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ry changing the genre RAW novel - Chapter 98
장르를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98화
그렇다 해서 뭐 별다른 이야기가 오간 건 아니었다.
나는 뤼디거와 아까 하다만 대화를 계속하고 싶었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까.
하지만 루카가 곁에서 두 눈 형형히 뜨고 있는 한은 무리였다.
물론 루카에게 잠깐만 자리를 비켜달라 하긴 했다. 당연지사, 돌아오는 대답은 거절이었다.
“내가 빠져야 하는 이유 있어?”
“애가 자꾸 어른들 대화에 끼어드는 거 아냐!”
“어른들이 어른들 대화라고 하는 건 대부분 돈 얘기, 정치 얘기, 아니면 연애 얘기 아냐? 당연히 돈 얘기는 아닐 테고, 정치 얘기면 나랑도 관련 있으니까 빠질 수 없고. 그게 아니면 연애 얘기인데. 설마…….”
루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확한 루카의 추론에 지레 찔린 나는 펄쩍 뛰었다.
“아니, 별것 아닌 대화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민망한 답이었다.
루카를 설득할 만한 좋은 변명거리가 어디 없나…….
그렇다고 애를 윽박질러서 억지로 납득시키고 싶진 않고. 역시 차근차근 달래는 쪽이…….
하지만 루카의 말발이 너무 좋은 게 문제였다.
나로서는 루카를 말로 이길 방도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혹시 뤼디거라면……!
기대를 품고 뤼디거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루카의 개입을 포기했는지, 아니면 아랑곳하지 않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있었다.
내 생각에 후자 같았다.
괜스레 루카가 있는 곳에서 아까처럼 좋아하는 이유 500선 모음집 같은 발언이라도 하면 큰일이다.
지금도 나와 뤼디거가 단둘이 있는 걸 질색하며 바득바득 끼어들려고 하는데.
그래. 어차피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다.
나는 한숨과 함께 미련을 털어 내곤, 우리 셋이 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떠올렸다.
그리고 답은 빨랐다.
캐치볼이나 해야지, 뭐.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긴 하지만, 또 오래간만에 하는 캐치볼에 신이 났다.
처음엔 뤼디거와 루카가 짝을 이뤘다. 물론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삼촌, 조카 사이를 좀 원만하게 만들기 위한 나의 노력이었을 뿐.
내가 억지로 붙였기 때문일까. 공이 오가는 동안 퍽, 퍽, 미트에 공 부딪히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뤼디거야 애초에 스몰토크 같은 데에는 재주가 없고, 루카는…….
입을 꾹 다물고 뚱해 있는 것이 이 선택에 대한 반감을 여실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카드 게임을 하자고 주장했는데, 내가 그걸 묵살한 것 때문에 뾰로통해진 모양이다.
그래도 성실하게 공을 주고받는 게 신기하다니까. 옆에서 보고 있던 나는 감탄을 섞어 루카를 추켜세웠다.
“그래도 많이 늘었네? 예전엔 다섯 번 정도 하면 놓치더니.”
“흥. 이 정도야 금방 익숙해지지.”
루카는 콧대를 높이며 뻔뻔스레 답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주의력이 떨어졌는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을 놓치고 말았다.
루카가 실수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앗, 하는 새 빠져나가는 공을 보는 허망한 루카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배를 잡고 웃어버렸다.
“하하하하! 집중해야지!”
“너무 웃는 거 아냐?”
루카는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굴러가는 공을 잡았다.
그러곤 글러브를 손에서 빼며 말했다.
“나 이제 안 해.”
“왜. 내가 웃어서 삐쳤어?”
“삐친 게 아니라 지친 거야. 지친 거.”
“벌써 지쳐?”
“이모가 너무 체력이 좋은 거야. 나 정도면 괜찮거든?”
루카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았다.
약간 질린다는 시선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턱을 긁적였다.
루카와 바통 터치한 내가 글러브를 손에 끼는 사이, 뤼디거는 오도카니 서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2차전이 시작되었다.
뤼디거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 속도로 공을 던졌다.
배팅 머신이 따로 없다니까.
군인이라 그런지, 뤼디거도 어지간히 체력이 좋았다. 제구도 좋고, 속도도 좋고. 야구 했어도 잘할 것 같은데.
승리욕이랑 집요함이 없어서 안 되려나…….
그래도 사격 실력이 그 정도쯤 되려면 단순 재능만으로는 안 된다.
연습도 꾸준히 했을 테니, 그런 노력으로 없는 승리욕을 채우면 어떻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몽실몽실 망상하던 찰나, 떠오른 궁금증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 결투를 43 번이나 했다면서요? 뭘 하느라 적이 그렇게 많았던 거예요?”
“아아. 결투 말입니까.”
뤼디거는 여상하게 답했다.
마치 아침 메뉴에 대해 질문받은 사람 같았다.
“그나저나 43번이라니. 저도 처음 듣는군요.”
“역시……. 43번은 과장된 건가요?”
“아뇨. 한 그쯤 될 것 같은데. 그런 걸 기억하고 세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아……. 물론 그랬을 것 같긴 했다.
멍청한 질문을 했네. 나는 작게 반성했다.
