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ing with the Gods RAW novel - Chapter 115
* * *
“흐아아암-.”
스사노오가 하품했다.
눈앞에 있는 자의 이야기가 지루하고 따분한 탓이었다.
‘이런 식으로 보여 주겠다는 건가.’
누구에게 부탁을 받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썩 나쁘지 않았다.
상대를 모르는 입장이라면 직접 그 당시 상황을 보여 주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일 테니까.
“그러니까, 아서라는 그놈을 죽여 달라?”
“예. 부탁드립니다.”
“하이랭커도 아닌 코흘리개를, 내가 직접? 왜 그래야 하지? 아니, 그보다…….”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스사노오의 투명한 눈이 로브를 걸친 누군가를 바라본다.
“넌 뭐 하는 놈인데 나한테 말을 거냐?”
스아아아아-.
거대한 살기가 수천 자루의 칼날처럼 로브인의 몸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스사노오의 군대가 파도처럼 들썩였다.
그르르르르-.
절그럭, 절걱-.
스카악-.
수천의 데스나이트와 육체를 가지지 못한 망자들, 그리고 뼈로 이루어진 여러 괴물들까지.
가히 일인군단의 위세였다.
스사노오는 스스로의 힘과 이 군대의 힘으로 57위라는 랭킹에 도달했다.
압도적인 존재감.
“제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지요.”
하지만 로브인은 겁을 먹지 않았다.
상대는 스사노오였다.
그에게 죽는 건,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죽게 되면 이 많은 군대 속의 한 마리 언데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중요한 건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
스사노오의 눈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떠올랐다.
탑을 끝까지 올라 랭커가 되고, 시스템에 의해 영원에 가까운 삶을 부여받았다. 그 후로 무료하고 재미없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자신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게 뭐지?”
“전쟁을 원하시지 않습니까?”
“전쟁……?”
귀가 솔깃한 단어였다.
로브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탑이, 피로 물들기를, 당신은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스사노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전쟁.
피로 물든 탑.
그로 인해 바뀌게 될 하루하루.
칼질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기만 하면 더 이상 패널티나 관리자의 제제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저, 전장이라는 하늘 아래에서 신나게 놀이를 즐기면 될 뿐이다.
“흥미로운 이야기긴 한데.”
스사노오가 손짓했다.
후웅-.
로브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모자가 뒤로 벗겨졌다. 괴기한 녹색 피부위에는 동공 없는 눈동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 녀석…….’
스사노오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유원의 표정이 흔들렸다.
반면, 스사노오는 의문스러운 듯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랭커인가?”
특이한 얼굴.
아니,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저런 녀석이 있다면 분명 어느 정도 소문이라도 돌아야 정상일 텐데.
“저는 탑에 속하지 않은 존재.”
자신의 얼굴이 부끄럽기라도 한지, 그는 다시 로브의 모자를 뒤집어쓰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제 정체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하긴.”
“기사왕의 죽음은 아주 작은 씨앗일 뿐입니다. 하지만…….”
로브인의 모습이 천천히 흐려졌다.
스사노오는 그를 붙잡을 생각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신기루처럼 사라져 가는 로브인의 모습.
“씨앗은 차차, 곳곳에 뿌려질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로브인의 모습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꽈아악-.
앞으로 뻗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사노오는 자신의 손바닥에 잡힐 듯했던 로브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씨앗, 씨앗이라…….”
짜릿한 기분.
“으하, 으하하, 하하하!”
정말 오랜만에 시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사왕 아서.
상위 랭커이자 빠르게 랭킹을 올리고 있는 브리튼의 국왕.
길드 ‘원탁’의 주인.
“그래, 좋다.”
스사노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로가 만든 언데드 군단과 싸우기를 반복하며,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그가 오랜 공백기를 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마음대로 춤춰 주마.”
* * *
스으으-.
넓게 깔린 안개가 사라졌다.
스사노오의 기억을 통해 보던 세계가 사라지자, 원래의 풍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이게 전부다.
스사노오의 말이 이어졌다.
-그 녀석이 뭐 하는 놈인지는 나도 모른다. 덕분에 저놈과 싸워 볼 수 있었고, 꽤 재미도 봤지.
유원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곳에는 체념한 듯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서가 보였다.
대체 몸 하나 때문에 얼마나 더 슬퍼하려는 건지.
다음에는 그래도 좀 더 쓸 만한 몸을 구해 줘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바라는 걸 얻었나?”
-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쟁이 시작됐지.
“기간토마키아?”
-꽤 즐길 수 있었다. 하데스, 그놈이 끼어드는 바람에 더 놀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스사노오는 기간토마키아에 끼어들었다가 하데스에게 제지당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스사노오 같은 성격에 거인족과 올림포스,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 싸울 리가 없을 테니까.
하데스는 그런 스사노오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것이고.
-어쨌든 원하는 걸 얻지 못했으니 유감이군. 넌 아마, 저 녀석의 죽음에 삼귀자가 얽혀 있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말이지.
“처음에는 그랬지.”
생각이 많아졌다.
“그런데 생각보다 판이 더 커서 지금 머리가 아파.”
-판이 크다고?
로브인의 계획인 탑을 피로 물들일 전쟁을 말하는 걸까?
하지만 이상하게 스사노오는 유원이 뜬구름을 잡고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 녀석이 누군지 아는 거냐?
“……알지.”
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아주, 잘.”
