜨고 있자, 빅토리아는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친절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나? 그대는 내 왕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 혈연이고, 더불어 그대 덕에 내가 빈터발트 대령의 비호를 얻게 되었는데? 훗날 그대가 빈터발트 대령과 결혼하게 되고 나서도 우리, 오래오래 얼굴 봐야지 않나.”
빅토리아의 답은 노골적이었고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탁 터놓고 이야기 하는 쪽이 이해하기 쉬웠다.
솔직한 그녀의 답에 나는 작게 웃었다.
내가 지금껏 너무 복잡하게, 그리고 소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손에 쥔 것은 많은데,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것들이라 지금껏 어영부영 늘어만 놓고 있었다.
예전 생에서도 그렇고, 이번 생에서도 그렇고 계속 눈치 보는 을의 처지였기 때문일까.
하지만 앞으로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그래. 당당해지자, 유디트.
숨기고 있던 것들도 다 밝혀졌겠다, 내가 찔릴 게 뭐가 있어 주위 눈치를 봐야 하는가?
그렇게 용기를 얻은 나는 빅토리아와의 대화가 끝난 뒤 바로 선왕을 찾아갔다.
역시 이 기묘한 상황을 제일 탈 없이 끝내는 방법은 빅토리아의 응원대로 내가 나서는 것밖에 없었다.
지금껏 뤼디거가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그 또한 웃긴 일이었다. 뤼디거가 못 오면 내가 가면 되는 거니까.
이미 지체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최대한 빨리 뤼디거를 만나야 했던 나는 발을 재촉했다.
* * *
“오, 유디트. 네가 먼저 날 찾아오다니 너무나도 기쁘구나.”
선왕은 무척이나 환히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내 속셈을 전혀 모르는 듯한 선왕의 모습에 양심이 찔렸지만 애써 도리질 쳐 잊었다.
“항상 할바마마께서 절 먼저 찾아오시니까요. 오늘 오후 티타임은 제가 먼저 나서봤어요. 바쁘신 건 아니죠?”
나는 그리 말하며 애교 있게 살짝 웃었다.
할바마마라는 호칭이 어색했던지라 지금껏 계속해서 선왕 전하라 불러왔지만, 지금을 위해 몇 번이고 혼자 연습해 왔다.
그 덕에 떨지 않고 자연스레 말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왕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 늙은이가 바쁠 일이 뭐가 있겠느냐?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란다.”
“절 반겨주시니 무척 기뻐요. 오는 길에 보니 오늘 날씨가 좀 풀린 것 같던데, 차를 마시기 전에 산책하러 다녀오시는 건 어때요? 저희 처음 만났던 정원에 다녀오는 거예요.”
“아주 좋은 생각이로구나.”
선왕은 들뜬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밖으로 나서려고 했다.
나는 간신히 그를 잡아 외투를 챙겨 입혔다.
선왕은 옷 시중을 드는 나를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완전 애가 따로 없다니까…….
아니, 정작 애인 루카는 알아서 척척 스스로 어린이인데 말 이야.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는 것과 달리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유 순한 손녀로 가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선왕과 나는 산책길에 나섰다.
좋아, 여기까진 계획대로다.
선왕의 성정이 하도 불같다 보니, 일단은 이렇게 기력을 빼놓을 필요가 있었다.
선왕이 추억을 열심히 곱씹고 늘어놓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추임새를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정원 산책이 끝나고 선왕은 무척이나 흡족한 낯으로 응접실에 들어섰다.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는지, 차와 다과가 순식간에 준비되었다.
선왕의 수발을 드는 시녀들은 무척이나 재빨랐다.
눈치는 또 얼마나 빠른지, 거의 말이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따듯한 차로 바깥바람을 쐬어 차가워진 속을 녹였다.
나는 선왕의 눈치를 보며 운을 뗄 만한 시기를 살폈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레, 별것 아닌 것처럼 툭 화두를 던졌다.
“어휴, 내일은 빈터발트의 타운 하우스에 다녀와야겠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예상했던 대로 선왕은 펄쩍 뛰었다. 눈동자 위아래로 흰자가 빛났다.
그 기세가 자못 서늘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반문했다.
“네? 안 되나요?”
“안 돼!”
“왜요?”
“…….”
왜냐는 내 질문에 선왕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어안이 벙벙한 것이, 마치 내가 그의 말에 반박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 같았다. 혹은 반박당하는 게 난생처음이거나.
나는 빙긋 웃으며 천연덕스레 선왕의 속내를 찔렀다.
“에이, 제가 갔다가 안 올까 봐 그러세요? 필요한 것만 가져 올 거예요.”
“……사람을 시키면 되는 일 아니냐.”