그사이에도 공은 떨어지지 않고 서로의 글러브 사이를 오갔다.
“결투 대부분은 형의 대리전이었습니다.”
“대리전이요?”
“결투에 대리 투사를 내보낼 수 있거든요.”
나는 입을 딱 벌렸다. 너무 깜짝 놀라서 공을 놓칠 뻔했다.
요나스 이 새끼, 설마 사고는 제가 치고 뒤 청소는 뤼디거에게 맡긴 거야?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형도 나름 불륜 같은 일과는 최대한 얽히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여자가 주위에 하도 많다 보니 질투한 사내들 또한 많았거든요.”
“불륜을 안 한 건 좀 의외네요.”
그런 도덕관념 같은 건 전부 내다 버린 인물인 줄 알았는데.
“단지 귀찮은 일에 엮이는 걸 싫어했을 뿐이겠지, 뭐. 귀찮은 걸 싫어하는 놈이 여자는 부지런히도 만나고 다닌 건 또 우습지만.”
루카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제야 나는 루카가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애 앞에서 아빠 욕하는 게 정서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던지라 뒤늦게 아차 했다.
“그래도 그렇지, 놈이 뭐야, 놈이. 너한테는 그래도 아빠인데.”
“알 게 뭐야?”
루카는 그리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요나스를 조금도 부친이라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단 타산지석의 모델이기는 하지…….
왕실 연회장에만 백삼십 명의 여자들이 요나스와 과거가 있었을 정도니까.
그걸 생각하면 43전으로 끝난 게 용할 지경이었다.
“그럼…… 대부분이 아닌 경우는?”
“주로 군에 입영 초기에 있던 일입니다. 제가 비교적 어린 나이에 장교가 되었다. 보니……. 불복하는 이들과 다툼이 있었고, 명예재판소의 판결로 결투를 하게 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뤼디거는 그리 말하며 눈을 깜빡였다.
마치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것 같았는데, 내 눈에는 양가죽을 뒤집어쓴 늑대로밖에 안 보였다.
‘가증스럽긴……. 그런 점도 점점 귀여워 보이는 게 문제지만.’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더 이상 결투나 요나스에 관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우리 나중에 크리켓 경기나 보러 갈까요?”
크리켓은 야구와 엇비슷한 종류의 스포츠였다.
처음 글러브와 공을 보고 이 세계에도 야구와 비슷한 경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크리켓이었다.
지금 이 글러브도 크리켓용 글러브였다.
물론 규칙만 비슷하고 거의 다른 스포츠이긴 하지만, 스포츠 자체에 목말라 있던 나로서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했다.
나중에 일이 다 잘 풀리고……. 수도에 온 김에 경기도 볼 수 있으면 좋지.
그리 생각한 나는 별생각 없이 제안했다.
“언제든지. 유디트 씨와 함께라면 좋습니다.”
좋아. 직관하러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신이 난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공을 던졌다.
뤼디거랑 같이 직관이라니, 왠지 직관 데이트 같은 느낌도 나고…….
그렇게 내가 데이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루카가 치고 들어왔다.
“나도 갈 거야. 둘이서 데이트 할 생각이라면 꿈 깨시지.”
아오, 깜짝이야. 무슨 마음이라도 읽나?
“다, 당연히 너도 데려갈 생각이었거든?”
가슴 철렁한 나는 바로 목소리 높여 외쳤지만, 한동안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런데……. 루카는 왜 그렇게 뤼디거라면 이를 가는 걸까?
물론 싫어한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뤼디거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움을 요청할 때 제일 먼저 뤼디거를 떠올린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알쏭달쏭한 루카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때, 빌헬름이 왔다.
“마님, 막내 도련님. 이제 출발하실 때입니다. 타고 오신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는지, 하늘을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제 슬슬 일어서지 않으면 왕궁에서 있을 선왕과의 저녁 식사에 늦을지도 몰랐다.
글러브를 뺀 나는 오도카니 서 있는 뤼디거에게 글러브와 공을 넘겼다.
뤼디거는 한 손으로 글러브들을 움켜쥔 채, 다른 손으로 내 치맛자락 끝을 슬그머니 잡으며 중얼거렸다.
“보내드리기 싫습니다.”
“안 돼요.”
갑자기 이런 연인의 작별 멘트, 좀 곤란한데요!
나는 루카의 눈치를 보며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그런 내 불안한 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뤼디거는 애원하듯 간절히 말했다.
“그러면 제가 왕성까지 에스코트라도 하게 해주십시오.”
“그것도 안 돼요. 선왕 전하께서 당신이 같이 왔다는 걸 알게 되면 어찌 된 거냐 또 캐물으실 거예요. 그냥 몸을 낮추고 기회를 보는 쪽이 나아요.”
“그건 저도 압니다만…….”
뤼디거는 불만스러운 기색을 노골적으로 흘리며 말끝을 흐렸다.
“이모도 아저씨 그만 좀 받아 줘. 계속 받아주니까 저렇게 어린애처럼 우기는 거 아냐.”
갈 준비를 끝낸 루카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나를 애 취급하는 걸 넘어, 이제는 뤼디거도 애 취급하기로 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