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93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93화
하지만 바람 소리 때문에 내 말을 못 들었는지, 속도는 좀처럼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 되겠다. 건너에 있는 마부석 쪽 창을 열고 말해봐야겠다.
하지만 건너로 몸을 기울이려 하기가 무섭게 마차가 크게 덜컹거려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간신히 좌석에 손을 뻗어 몸을 지지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건너로 넘어가는 건 무리였다.
그렇게 마차는 도로를 질주했고, 아침나절부터 생계를 위해 오가는 사람들은 때아닌 난폭 운전에 이리저리 흩어졌다.
아, 완전 민폐…….
다친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제일 크게 다친 건 내 엉덩이가 아닐까.
그렇게 나는 눈 깜짝할 새 빈터발트 저택에 도착했다.
“헉, 마님!”
내가 마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집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
“뤼디거 씨는? 뤼디거 씨는 어디 계시지?”
외출했다고만 하지 말아라.
나는 간절하게 빌었다. 오늘 말고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는 일이다 보니 마음이 초조했다.
내 기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다행히도 집사는 내가 바라는 말을 해주었다.
“도련님께서는 지금 마님 방, 그러니까 아이리스의 방에 계십니다.”
그가 저택에 있는 건 다행이지만……. 그런데 도대체 아침나절부터 왜 거기에 있는 거야?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보다 내 몸이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나는 익숙한 아이리스의 방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막상 뤼디거를 마주할 생각을 하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혹시나 내가 그를 일부러 피했다고 착각하진 않겠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집사보다 한 발짝 일찍 방에 도착한 나는 집사가 방문을 열어주기 전, 벌컥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묵직한 문을 어깨로 밀어낸 내 시야가 창을 타고 들어온 불빛으로 잠시 하얗게 물들였다.
곧 점멸한 불빛 사이로, 소파에 앉아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는 뤼디거의 모습이 보였다.
방에 뛰어든 나는 그를 보자마자 외쳤다.
“뤼디거 씨!”
뤼디거는 잠시 크게 움찔했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바싹 벼려진 칼처럼 예민해 보이던 그의 기세가 크게 일렁이며 무너져 내렸다.
빙벽이 일순에 녹아내리는 순간을 보는 듯한 그 경이로움에 사로잡힌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이내 서린 것은 경악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샅샅이 살폈다.
마치 죽은 사람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 같은 태도였다.
나도 내가 궁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지만…….
그래도 너무 유난스러운 게 아닐까 싶었다.
쉬이 돌아오지 않는 상대의 침묵 속에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 며 운을 뗐다.
“잘…… 지내셨어요?”
내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뤼디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성큼성큼 나에게로 다가왔다.
몇 발짝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갑자기 코앞에 불쑥 나타난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뒤로 물러서는 것보다 뤼디거가 나를 그의 품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먼저였다.
그의 팔 아래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식으로 끌어안긴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를 밀쳐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한 채 오도카니 굳어 있었다.
내 코끝에 닿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서는 옷에 스며 있던 코오롱 향기가 배어 나왔다.
심장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쿵쾅대는 그와 내 심장의 고동이 서로 얽혔다.
“유디트 씨……? 정말 유디트 씨입니까?”
그는 내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물었다.
혹여나 내가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걱정됐는지 나를 품에 가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으스러질 듯한 그의 포옹에 숨이 막혔지만, 숨을 쉴 수 없는 건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향기가 나를 잠식했다.
이 공간에 우리 둘만 있어서 다행이다.
남들 눈에는 완전 사귀다가 집안의 반대로 강제로 헤어진 연인으로 보일 게 분명했다.
고백에 답만 안 했다 뿐이지, 뤼디거도 이쯤 되면 내 감정을 자각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는 한참이나 나를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오갈 데 없어 허공에서 멈춘 내 손만이 민망히 남았다.
어, 언제까지 이 손을 들고만 있어야 하지.
나는 슬쩍 손을 내려 그의 옷자락 끝을 잡아보았다. 손에 닿는 옷감의 질감이 유난히도 손끝에 걸렸다.
나도 그의 허리에 손 한 번 감아봐도 문제 될 건 없지 않을까. 지금 분위기도 딱 그런 분위기고…….
게다가 먼저 끌어안은 건 뤼디거라고!
눈치를 보던 나는 그의 옷자락을 잡은 손을 슬금슬금 그의 허리춤으로 옮겼다.
등은 또 얼마나 단단한지, 몇 겹의 천으로도 그의 근육의 감촉을 가릴 수가 없었다.
‘몸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좋은 건 역시 나 좋으라는 친절이겠지…….’
나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그의 등을 도닥이는 척 은근슬쩍 더듬었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싶었지만 좀처럼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가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확인하기조차 두렵군요.”
뤼디거가 감격 어린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뤼디거는 심각한데 나 혼자 사적인 욕망을 취했나 싶어 괜스레 양심이 찔렸다.
나는 그런 적 없는 척, 뻔뻔스레 웃으며 그의 뺨을 향해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인제 보니 마음고생을 꽤 했는지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눈 밑이 그늘지고 뺨이 해쓱한 것이 괜히 마음 아렸다.
나는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뭐예요. 마음 아프게. 굶으셨어요?”
“입맛이 없어서.”
