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ing with the Gods RAW novel - Chapter 451
* * *
-니—- 토-!
우우우우웅-.
쩍, 쩌저저-.
슈브 니구라스의 외침에 주위의 나무들이 부서져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분노는 그만큼 컸다.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어리석은 혼돈을 같은 편이라고 여긴 적이 없으니, 배신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이토록 분노한 건, 벌써 두 개나 되는 이름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메에에에-.
메에-.
그녀의 주위에서 산양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잔뜩 움츠러들고 겁을 집어먹은 반응들.
그런 새끼 산양들의 울음소리에 슈브 니구라스는 조금씩 이성을 되찾았다.
주위에 모여든 산양들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그들을 어르고 달랬다.
-그래. 이 어미가 미안하구나.
메에에에-.
산양들은 슈브 니구라스의 이름에서 비롯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감정에 깊이 동화되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랬기에 슈브 니구라스는 서둘러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여기서 더 흥분해 날뛰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손해가 크군.
이름 두 개를 잃었다.
일이 큰 만큼 하나쯤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두 개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수지가 맞질 않아.
만약 이번 일을 끝내고 내기에서 이겨, 어리석은 혼돈의 이름을 빼앗는다면 모를까.
이래서야 남은 일이 잘 풀려도 본전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메에에에-.
그 때였다.
슈브 니구라스의 주위를 돌던 산양들의 고개가 돌아간 것이.
-왜들 그러느냐?
슈브 니구라스는 울부짖는 산양들의 반응에 물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그녀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처음과 달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이곳은 검은 숲이었을 터.
그런데 검은 건 똑같지만 주위에 우거져 있던 나무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정신이 많이 팔리긴 했나 보군.
장소가 바뀐 걸 몰랐다.
검은 숲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았을 테니, 자신이 그새 어디론가 이동되었다는 뜻이었다.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눈이 뒤집혀 있었다는 것.
-그래, 누구더냐?
슈브 니구라스는 빛 한 점 없이 온통 컴컴한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나를 초대한 게.
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가까이서 갑자기 나타났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애초에 가장 경계하던 상대이기도 했고.
-미적지근하게 움직이더니.
스으으-.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낸 유원이 슈브 니구라스의 앞에 섰다.
장신의 큰 키를 가진 슈브 니구라스에 비해, 머리 하나쯤은 더 작은 유원.
-이제 좀 제대로 할 생각이 든 것이냐?
[‘이계의 대적자’가 ‘슈브 니구라스’에 대적합니다.]메시지는 유원의 머릿속뿐만 아니라 슈브 니구라스에게도 전해졌다.
시스템이 없는 그녀에게까지 메시지가 전해진 건 아니었지만, 그것은 본능에 새겨진 것과 같았다.
-이계의 대적자라…… 건방진 이름이로군.
어딘가 초점이 없는 유원의 눈을 보며, 슈브 니구라스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느껴지는 기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계의 대적자’라는 이름.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
그때서야 슈브 니구라스는 유원의 옆에 붙어 있던 단풍을 찾았다.
-그 꼬마는 어디로 갔지?
이계의 대적자라는 이름을 가진 유원도 위협적이긴 했지만 그는 아직 다 익지 않은 열매였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단풍은 달랐다.
만약 생각하는 ‘그’가 맞다면, 겉으로 보이는 덩치는 작아졌다 하나 그 속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거대할 것이다.
그렇게 잠시 단풍을 찾던 슈브 니구라스가,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고 있는 유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너로군.
슈브 니구라스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눈앞에 있는 유원의 속에 자신이 찾던 그 작은 꼬마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네가 그 꼬마였어.
-아직도-.
유원의 입이 열렸다.
-내가 꼬마로 보이느냐?
슈브 니구라스와 같은 공간에서 퍼지는 목소리.
그 음성에 슈브 니구라스의 동공이 찢어질 듯 커졌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큰 눈동자에 유원의 모습이 비춰지며, 그와 함께 주위의 검은 배경 속에 우주의 별들과 같은 빛들이 떠올랐다.
-오랜만이구나. 소토스의 창부여.
소토스.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리석은 혼돈이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창부라고 불렸지만 그녀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지금은 기분을 따질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소토스’라는 이름도, 그리고 ‘창부’라는 단어의 의미도.
유원은 모든 걸 알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하던 생각이 거의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정말…….
슈브 니구라스는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에게 큰절을 올릴 뻔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당신입니까?
-이미 알면서 묻는 건 무슨 이유지?
-사라진 것 아니었습니까?
-사라졌었지. 죽었었고.
-그런데 어떻게…….
-한낱 미물인 불사조조차 불이 꺼진 재 속에서 다시 부활한다. 설명이 됐나?
죽어도 다시 태어난다는 불사(不死)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 불사조를 고작해야 미물이라 폄하했건만 그 말에는 한 치의 어색함도 없었다.
미물의 판단 여부는 그 말을 하는 존재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그리고 슈브 니구라스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그런 말을 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존재였다.
-달라질 건 없습니다.
메에에에-.
메에에-.
메에-.
슈브 니구라스의 뜻에 따라 주위에 산양들이 나타났다.
둘의 주위를 가득 메우는 양떼 무리.