“가는 길에 빈터발트 경을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찾아올 때가 됐는데 영 안 찾아와서. 어쩔 수 없죠. 제가 가는 수밖에.”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뤼디거의 출입 금지령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고 있는 것처럼 구니 선왕도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되레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놈이랑 뭔 얘기를 해!”
“루카를 지금 제가 데리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빈터발트 후계자인걸요. 가문에 상황은 보고해야죠.”
눈을 둥글게 뜨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당장에라도 선왕이 건방지다 버럭 소리 지르며 나를 내쫓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조금이라도 주눅 들거나 찔리는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
지난번처럼 당황해서 선왕의 기세에 밀리기라도 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루카를 위해 프란츠를 확실히 몰락시켜야 하는 나로선 어떻게 해서는 이 기회를 붙들어야 했다.
내 요구를 뻔뻔스레 주장하되, 선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선왕의 들끓는 변덕을 생각하면 더더욱.
나는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나는 찔릴 게 없다. 아쉬운 건 선왕 전하다…….’
들쑥날쑥 날뛰던 마음이 심호흡과 함께 서서히 가라앉았다.
손바닥에 차오른 땀을 치맛단에 은근슬쩍 문질러 없앤 나는 흔들리는 선왕을 살살 타일렀다.
“뭐가 그리 걱정되세요? 저는 항상 할아버지 곁에 있을 텐데요.”
그리 말하며 나는 선왕의 주름 진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독이는 손길 아래 선왕의 손이 작게 떨렸다.
할아버지라는 말에 성게처럼 삐죽했던 선왕의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언제 손을 뿌리치며 역정을 낼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선왕은 내심 궁을 나간 할머니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왕궁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여동생과 자존심 싸움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자신 혼자만의 싸움이었고 여동생은 자신을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았을 뿐이었지.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애써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지만 그 당시의 트라우마까지 모두 지울 수는 없는 법.
그 반동이 지금, 나를 감금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일 테고.
하지만 난 할머니가 아니다. 선왕은 그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선왕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한참을 침묵했다.
찻잔의 차는 진즉 식었고, 따듯하게 데워졌던 티포트마저 차게 식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선왕은 결국 한숨과 함께 항복의 말을 읊조렸다.
“……해가 지기 전에 들어와야 한다. 알았지?”
선왕은 어딘지 모르게 의기소침해 보였다.
하긴 지금껏 고집을 꺾을 일이 있었어야지. 아마 인생에서 최초가 아닐까.
그래도 항상 기세등등하던 노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시들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쪽이 약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언제까지 이렇게 감금당한 채 있을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원작을 생각해, 유디트. 프란츠 때문에 루카가 빈민가에서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소설 읽을 때도 속에서 열불이 터졌는데, 지금 내가 이렇게 두 눈 똑똑히 뜨고 있는데 그 꼴은 못 보지.’
나는 원작에서 루카가 흰 뺨에 숯 검댕을 잔뜩 묻히고 머리를 헝클어트린 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빈민굴을 떠돌던 부분의 묘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네, 걱정 마세요. 아, 내일 저녁 식사 함께하실래요?”
“그래, 그래.”
그렇게 간신히 선왕의 허락을 받아낸 나는 바로 다음 날 아침 성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마차를 타고 왕궁을 쌩하니 빠져나갔다.
사실 빠져나가면서도 얼떨떨했다.
어제 그 자리에선 선왕이 어쩔 수 없이 허락했지만, 혹여나 뒤돌아서서 막았을까 조마조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랬다면 몰래 탈주라는 두 번째 방법을 썼겠지만…….
내가 빈터발트에 가고자 하는 걸 눈치챈 루카가 넌지시 찔러 준 비밀통로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고 안 믿었는데, 정황상 사실인 것 같았다.
도대체 루카는 이걸 어떻게 안 걸까?
타운하우스에서도 비밀통로를 꿰고 있는 것 같더니…….
‘뭐, 다들 어린애한테는 상대적으로 방심하기 마련이잖아. 그 틈을 타서 조사해 뒀지. 어차피 이런 궁이나 저택의 비밀통로야 거기서 거기니까.’
루카는 그리 말했지만 그대로 순순히 믿기에 의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분명 숨기는 게 있단 말이지. 역시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단단히 캐물어야겠어.’
일단 주변 상황을 해결하는 게 먼저니까.
나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훗날을 기약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마부가 말을 얼마나 빨리 몰았는지, 창밖의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내가 최대한 빨리 가달라고 하긴 했지만…….
내가 그리 부탁했을 때 마부의 표정이 유난히도 익숙하더라니.
헐레벌떡 병원 응급실로 가달라 했을 때 택시 기사가 마부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다급히 마부에게 요청했다.
“저, 조금만 속도 늦춰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