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ing with the Gods RAW novel - Chapter 432
* * *
어미가 자식의 배를 가르고 나온다.
순리를 역행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여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보라색으로 변한 하늘.
이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왔구나.”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쉰다.
그러자 맡아 본 적 없던 시원한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역시 좋구나. 살아 있는 세계의 공기는.”
전에는 언뜻 한 번 맡은 게 다였다.
제대로 이 세계에 발을 들이기도 전, 저들에게 쫓겨나 다시 바깥으로 추방되었으니까.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짜증이 치솟지만.
그래도 지금은 참을 만했다.
스윽-.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미치는 곳에, 아그니와 쿠베라가 몸이 굳어진 채 서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덜, 덜덜-.
분명 거리는 꽤 떨어져 있었다.
저 멀리, 점처럼 서로가 작게 보일 만큼이나.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바로 코앞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간 잘 살아 있었느냐.”
털썩-.
아그니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미 그녀를 본 적이 있었던 그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산양의 배를 가르고 나온 여인.
그녀의 뒤로 보이는, 산양들을 거느리는 거대한 염소.
-마아아아아-.
그 소름 끼치던 울음소리를 내던 슈브 니구라스의 모습이 말이다.
“결국…… 이렇게 됐나…….”
그것이 돌아오고 말았다.
탑에 들어오는 순간 재앙이 되리라 생각한 존재. 자신들은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괴물이.
“정신 차려라.”
콱-.
바닥에 주저앉은 아그니의 뒷목을 쿠베라가 움켜잡아 세웠다.
강제로 다시 바로 선 아그니는 고개를 들어 쿠베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녀 역시 떨고 있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결국, 정신력이 더 강한 건 쿠베라였다.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
쿠베라의 말에 아그니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마왕과 하늘, 아스가르드와 데바까지.
지금 이 세계에는 탑 곳곳에 퍼져 있던 수많은 하이랭커들이 와 있었다.
미리 이날을 준비라도 하듯, 오딘은 ‘화합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탑 곳곳에 퍼져 있던 길드의 힘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그래.’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슈브 니구라스를 꺾지 않는 이상,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길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화륵-.
아그니의 주위로 주홍빛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수십 개의 불꽃의 구체에 둘러싸인 채, 아그니가 불꽃과 같은 색의 눈을 빛냈다.
“목표는 하나다.”
“그래.”
“삼신께서는 아직이시겠지?”
“얼마나 걸리실지 모른다. 워낙 신비로운 분들이시니.”
“……그런가.”
가슴을 꽉 매운 공포감을 정신력으로 버텨 낸다.
슈브 니구라스의 실체를 아는 건 이 자리에 자신과 쿠베라를 비롯한 소수뿐.
“어떻게든 우리끼리 버텨 보자고, 그럼.”
일단은 삼신이 올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
“가자.”
아그니의 명령이 떨어졌다.
고오오오-.
데바의 랭커들을 태운 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슈브 니구라스의 등장으로 잠시 멈춰 있던 전장의 그림에 다시 생기가 불어넣어졌다.
싸워야 한다.
그것만이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 *
“희망을 얻은 건가.”
아그니와 쿠베라를 바라보던 슈브 니구라스의 눈에 흰자위가 생겨났다.
그렇게 초점이 생겨난 눈동자는 웃고 있었다.
“가지고 노는 재미가 있구나.”
어두컴컴한 숲에서 잠만 자던 시간이 떠올랐다.
무엇을 해도 무료하던 세계.
그곳에서 자신을 꺼내 준 어리석은 혼돈에게 내심 고마움까지 들었다.
거기다가.
“이름을 드리겠습니다.”
해선 안 되는 거래였다.
녀석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음에도, 걸려 있는 게 너무 컸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
“그 이름. 잘 받아가도록 하마.”
차앙-!
차아앙-!
슈브 니구라스의 주위를 수많은 랭커들이 둘러쌌다.
아스가르드의 발키리.
데바의 랭커들과 마왕의 악마, 그리고 하늘의 천사들까지.
창과 칼을 겨누고 화살의 시위를 당긴다. 수만 명에 달하는 랭커들이 스킬을 준비하며 단 한 존재를 사냥하기 위해 힘을 끌어올렸다.
“겁먹지 마라!”
“다른 때와 다를 거 없다! 대규모 던전의 보스를 사냥한다고 생각해!”
“포지션을 이탈하지 말고, 아군의 공격에 휘말리지 않도록…….”
분주하게 움직이는 랭커들.
하지만 애초에 포지션을 갖추고, 군대를 이루어 싸우기에는 그들의 소속이 모두 달랐다.
“이 녀석은 내 거다!”
부웅-!
기다란 손톱이 슈브 니구라스의 눈을 찔러 왔다.
마왕을 대표하는 하이랭커 중 한 명, 아스모데우스였다.
금방이라도 슈브 니구라스의 눈을 꿰뚫고, 머리를 갈라 낼 것만 같은 기세의 세 손톱.
하지만 그것은.
기이이잉-.
슈브 니구라스의 눈동자 앞에 멈춰,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
“첫 번째 양은 너로구나.”
스윽-.
슈브 니구라스가 손을 뻗었다.
위협을 느낀 아스모데우스는 서둘러 뒤로 물러나려 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에게 한 번 공격이 실패했다면 한 발 후퇴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몸이……?’
앞으로 뻗은 손톱과 주먹도. 그리고 땅을 딛고 있는 두 다리도.
모두 꿈쩍도 하질 않았다.
“축하하노라.”
지익, 지이익-.
아스모데우스의 살가죽이 벗겨져 갔다.
아스모데우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슈브 니구라스와 가까이서 눈을 마주친 그는, 자신의 뼈와 근육이 뒤틀리고 피부의 색이 바뀌는 걸 느꼈다.
