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ing with the Gods RAW novel - Chapter 120
* * *
의식이 흐릿했다.
눈앞에 캄캄한 가운데, 희미하게나마 메시지가 들려왔다.
[21층의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다음 층으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레벨이…….]희미한 메시지는 꼭 환청처럼 느껴졌다.
툭-.
뺨에서 느껴지는 촉각.
눈이 저절로 떠졌다.
처음 눈에 보인 건 동굴의 까만 천장이었다. 21층의 시험 무대와 동일한 장소였다.
‘시험이…… 어떻게 된 거지?’
남자는 흐리게 눈을 뜨며 눈알을 굴렸다.
정신이 번쩍 드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깼냐?”
“허억!”
바로 옆으로 유원의 얼굴이 보였다.
진짜가 눈앞에 있다.
방금 전, 자신이 그를 사칭해 시험을 치렀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 김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이름.
“이름.”
그때, 유원이 그의 이름을 물었다.
“예, 예?”
“이름이 뭐냐고.”
“마, 마모스입니다.”
화륵-.
불꽃같이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한 마모스는 움찔 몸을 떨었다.
아까도 그랬지만 이상하리만치 저 눈을 마주하면 모든 걸 꿰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시험이 끝난 걸 보면 도플갱어는 아닌 것 같고…….”
유원은 눈을 찌푸렸다.
“그런데 또, 도플갱어가 아닌 것도 아니고. 넌 뭐지?”
“저…… 도플갱어 맞습니다.”
“맞아?”
“예. 플레이어인 것도 맞지만요.”
도플갱어임과 동시에 플레이어인 존재.
유원은 그 대답에 비로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악마족 순혈이었군.”
“……예.”
악마족 플레이어.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분명 화안을 통해 본 녀석의 정체를 도플갱어인데, 다른 도플갱어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훨씬 확인하기도 까다롭고 지능도 높아 보였다. 무엇보다 도플갱어가 시험에 참가하는 플레이어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신하다니, 유원이 알기로 그런 경우는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어느 쪽 핏줄이지? 보통 도플갱어는 아닌 것 같은데.”
녀석의 변장은 꽤 완벽했다.
목소리를 비롯한 겉모습은 물론이고 화안으로 쉽게 확인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변신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건 21층의 플레이어 가 가질 만한 능력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분입니다.”
“그분?”
“벨리알…… 도플갱어들의 왕이요.”
벨리알.
아는 이름이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하이랭커 벨리알. 도플갱어의 왕이자 거짓의 군주. 거대 길드 마왕의 일곱 마왕 중 하나.’
생각보다 더 큰 악마가 위에 있었다.
길드의 힘만 놓고 보면 올림포스와 비견되는 게 바로 마왕이었다. 그중 벨리알의 핏줄이라면 하르간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물론, 올림포스와는 달리 마왕은 여러 군주들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런 녀석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말하기 좀 복잡해요.”
대답하기 곤란한 듯, 마모스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얗고 창백한 피부에 앳된 얼굴.
생긴 건 꼭 10대 중반의 어린아이 같았다. 방금 전까지 플레이어들을 한 명씩 처형시키려던 잔인함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거짓말은 아니다.’
만약 이게 거짓말이라면 마모스가 지닌 도플갱어의 능력과 그의 실력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저,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긴 한데…….”
마모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유원의 눈치를 살피고는 말했다.
“팬입니다. 진짜로요.”
“팬?”
“네. 무림대전 전부터, 랭킹을 보고 반했어요. 무림대전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완전 팬이 됐고요.”
“……?”
반짝반짝 빛나는 마모스의 눈빛.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아직까지 유원은 화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화안은 상대가 작정하고 거짓말을 하려 해도 어느 정도 진실을 판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투명해서야.
‘이건 예상 못한 말이군.’
자신을 흉내 냈던 게, 단순히 시험에서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마모스는 굳이 자신의 흉내를 내지 않아도 21층의 시험 정도는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군주급 악마의 혈통을 타고난 그는 웬만한 상위 층계의 플레이어들과 비견할 만했으니까.
“그렇다고 팬이니까 봐 달라는 말은 아니고요, 제가 잘못한 것도 알고 있고…….”
머리를 긁적이던 마모스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반성할게요.”
유원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짐짓 무서운 투로 물었다.
“이 일로 내가 널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그런 거였으면 제가 깰 때까지 기다리시지도 않았겠죠.”
유원은 희미하게 웃었다.
최소한의 눈치나 생각도 있다. 아직 어리긴 해도 핏줄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마왕의 핏줄이 왜 이런 데서 돌아다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
“너, 나한테 목숨 한 번 빚진 거다.”
“……?”
마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원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살려 주는 건 그렇다 쳐도, 분명 원하는 게 있어서 기다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였다.
“번호 찍어라.”
“예?”
갑자기 번호라니.
얼떨떨한 표정의 마모스에게 유원은 플레이어 키트를 내밀었다.
“살려줄 테니까 너, 내 일 하나만 도와라.”
* * *
마모스에게 플레이어 키트 번호를 받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세간에는 다시 김유원이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숙면에서 깨어난 유원은 눈을 떴다.
웅-.
플레이어 키트가 진동을 울렸다.
-저도 다음 시험 참가 신청했습니다! 충성!
마모스에게서 온 문자.
마지막 ‘충성’이라는 두 글자가 마냥 어색하게 느껴졌다.
팬이라더니.
그냥 살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찮은 성격이었네.”