그 사이에 둘러싸인 유원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산양들의 털에 파묻힐 것만 같았다.
-불사조는 죽어 재에서 부활하지만 그 불씨가 처음부터 하늘을 밝히는 건 아닙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지요.
-그래.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제 눈에는 당신이 아직 꼬마로 보입니다. 그 거대한 위세와 격은 땅바닥에 추락했고, 이름이 가지고 있던 힘은 사라져 껍데기뿐인 진명(眞名) 하나만이 남아 있지요.
그것은 유원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슈브 니구라스,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한때 무릎을 꿇고 경외하던 자에 대한 도전이었으니까. 힘없이 추락한 왕은 발가벗겨져 있을 뿐이라는 걸 다시금 되새긴 것이다.
하지만.
메에에-.
메에-.
금방이라도 유원을 잡아먹을 듯, 그 주위를 감싸며 이빨을 드러내던 산양들이 돌연 온순해졌다.
유원은 그런 산양들의 털을 쓰다듬었다. 기분 좋게 울던 산양들이 하나 둘, 슈브 니구라스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살벌한 눈을 하고서는.
-다 맞는 말이다만 하나가 틀렸다.
메에에에-.
어느새 산양들의 우두머리가 된 왕이, 유원의 입을 빌려 말했다.
-진명은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다. 네가 집착하는 여러 이름들이야말로 그 허울 좋은 껍데기일 뿐이지.
-껍데기라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슈브 니구라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산양들이 돌아섰다. 그것은 ‘천 마리의 새끼를 거느린 검은 숲의 염소’라는, 슈브 니구라스가 가장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이름을 부정하는 현상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슈브 니구라스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가까이 있던 산양의 털을 쓰다듬으려는 순간.
콰직-!
지금껏 오랜 시간 동안 슈브 니구라스를 따라 적들을 물어뜯던 산양의 이빨이 이번에는 그녀의 손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충격이었다.
자신이 낳은 새끼가 제 손을 씹어 먹다니.
-이름이 가진 힘이란 이런 것이지. 애초에 이 새끼 양들은 널 따른 게 아니다. 네가 가진 이름을 따랐던 것이지.
-아직 이름은 제게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다. 아직 내가 빼앗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대체 왜…….
-그 새끼 양들은 네 이름을 따르지만, 동시에 ‘나’를 따른다.
나.
그것은 광기를 낳는 염소나, 검은 풍양의 신과 같은 이름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슈브 니구라스와 같이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진짜 이름(眞名)을 뜻하는 것이었다.
-빼앗기지 않는 이름. 너희들이 골백번 죽이고 짓밟아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이름.
-그런 이름에…… 힘이 있단 말입니까?
-아마 몰랐겠지. 허울뿐인 이름으로 덕지덕지 너를 치장하느라. 진짜 중요한 걸 놓치고 있던 것이야. 하긴.
유원의 두 눈에, 슈브 니구라스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춰졌다.
-네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슈브 니구라스는 자신에게 허락되어 있던 이름이 한 글자씩 지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놀랄 거 없다. 각오하고 있던 일이 아니냐?
그 이죽거림에 슈브 니구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각오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네 생각을 존중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충격 받지 말아야겠지.
이름의 힘이 사라져 간다.
‘천 마리의 새끼를 거느린 검은 숲의 염소’는 사라지고, 이제는 ‘슈브 니구라스’만이 남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빼앗고 있는 건, 유원의 몸에 깃든 존재였다.
-넌 내 이름을 원했다.
저벅-.
유원이 슈브 니구라스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몸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마지막을 직감했다고 해서 추하게 몸을 돌려 발악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 일이 있었던 후부터 줄곧, 이런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름은 결국 다른 녀석에게 돌아갔지. 그리고 끝내 그 이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가지고 있던 이름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구나.
파스스스-.
슈브 니구라스의 피부가 벗겨지고, 살과 뼈가 한줌 먼지가 되어 흩어져갔다.
-그래도 너무 억울해하진 말거라. 애초에 모든 이름은 나로부터 나왔으니까.
그렇게 이름이 가진 힘이 먼지가 되어 흩어지자.
스스스-.
-그게 네 진짜 모습이니라.
거대하던 염소의 모습도,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도 온데간데없이.
한 마리의 작고 어린 양 한 마리가 유원의 눈앞에 나타났다.
메에-.
다른 산양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새끼 산양들에 비해서도 훨씬 작았다.
슈브 니구라스.
거대한 이름 속에 숨겨져 있던, 작고 볼품없는 단 하나의 진짜 이름.
그 이름을 감추기 위해 슈브 니구라스는 여러 이름들을 몸에 두르고, 또 다른 이름을 탐했다.
그리고 그렇게 진짜 모습을 드러낸 어린 양의 목을.
스카앗-.
유원은 단칼에 베어냈다.
툭-.
투둑, 데구르르-.
땅에 몇 번 튕겨진 양의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공교롭게도 그 머리는 유원의 발밑으로 굴러와, 다리에 부딪쳐 멈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으으으으-.
베어진 목의 단면에서 보라색의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 안개가 유원의 몸을 감싸는 순간.
이름은 완전히 단풍의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