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96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96화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나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그 이상으로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그의 상처가 언뜻 보였다.
과연 이걸 내가 들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 따위 상관없다 주장하던 그가 아니던가.
내가 누구와 무슨 관계든지, 그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사내의 속내가 정말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나는 오도카니 앉아 침묵으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나의 이기심을 모르는 그는 수줍게 덧붙였다.
“저와 형을 함께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저보다 형을 더 좋아했으니까요.”
“…….”
“아, 물론 당신이 형을 먼저 알았더라도 포기하진 않았을 겁니다.”
뤼디거는 황급히 덧붙였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설핏 보게 된 그의 짙은 외 로움에 순간 울컥거리는 것이 목을 메웠다.
나는 그가 차별을 받고 자란 것에 별생각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냥 무던한 사람이라고. 속세에서 벗어난 듯 욕심 없는 사람이라며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뿐이다.
뤼디거는 원래 그러니까. 그는 주변 사람들 반응에 신경 안 쓰니까.
‘저에 대해 궁금합니까?’
‘당연하죠.’
뤼디거가 마차에서 고백했을 때, 나눴던 대화가 유난히 시리게 가슴을 후벼 팠다.
나는 정말 그에게 관심이 있었던 걸까. 그냥, 그를 사랑한다는 나 자신에 취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를 정말로 생각했더라면 그의 과거에 대해 그렇게 가벼이 생각하고 넘어갈 순 없었을 텐데.
물론 그의 과거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다 하더라도 혼자만 곱씹을 뿐, 그에게 직접 물어볼 만한 사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적어도 이렇게 부끄럽진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제가 왜요?”
“울 것처럼. 제가 당신을 울린 겁니까?”
뤼디거가 당황하며 물었다.
나는 황급히 얼굴을 정돈했다.
하지만 이미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쉬이 제자리로 돌아가질 않았다.
“아뇨. 아니에요. 그냥……. 제가 당신 형을 먼저 알았다 하더라도, 전 여전히 당신을 좋아했을 거예요.”
나는 힘겹게 답했다.
요나스 따위에 비하면 당신이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 당신이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루카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그렇게 내가 주저하며 간신히 말을 끝맺기가 무섭게, 뤼디거의 기세가 돌변했다.
“절 좋아합니까? 정말로?”
그는 무척이나 다급한 듯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질문에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갑작스레 내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뻣뻣이 굳었기 때문이다.
코끝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 그의 반질반질한 청회색 눈동자에 내가 가득 찼다.
조금만 내가 얼굴을 앞으로 내밀면 그와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내쉬는 숨결이 서로의 입술을 간지럽히며 섞이는 거리. 언제 입술이 닿아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급해 잠시 말을 곡해했습니다. 이런 무례를.”
뒤늦게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깨달은 뤼디거가 사과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기묘한 흥분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는 콩콩 뛰는 심장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그 상태로 조금만 더 머물렀다면 내가 먼저 그의 목에 팔을 감았을지도 몰랐다.
어색한 분위기가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한참을 불편한 침묵 속에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무어라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불쑥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노크 소리가 반가웠지만, 뤼디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의 기세가 신경질적으로 돌변했다. 그는 심기 불편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지?”
“죄송합니다, 도련님. 다름이 아니라 급한 일이 있어…….”
빌헬름이었다. 항상 절도를 지키는 그답지 않게 다급함이 느껴졌다.
방에 들어선 낯을 보니 더했다. 아까 내가 저택에 왔을 때보다 더 놀라 혼비백산해 있었다.
“무슨 소란인가, 빌헬름?”
“도, 도련님이!”
빌헬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뤼디거 또한 마찬가지인지, 미간을 찌푸리곤 캐물었다.
“내가 뭘 말이냐?”
“막내 도련님이!”
왜 여기서 루카 이야기가 나와? 루카는 왕궁에 있는데?
깜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루카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막내 도련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연신 소리를 내어 숨이 찬지, 빌헬름은 헐떡이며 답했다. 보아하니 급한 소식을 안고 여기까지 뛰어온 모양새였다.
이쯤이면 노인 학대다.
빌헬름을 좀 쉬게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루카에 관한 일이니만큼 상황이 달랐다.
여전히 빌헬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나는 의아히 되물었다.
“네? 어디를요?”
“여기를.”
그때, 빌헬름의 뒤에서 루카가 불쑥 나오며 말했다.
나는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순금처럼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은 어떻게 봐도 루카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바로 루카에게 달려갔다.
“루카!”
“분위기 좋았던 모양이네. 내가 와서 방해였겠어.”