“잘 챙겨 드셨어야죠. 선왕 전하랑 장기전 치르려면 체력은 필수예요.”
“그 빌어먹을 늙은이…….”
선왕이 했던 일이 떠오른 듯, 그는 나직이 욕설을 뇌까렸다.
갑자기 돌변하려는 분위기에 나는 황급히 그를 진정시켰다.
“그래도 이렇게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루카 핑계를 대긴 했지만.”
“조금만 더 늦으셨더라면, 전하를 협박하려 했습니다.”
“선왕 전하를요?”
“아뇨. 국왕 전하 말입니다.”
뤼디거는 멀끔한 낯으로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평소보다 해쓱해서 그런지, 깊이 팬 눈두덩이 속 청회색 눈동자가 유난히 더 살벌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협박하시려고 했는데요?”
“선왕 전하와의 사이를 중재해 주든가, 아니면 빈터발트에 대한 공개적인 모욕으로 알고 가문 차원에서 대응할 거라고 할 계획이었습니다. 럼가트에서 쓰는 연료 대부분은 북부산이니까요. 일단 시범적으로 그것부터 공급 중지하려고 했죠.”
저기요. 그쯤 되면 반역 의사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요…….
할 말을 잃은 나는 입만 뻐끔대며 뭐라 답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일단은 자리를 옮기고 보자.
계속해서 문 앞에서 끌어안은 채다 보니, 이야기를 계속하기가 좀 그랬다.
나는 소파 쪽으로 뤼디거를 잡아끌었다. 뤼디거는 목줄 잡혀 끌려오는 대형견처럼 내 뒤를 얌전히 따라왔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쉰 뒤,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하여튼……. 제가 갑자기 이렇게 돼서 뤼디거 씨도 당황하셨겠어요. 저도 제가 왕족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글쎄요. 저한테는 당신이 왕족이든 평민이든 별 상관없는 일인지라.”
아, 진짜. 이놈의 화법!
만약 뤼디거가 나를 좋아한다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하긴 그렇겠지. 내가 뭐라도 된다고 그가 당황했겠어.’라며 열심히 삽질했을 게 분명했다.
지금에야 ‘왕족이든 평민이든 전 당신을 좋아합니다’라는 말로 읽히지만 말이다.
이게 바로 적응의 힘인가? 내가 드디어 뤼디거에게 적응한 것일까?
“다만 선왕 전하의 비호에 들어가는 건 좀 골치가 아프군요. 물론 유디트 씨에게 선왕이라는 뒷배가 생기는 일이니 안심도 되지만…….”
뤼디거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의 말 뒤에 숨겨진 못마땅함이 절로 느껴졌다.
“하여튼 선왕 전하는 어떻게든 처리해야겠습니다. 저희 가문을 못마땅히 여긴다는 건 잘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번거롭게 될 줄이야.”
상대가 왕족이어도 화법이 가감 없구나, 이 사람.
뤼디거의 일관적임에 감탄한 나는 혀를 내둘렀다.
이런 사람이 나 때문에 선왕에게 잘 보이겠답시고 연회장에서 열심히 선왕의 장단에 맞췄다 이거지. 그리 생각하니 한층 더 감격이었다.
물론 선왕 때문에 감금되다시피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 해서 선왕의 가호를 받는 것이 마냥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왕 덕에 로이텐과의 언쟁이 무마된 것도 그렇고.
역시 제일 큰 장점은 나중에 내가 뤼디거와 유의미한 관계가 된다 하더라도 다들 흰 눈 뜨고 보는 대신 루카로 인한 정치적 결합이라고 이해해 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추문보다야 정략적 결혼 쪽이 훨씬 낫지. 암, 암. 그렇고말고.
뭐, 아직 뤼디거의 고백에 답도 안 한 지금으로서는 결혼이란 그저 설레발일 뿐이지만…….
그, 그래도 뤼디거는 분명히 내가 좋다면 결혼할 의사가 있다고 했단 말이야!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게 아니라고!
우리 아까 격렬한 포옹도 했잖아! 충분히 겨, 결혼까지 생각할 만한 관계라고!
괜스레 찔린 나는 애써서 자기 합리화를 했다.
짝사랑 경력 때문인지, 너무 과한 진도를 나가는 것 같으면 머릿속에서 자체 심의가 들어온단 말이야.
예를 들어…….
‘너무 나대지 마라.’
‘깝치지 마라.’
‘뤼디거는 아직 동의 안 했다.’
이런 식으로.
역시 내 마음의 목소리가 제일 무섭다.
그다음은 루카.
걔는 종종 생각지도 못한 발언을 툭툭 한단 말이지.
하여튼 최악을 대비하는 내 성격상, 장밋빛 미래에 빠져 있는 것도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출입 금지령은 일단 요청을 올려보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그래. 일단 지금은 선왕이 뤼디거의 왕궁 출입 금지령을 철회하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걸 해결하지 않고선 뤼디거와의 장밋빛 미래는 정말로 머나먼 일일 뿐이니까.
그리고 뤼디거가 혹여나 죽을지도 모르는 일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하고…….
아, 맞아. 나 여기 그거 때문에 온 거지!
뒤늦게 왕궁을 빠져나온 용건을 깨달은 나는 다급히 물었다.
“네……. 아, 맞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당신, 아직 그린할텐 경이랑 결투하진 않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