-누구지, 그 녀석? 아무리 뒤져도 안 보이던데.
“그럴 거다. 그 녀석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유원은 목소리가 흔들렸다.
최대한 침착해 보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잘되지 않았다.
누군가의 시선을 빌린 것뿐이지만 이렇게 빨리 녀석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리석은 혼돈.’
아수라와 멀린, 비슈누, 그 외에 함께했던 동료들.
마지막 싸움에서 그들이 모두 죽었다. 끝끝내 어리석은 혼돈을 잡기는 했지만, 결국 피로 점철된 싸움일 뿐이었다.
-그 녀석이 누군데?
“이 탑에 흘러 들어온 가장 오래된 신.”
아우터 갓.
유원은 녀석과의 싸움을 떠올리며 다짐하듯 답했다.
“내 친구를 죽였고, 내가 죽인…….”
유원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앞으로 죽일 녀석이다.”
* * *
유원은 1층에 숙소를 잡았다.
침대에 머리를 맞대고 눕자, 그동안 애써 억눌러 놓았던 온갖 생각들이 다 떠올랐다.
도저히 헤파이스토스를 만나러 갈 기분이 아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리석은 혼돈.
사람들은 모두 녀석을 그렇게 불렀다.
‘생각보다 빠르다. 모든 게.’
시계태엽을 사용해 돌아온 후, 유원은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대부분 애초에 동료들과 함께 계획했던 것들.
하지만 예상보다 더 빠르게 계획이 진행되어, 모든 일이 순조롭다 여기고 있었다.
‘아서가 죽은 건 약 천 년 전쯤.’
아서는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스사노오를 통해 기억을 본 건 자신뿐. 아마 아서는 누가 자신을 죽이려 했는지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은 아서의 죽음을 통해 브리튼에 씨앗을 뿌릴 생각이었다.’
씨앗이 뿌려진 지 벌써 천 년이 흘렀다.
꽤 긴 시간.
이 정도 시간이면 씨앗이 뿌리를 내려, 수확을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브리튼을 기점으로 벌어지는 일.’
유원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떠올랐다.
2번째 기간토마키아, 라그나로크, 천계전쟁, 천마대전…….
온갖 사건들이 떠올랐지만 그중 브리튼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사건은 몇 없었다.
단순히 브리튼의 국왕을 바꾸기 위해 이토록 오랜 시간을 들이지는 않았을 터.
탑의 혼란을 바라는 어리석은 혼돈이 뿌린 씨앗이라면 분명, 좀 더 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역시 그거밖에 없나.”
브리튼과 관련된 큰 사건.
몇 개를 떠올리다 보니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유원은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만 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판은 바꿀 수 있다.’
웅-.
유원은 퀴네에에 잠들어 있는 아서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한 시라도 빨리 새로운 몸을 구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아서.
그는 브리튼의 히든카드가 될 것이다.
‘일단은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모든 건 위에 있었다.
* * *
누구나 그렇듯, 잠은 언제 들었는지 모르게 갑자기 빠져든다.
유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게 있다면 유원은 스스로 잠에 들어 있다는 걸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꿈을 꾸더라도 자각몽을 꾸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때 꿈인가.’
유원은 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깜박였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수백 명의 랭커들.
비장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였다. 앞장선 남자가 손등으로 목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두 번째 머리도 잘린 거냐?”
역시, 기억하는 그대로의 말이었다.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은 수염을 가슴까지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었다.
대마법사 멀린.
그는 브리튼의 수호신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유원과 함께 싸워 왔다.
“상관없다.”
“상관없기는. 제 형제가 죽었는데.”
멀린이 혀를 찼다.
안타까움에 그는 머리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수라.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
랭킹 16위의 최상위 하이랭커.
그런 그가, 두 개의 머리가 잘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복수하면 된다.”
“그럼 그놈들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하더냐?”
“상관 마라.”
“고놈 까칠하기는.”
잔뜩 날이 선 대꾸에 멀린은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가 무거웠다.
모두 마지막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였다.
“하긴. 어리석은 혼돈. 다른 놈은 몰라도 그놈은 반드시 잡아야지.”
멀린의 눈에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보랏빛 물결이 보였다.
유원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탑 바깥의 힘이 탑을 집어삼키며, 세상은 바깥의 색으로 물들어져 가고 있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때는 하나뿐이었다.
‘오는군.’
“온다.”
저 멀리.
수많은 탑 바깥, 아우터 갓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아수라가 앞으로 나섰다.
두 형제의 죽음 때문일까?
다른 때에도 싸움이라면 가장 먼저 앞장서던 그였지만, 오늘따라 몇 걸음은 더 앞으로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유원은 아수라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아니.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저벅-.
유원은 아수라를 따라 걸었다.
어쩌면 이 꿈에서라도, 결과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별일이군. 네가 먼저 나서기도 하고.”
아수라는 그런 유원의 반응에 의아한 반응이었다.
근래 들어 유원이 참여하는 전투가 많아졌다지만, 이렇게 앞장서 싸우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게.”
후회 가득한 목소리.
“진작 이럴 걸 그랬다.”
그랬다면 어쩌면, 이중 몇 명은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화르륵-.
꿈인 덕분일까?
화안이 유원의 눈에 떠올랐다. 붉게 일렁거리는 시야 속,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아우터 갓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서 와라.’
어리석은 혼돈이, 아우터 갓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몇 번이고 죽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