루카는 습관처럼 나와 뤼디거 사이에 뭐라도 있다는 듯 빈정거렸다.
물론 분위기가 좋……긴 좋았고! 방해……가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얘가 은근슬쩍 말 돌리려고!
나는 루카의 팔을 잡아당겨 소파에 앉혔다.
분명 처음에는 소파 가죽이 조금이라도 닳을까 안달복달했었는데, 상황이 너무 정신없이 돌아가다 보니 어느새 그런 건 안중에 없어진 뒤였다.
“아니, 여길 어떻게 온 거야! 너 분명 왕궁에 있었잖아!”
“이모한테 비밀통로를 알려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루카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 또한 어이없이 루카를 보았다.
그러는 사이 뤼디거 홀로 만족스레 눈을 빛냈다.
“비밀통로……. 흠.”
이 사람이 뭘 그리 기특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거야?
애가 혼자서 그 먼 길을 왔다는데! 납치라도 당했으면 어쩔 뻔했어!
나는 뤼디거를 향해 눈을 흘기고는, 다시 루카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캐물어 봐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거기서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당연히 마차 잡아타고 왔지. 설마 그 먼 거리를 걸어왔겠어?”
“무슨 돈으로?”
“돈?”
루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품에서 묵직한 벨벳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눈에 익은 것이었다.
저건 분명, 기차에서 뤼디거에게 빼앗은……!
아니나 다를까, 루카는 그 묵직한 주머니를 흔들며 말했다.
“아저씨 덕에 비상금은 넉넉해서 말이야.”
“아…….”
나는 나직이 탄식했다.
그래. 그때 뤼디거의 주머니를 아주 탈탈 털어갔었지.
궁금증이 풀렸다지만 걱정마저 풀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루카의 이곳저곳을 살펴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혹시 뭐 험한 일 당한 건 없고? 마부나 다른 사람들한테 돈 주머니 그대로 보여준 건 아니지?”
“당연하지. 누가 돈을 전부 보여줘? 그리고 빈터발트 가로 가 달라 하는데 누가 나한테 사기를 치겠어.”
“그래도…… 위험하잖아. 다신 이러지 마. 알았지?”
“내가 애도 아니고, 집도 혼자 못 찾아와?”
열 살짜리가 대중교통을 타고 통학한다고 해도 걱정하는 게 보통 어른들이거든요……?
하물며 지금은 CCTV도 없는 시대가 아니던가.
이런 곳에서 애 혼자 마차를 타고 그 먼 거리를 움직였다는데 걱정 안 하는 쪽이 이상했다.
그러니 빌헬름도 펄쩍 뛰며 달려온 것이었을 테고.
하지만 지금 이 방에 있는 사람 중 내 걱정의 십만 분의 일이라도 공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에 대해 어느 정도 포기한 나는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같이 간다고 하지 그랬어. 도대체 왜 온 거야?”
“뭐……. 가끔은 시간 차가 필요할 때도 있거든. 현장 검거라던가.”
도대체 무슨 현장이요?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떡 벌리곤 루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루카는 그런 날 보며 픽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아침에 같이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누구누구 씨가 꼭두새벽부터 출발해 버렸지 뭐야.”
“미, 미리 말했으면 좋았잖아!”
“안 데려가려고 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아침에 떼쓰려고 했지.”
떼를 쓸 예정이었다고 말하는 루카의 태도가 참으로 당당하기도 했다.
평소엔 어른스러운 척 굴면서, 이럴 땐 어린아이의 특권을 잔뜩 누린단 말이지.
루카의 영악한 선택적 취사에 할 말을 잃었지만, 그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려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나는 말을 돌렸다.
“그래. 그래서 비밀통로를 이용해서 나올 정도로 급한 일이 뭐였어?”
“내가 부탁한 걸 들어줄 만한 어른이 이 아저씨밖에 없잖아.”
루카는 뻔뻔스레 고개를 치켜 들곤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뤼디거에게 뭐라도 맡겨둔 사람 같았다.
저걸 뤼디거가 뭐라고 강하게 한마디 해줘야 하는데.
그러질 않고 가만히 두고만 보니까 루카가 저렇게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려고 하지.
뭐, 그러는 나도 루카가 반말 하는 걸 그냥 두고 보고 있지만.
그나마 뤼디거에게 반말하지 않는 것 정도가 다행일까.
루카의 예절 교육에 큰 문제를 느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대화를 듣고 있던 뤼디거가 담담히 말했다.
“삼촌.”
“뭐?”
“삼촌이라고 부르면 부탁을 들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