유원은 길게 하품하며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는 플레이어 키트의 화면을 옆으로 넘겼다.
띠딕, 틱-.
남은 시험 일정들이 검색되었다.
22층과 23층, 그리고 24층.
25층까지 올라가기 위해 남아 있는 시험은 모두 세 개였다.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열흘 후에 모든 시험을 끝낼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유원은 시험에서 떨어질 경우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고작해야 20층대의 시험.
테세우스 정도 되는 랭커가 직접 나서서 방해를 하지 않고서야 시험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험 일정은 나쁘지 않다.
올림포스가 바보도 아니고, 슬슬 관리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터.
거기다 지금쯤이면 제우스와 포세이돈의 기싸움도 제대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나가 더 있군.’
유원은 플레이어 키트에 도착해 있는 문자를 하나 더 발견했다.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었다.
[하르간]무림대전 전까지만 해도 종종 연락을 하던 그가, 꽤 오랜만에 문자를 보내왔다.
-나도 지금 22층에 내려와 있다. 한 번 보자.
“……?”
난데없는 연락이었다.
하르간은 탑을 오르는 데 속도를 올렸다. 한 층 한 층 시험에 공을 들이며 성적에 집중한 유원과는 달리, 하르간은 최대한 빨리 랭커가 되는 게 목적이었다.
22층이면 아마 꽤 아래로 내려왔을 터.
‘무슨 일이지?’
어차피 시험까지는 시간이 며칠 남아 있었다.
브리튼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딱히 할 일도 없는 상황. 유원은 하르간의 문자에 답했다.
-커피는 네가 사라.
-중심가에 있는 비치 클럽으로 와라. 거기가 제일 낫더라.
이미 22층을 지나간 하르간은 아무래도 이쪽 지리를 꽤 잘 아는 모양이었다.
비치 클럽이라면 유원도 몇 번 기억에 있던 곳이었다. 커피로 유명한 22층에서 맛이 좋기로 유명한 장소였다.
대충 몸을 씻고 나온 유원은 곧장 약속 장소로 향했다.
바깥에 위치한 테라스에는 하르간이 이미 차를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왔냐?”
유원의 차로 보이는 커피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 있었다.
반면, 하르간의 차는 미지근하게 식은 데다 거의 바닥이 보였다.
유원은 하르간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언제부터 있었지?”
“조금 됐지.”
“왜 미리 혼자부터?”
“할 것도 없고, 기분 전환 겸.”
하르간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두꺼운 시가 담배.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원래 폈냐?”
“피긴 했지. 일 년에 한두 개비 정도밖에 안 하지만.”
“그걸 왜 지금?”
“그냥. 생각나서.”
탁, 치지직-.
하르간이 손가락을 튕기자, 시가의 끝에 불이 붙었다.
두꺼운 연기가 뿜어졌다. 하르간은 입안에 모은 담배연기를 어색하게 뱉어 냈다.
“어디까지 올라갔냐?”
“나? 34층.”
“빠르군.”
“여기서부터가 문제지. 슬슬 올라가기가 힘들어.”
말로는 엄살을 부리지만 벌써 34층이면 엄청난 속도였다. 아마 역대 하이랭커들 중에서도 이만한 속도로 탑을 오른 자는 없을 것이다.
“겸손도 그만하면 재수 없다.”
“딱히 겸손은 아니야. 나도 나 잘난 건 아니까. 그리고 그게 네 입에서 나올 말이냐?”
“하긴.”
시시껄렁한 이야기였다.
유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셔 정신을 맑게 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이 낮은 곳까지는 무슨 일이냐? 얼굴이나 한 번 보자고 온 것 같지는 않고.”
“바다의 돌, 네가 가져갔다면서?”
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이야기였다.
특히, 하르간처럼 올림포스 내에서 입지가 상당한 플레이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굳이 부정하거나 감출 필요도 없다.
“넌 알지 모르지만 덕분에 올림포스가 개판이 났다.”
“개판이라니?”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관계가 박살이 났지. 덕분에 요즘 분위기가 뒤숭숭해.”
장난스레 말하긴 했지만 결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르간이 말한 아버지와 큰아버지.
제우스와 포세이돈, 그 둘은 이 탑을 쥐고 흔들 만한 힘과 권력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그런 둘의 관계가 갈라졌다는 건 탑에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는 전조 현상과 다름없는 것이다.
“뭐, 덕분에 넌 당분간 안전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분간일 뿐이지.”
“알고 있다.”
“너, 진짜 죽을 수도 있어.”
하르간의 말에 유원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르간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이라도 선택해라. 돌을 가지고 올림포스에 고개를 숙이든, 아니면 아스가르드나 천계처럼 널 지켜 줄 수 있는 곳을 찾든.”
“끝이냐?”
“뭐?”
“할 말 다 했으면 이만 일어나야겠다.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니.”
“그게 아니라…… 에이씨.”
단호한 유원의 반응에 하르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야, 너 진짜 끝까지 갈 거야?”
“같은 말 몇 번 했던 것 같은데. 그러는 넌, 이제 확실히 정한 거냐?”
“안 정했으면 이런 말하지도 않았지.”
투덜거리는 말투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하르간은 유원과 접점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하르간은 올림포스 내부에서 입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완전히 제우스의 반대편에 서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25층.”
유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다.
“그중에서도 특히 브리튼의 심장을 조심해라.”
또다시, 브리튼이 언급되었다.
“그곳은 너를 잡기 위한 거대한 ‘덫’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