“나의 첫 번째 양이 된 것을.”
그녀의 음성을 듣는 순간.
“메-.”
에에에-.
그는 지금껏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울음소리를 뱉어 냈다.
의식이 옅어지고, 남아 있는 건 눈앞에 있는 슈브 니구라스에 대한 충성심뿐.
메에에에-.
그렇게 또 한 마리의 산양이 탄생했다.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스모데우스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장 먼저 호기롭게 슈브 니구라스를 향해 달려간 아스모데우스.
그가 슈브 니구라스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다른 산양들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아스모데우스가 누구던가.
그 역시 마왕의 한 명으로서, 300위권대의 랭킹을 가진 하이랭커였다.
그런데 그가 슈브 니구라스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고사하고, 손끝을 대는 것조차 실패했다.
“하나, 둘, 셋, 넷…….”
그때.
슈브 니구라스를 둘러싼 랭커들의 귀에 그녀가 세고 있는 숫자 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열두 마리나 잃어버렸구나.”
열두 마리.
죽어 간 산양들의 숫자였다.
슈브 니구라스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랭커들을 바라보며 먹잇감을 고르듯 손가락을 겨누었다.
“누구를 고를까.”
오싹-.
저벅-.
앞으로 달려 나가도 시원치 않을 판에, 하나둘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이 싸움은 단순히 살고 죽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살아남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랭커란 모름지기 살아남기만 해서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죽을 각오로 이곳까지 올라선 자들.
하지만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내가 아니 게 된다’는 건 전혀 다른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누구도, 절대로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저절로 멀어져 가는 랭커들을 바라보며 슈브 니구라스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무 그리 염려들 하지 말거라.”
저벅-.
한 걸음이 멀어지면 다시 한 걸음을 좁혀간다.
“어차피 모두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을 테…….”
퍼어억-!
그때.
멀리서 내던져진 새하얀빛의 창이 슈브 니구라스의 몸을 관통했다.
심장을 뚫은 창. 잠시간 몸이 휘청거렸던 슈브 니구라스의 고개가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그래.”
심장이 꿰뚫린 것치고 그녀는 너무나도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마치, 그곳에 심장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네가 있었구나.”
메에에에-.
메에에-.
슈브 니구라스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따르는 다른 산양들 역시 창을 던진 랭커를 향해 울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랭커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을 천천히 걸으며, 황금빛의 갑옷을 입은 전사가 걸어온다.
저벅-.
전장의 모든 걸 지배하는 존재감.
“왔다…….”
“드디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슈브 니구라스에게 압도되었던 랭커들이 다시 믿음을 가졌다.
그래.
이자와 함께라면 이길 수 있다.
“꽤 금방 보게 됐군.”
슈브 니구라스가 미소를 지었다.
쩡-!
매혹적인 웃음과 함께 가슴팍에 박힌 하얀 창을 손아귀 힘만으로 깨뜨린 그녀가 옆의 산양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저자의 이름이 무엇이냐?”
메에에에-.
산양은 아스모데우스였다.
지금은 그저 슈브 니구라스가 거느리는 천 마리의 산양들 중 한 마리가 되었을 뿐이지만.
슈브 니구라스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오딘이라.”
슈브 니구라스.
그녀와 오딘이 마주했다.
“강해 보이는 이름이군.”
* * *
회의장 안에 싸늘함이 감돌았다.
시바는 금방이라도 유원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거냐?”
츠츠, 츠츠츠-.
어둠 속성의 마력이 유원의 주위를 감쌌다. 여러 가지 속성들 중에서도 유난히 파괴적인 속성을 지닌 어둠이었다.
“제삼자는 빠져라. 진짜 죽고 싶지 않으면.”
“죽여 봐라.”
“뭐?”
“죽여 보라고. 할 수 있으면.”
스윽-.
유원이 자세를 바로 고치고 앉았다.
마치 가슴을 활짝 열고 ‘찔러 봐’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
시바는 위협을 할 뿐, 유원에게 직접 힘을 쓰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당장 유원과 시바의 거리는 원탁 하나 정도. 그 정도는 시바가 언제든지 뛰어넘어 손을 쓸 수 있는 거리였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야. 뭐, 지금이 아니더라도 네 손에 죽을 일은 없겠지만 아무튼.”
스윽-.
유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지금 날 죽이지 못하는 건 이 상황 때문이지. 안 그래?”
유원이 미소를 지었다.
시바가 자신을 향해 손을 쓰지 못하고 위협만 하는 이유.
“네가 주도권을 가지려면 미리 힘을 빼면 안 되니까 말이야.”
그건, 셋이 다시 하나가 되었을 때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시바는 그런 유원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정곡이 찔렸는지 그는 한쪽에 앉아 사탕을 빨며 상황을 지켜보던 브라흐마를 힐끗거렸다.
“브라흐마.”
“왜?”
“이 녀석을 그냥 두고 볼 거냐?”
“뭐가 어때서? 그냥 옆에 있기만 하겠다는데.”
시큰둥한 반응.
하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유원은 시바와 브라흐마를 위협한 게 아니었다. 그저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을 뿐.
그런 유원을 내쫓으며 살기를 드러내 싸움을 조장하는 건 오히려 시바 쪽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어차피 우리가 다시 하나가 되면 저런 녀석쯤이야.”
“……그래.”
브라흐마의 말에 시바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알겠다.”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브라흐마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지만 옆에 있는 유원의 존재가 계속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렸다.
설마, 저 녀석 때문에 일이 틀어지진 않겠지.
그렇게 찝찝함이 커져 갈 즈음.
“뭐, 어쨌거나.”
스윽-.
브라흐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렇게 다시 셋이 모이긴 모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