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ing with the Gods RAW novel - Chapter 320
“……다 갔냐?”
살짝 떠진 유원의 눈동자가 좌우로 굴렀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마족들의 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주위에 디아블로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유원이 고개를 들었다.
“신성한 서열전에서 승부 조작이라. 너야 인간이라지만 마왕씩이나 되는 녀석이 참 잘하는 짓이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리 질책하는 투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으니깐.
“이제 이쪽에서의 일은 다 끝난 거냐?”
“대충은.”
유원은 몸에 잔뜩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으로 천마대전에 눈이 뒤집혀 달려들던 베에모트에게 고삐를 채웠다. 가장 큰 골칫거리를 멈춰 세웠으니 이쪽은 걱정 없었다.
디아블로는 애초에 천마대전에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문제는 바알이었다.
“바알은…….”
“그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다. 저 머저리 녀석만 잔뜩 미쳐서 날뛰던 거지.”
한심하다는 듯, 디아블로가 자리에 쓰러져 기절한 척하는 베에모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유원과는 달리 너무 눈에 띌 만큼 덩치가 커서 금방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서열전의 승부가 조작되었다는 걸 금세 들킬 테니 말이다.
“천마대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될 때까지 우리는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그렇게 말해 주니 다행이군.”
“어쨌든 나도 이 거지 같은 싸움을 끝내고 싶은 건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한 디아블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 살벌한 표정에서 유원은 디아블로에 대한 정보를 다시 떠올렸다.
‘천마대전의 방아쇠를 당긴 건 이 녀석이었다.’
천마대전에 흥미가 없다고 해서 디아블로가 싸움을 피하거나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천마대전을 꺼리는 건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진짜 전쟁이 아닌, 관객들을 위한 하나의 이벤트가 되어 버린 그 형태를 경멸한 것이다.
그로 인해 디아블로는 천마대전에 흥미를 잃고 거기서 물러난 상태. 만약 메타트론이 천마대전에 참여하면 그때에서야 움직이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런 디아블로가 참다못해, 그간 쌓아온 화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것이 유원이 알고 있는 진짜 천마대전의 방아쇠였다.
‘너무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
디아블로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까먹으면 안 됐다.
“바로 갈 거냐?”
“뭐, 다친 데도 없고.”
“바쁜가 보군.”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지만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천 년이 넘게 이어져오던 전쟁을 멈추기 위한 시간으로 열흘은 너무 짧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원이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유원을 보며, 디아블로가 중얼거렸다.
“천마대전이라…….”
10년마다 겪는 싸움.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려, 당연시되던 그 단어가 이번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오랫동안의 침묵.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원의 개입 하나만으로도 모든 게 달라져 보았다.
“이번엔 좀 다르려나.”
* * *
척, 척, 척-.
천사들이 행과 열을 맞춰 걸음을 옮겼다.
새하얀 창대를 움켜쥐고, 비장한 얼굴로 창을 뻗는다.
“하압-!”
부웅-.
창끝에서 힘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봉 끝에 앉아, 미카엘이 지켜보았다.
“한 번 더.”
“하압-!”
“목소리만 키운다고 다가 아니다!”
“하압-!”
창을 뻗는 천사들의 기세가 한층 강해졌다.
살짝 눈을 떴던 미카엘은 다시 눈을 감았다.
‘몸은 많이 나았다.’
이렇게 눈을 감으면 라그나로크가 떠올랐다.
아스가르드의 황금 성을 공격하던 그날.
제우스와의 싸움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방심, 그런 변명 같은 말로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에게 엄한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한 번의 패배도 용납할 수 없었고, 그 한 번을 수십 년이고 수백 년이고 머릿속으로 되새겨야만 직성이 풀렸다.
제우스와의 싸움은 미카엘에게 큰 충격을 가져왔다.
덕분에 그간, 자신이 얼마나 해이해져 있었는지 깨달았다.
스으-.
한참 만에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어느덧 해가 반쯤 넘어가 있었다.
눈앞에서 창을 뻗으며 훈련하던 천사들은 이미 다 흩어진 상태. 미카엘은 눈을 감은 채, 제우스와의 싸움을 다시 복기하고 있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조금은 확신이 생겼다.
제우스는 올림포스의 왕이었던 자라고는 하나, 어쨌거나 벼락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그렇듯 허무하게 패했던 건, 어디까지나 속도로 상대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제우스와 싸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이 생겼다.’
스윽-.
고개를 든 미카엘이 어느덧 황금색으로 노을 져 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또 하루가 지나갔다.
하지만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오래도 기다리셨군.”
봉 끝에 앉아 있던 미카엘이 흔들림 없이 고개를 돌렸다.
같은 길이의 창끝에 올라와 있는 사람이 보였다. 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의 주위에 다가와 등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흔들림이 없다.’
미카엘은 뒤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창끝에 앉아 균형을 유지하는 건 미카엘의 오랜 훈련법 중 하나였다.
몇몇 대천사들에게도 시켜봤지만,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처럼 오랫동안 이 좁은 창끝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녀석은 없었다.
그런데.
‘보통내기는 아니군.’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디선가 스쳐 지나가듯 본 얼굴.
그 얼굴을 기억해 내는 건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유원인가.”
자신의 이름에 유원이 미카엘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우연한 만남은 절대 아니었다.
유원은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왔다.
“잘 생각했다. 말을 걸거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왔다면 상종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럴 것 같았다라…….”
미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날 잘 안다는 듯한 반응이군.”
“모를 수가 없지 않습니까. 미카엘이신데.”
미카엘.
최강의 대천사라 알려진, 하늘의 검이자 방패.
아마 그를 모르는 랭커는 없을 것이다. 지금껏 미카엘이 쌓아온 천마대전의 공적은 모든 천사와 악마를 통틀어 최고치에 달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대답.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용건은 뭐지?”
“곧 천마대전이 시작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열흘…….”
미카엘의 눈에 어두워진 저녁 하늘이 보였다.
“아니, 벌써 하루가 더 지났군.”
천마대전은 날이 진 저녁부터 시작된다.
앞으로 9일이 더 지나고 나면 천마대전이 시작된다. 천마대전은 이제 정말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목적은 천마대전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은?”
“아직 고민 중입니다.”
“고민?”
당돌함에 어이없다는 듯, 미카엘이 헛웃음을 지었다.
“둘 중 어느 쪽에 붙을지를 말하는 건가.”
“그런 셈입니다.”
“듣던 것과는 달리 박쥐같은 녀석이로군.”
유원을 바라보는 미카엘의 눈빛이 복잡하게 빛났다.
김유원.
이름은 많이 들었다. 최근에는 그야말로 질릴 정도로 말이다.
세상일에 별 관심이 없는 미카엘이, 그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게 된 건 라그나로크 때였다.
“라그나로크에서는 악마들과 함께하지 않았나?”
유원을 바라보는 미카엘의 눈이 곱지 않은 이유.
그건 바로 라그나로크에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싸웠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다른 무엇보다도.
“제우스를 감옥에서 꺼낸 것도 바로 네놈이고 말이야.”
미카엘은 유원이 제우스를 꺼낸 탓에, 하늘이 라그나로크에서 패한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마왕이 아스가르드의 편에 서고, 하늘이 라그나로크에 참전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유일하게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바로 제우스였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유원은 바로 그 변수를 만들어 냈던 장본인이었고.
하늘의 입장에서 유원은 웬만한 악마보다 더한 적이나 다름없었다.
“악마들과 함께한 게 아니라 아스가르드와 함께했지요.”
“악마들을 끌어들인 게 너일 텐데?”
“그랬던 건, 무스펠하임과 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악마들과 싸우기 위해 악마들과 손을 잡았다…… 뭐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악마들과 손을 잡았던 건 하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미카엘과 유원의 시선이 한 치 물러남 없이 마주쳤다.
너희나 나나 똥이 묻은 건 똑같다는 그 말에, 미카엘은 그리 반박할 수 없었다.
“왕께서 내리신 결정이었다. 나로서는 따를 수밖에.”
“내 결정이 아니었으니 잘못은 없다, 그 말입니까?”
“……그런 말은 아니다.”
“천왕 메타트론. 그가 내린 결정을 전적으로 믿습니까?”
“‘그’라?”
미카엘의 눈빛이 돌변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호의적이지는 않아도 적대적이지는 않던 그가, 처음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언사가 조금 무례하군.”
“맹목적인 믿음은 눈을 멀게 하고, 종족을 불문하고 살을 갉아먹을 뿐입니다.”
“시비를 걸기 위해 온 거라면…….”
“당신은 메타트론을 얼마나 믿습니까?”
화아악-!
유원의 몸을 서슬 퍼런 살기가 뒤덮었다. 미카엘의 날개가 활짝 펴지며 주위가 온통 그의 공간으로 변했다.
“기어이 선을 넘는군.”
“천마대전을 일으킨 게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거기까지 해라.”
“하늘의 천사들을 죽이고 있는 게, 정말 악마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만!”
츠츠츠츠-.
미카엘의 외침과 함께 유원은 자신의 목 주위에서 멈춘 바람을 발견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만약 미카엘이 멈추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자신의 목을 파고 들었을 것이다.
“아스가르드와 친분을 믿고 이러는 건지는 몰라도, 선을 넘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 더 이상은 나도 참지 못하겠군.”
“……그렇습니까?”
스윽-.
유원은 손을 들어 목젖 가까이 다가온 칼날을 밀어냈다.
힘없이 밀려나는 칼날. 애초에 위협용이었을 뿐, 미카엘은 유원을 공격할 의사 따위는 없어 보였다.
툭-.
미카엘은 가볍게 서 있던 창끝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천사들의 훈련을 위한 연무장은 이미 텅 비어 있는 상태.
하늘에 높게 뜬 두 개의 달빛을 받으며 미카엘이 몸을 돌렸다.
“어느 쪽에 서든 그건 네 자유다. 하지만 여기서 그딴 말로 혓바닥을 놀렸다간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니 조심하거라.”
저벅-.
미카엘은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유원은 그런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지만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대천사 미카엘.
하늘에서 가장 강한, 최강의 천사.
그리고 또한.
“천마대전에 가장 많이 의문을 품고 있던 건 미카엘이었다.”
천마대전이 끝난 후, 가장 많은 후회를 했던 자.
“한 번에 설득하는 건 힘들 거다. 보기보다 대쪽 같은 녀석이니까.”
마왕 측의 열쇠가 디아블로라면 하늘의 열쇠는 미카엘이었다.
미카엘에 대해 알려진 건 많지 않았지만, 그의 고지식한 성격에 진절머리를 치는 랭커는 여럿 있었다.
아마 그를 설득하는 건 디아블로를 설득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해답은 간단했다.
“천천히 흔들어야지.”
한 번에 설득하려 하지 말 것.
충분히 혼자서 생각할 만한 시간을 만들어 줄 것.
그게 바로 유원이 첫 번째로 할 일이었다.
“일단 돌은 던졌다.”
잔잔하던 수면에 파동이 생겼다.
이제, 물살을 더 키울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