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ing with the Gods RAW novel - Chapter 483
* * *
용들이 모두 떠난 둥지 안.
새끼 용들의 시체를 깔고 앉은 어리석은 혼돈이 고개를 들었다.
“……시작됐군.”
로브 속에 감춰져 있던 보라색 눈빛이 반짝였다.
구우우웅-.
지축을 흔드는 진동. 탑의 층계를 넘어 울리는 이 진동은, 단순히 헤라클레스의 곤봉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이건 누군가 깨어나는 소리였다.
‘부정확한 형태의 백치’라는 이름을 가진, 이름과는 달리 바깥의 모든 걸 알고 있는 존재.
우보 사틀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건, 예정되어 있던 일이 아니었다.
어리석은 혼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보라색의 하늘.
누군가에게 저것은 그저 색이 바뀌는 현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싸움을 앞당기자는 건가.”
저 하늘은 그저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보라색 하늘의 별들.
그 별들의 출현에 어리석은 혼돈이 중얼거렸다.
“벌써 오시는 겁니까.”
“그래.”
콰우웅-!
어리석은 혼돈의 몸을 휩쓰는 황금빛의 전격.
한 순간 보랏빛으로 변한 세상이 황금으로 물들었다.
“왔느니라.”
화아악-!
치짓, 치지지-.
어리석은 혼돈의 손이 전격의 파도를 밀어내며 그 힘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였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습니다.”
저벅-.
황금색의 머리카락과 그에 잘 어울리는 갑옷을 걸친 남자.
제우스.
그가 결국 어리석은 혼돈을 만났다.
“찾느라 조금 걸렸지. 그래도 너무 늦지는 않아서 다행이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치짓, 치-.
제우스의 몸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전격.
이제 벼락을 한 발 던진 게 전부이건만, 그는 온몸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호흡도 가쁜지 어딘가 숨이 거칠었다.
평소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슬슬 버티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어리석은 혼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대가는 당신 목숨이라지 않았습니까?”
슈브 니구라스가 탑에 모습을 드러냈던 당시.
어리석은 혼돈은 세 명을 상대로 거래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가, 제우스에게 내건 조건은 하나.
“대가는 당신 목숨입니다.”
바로 제우스의 목숨이었다.
“물론, 그냥 달라는 건 아닙니다. 일종의 내기를 하자는 것이지요.”
“무슨 내기지?”
“별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어리석은 혼돈은 제우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 위에는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보석 하나가 있었다. 어리석은 혼돈은 그 보석을 가리켜 ‘별’이라 불렀다.
“이걸 드십시오. 그리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 내기는 당신의 승리입니다.”
“내가 살아남으면 내 승리. 죽으면 네놈의 승리라는 거로군.”
“이해가 빠르십니다.”
그것이 함정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제우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유일한 약점입니다. 오만하다는 거.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만, 운이 좋지 않으셨습-.”
콰우웅-!
다시 한 번.
어리석은 혼돈의 몸 위로 황금빛의 전격이 휘몰아쳤다. 양팔을 들어 올려 전격을 막아 낸 어리석은 혼돈의 로브가 찢겨져 나갔다.
지이이익-.
저릿, 저릿-.
제법 짜릿한 일격이었다.
반쯤 벗겨진 로브 너머로, 어리석은 혼돈의 눈동자가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사이.
쿠르르르-.
제우스는 또 다른 벼락을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너 같은 놈과 말동무나 하려고 온 줄 아느냐?”
“……어디서 무기를 하나 받아 온 모양입니다.”
제우스의 손에 들려 있는, 벼락이 휘감긴 기다란 창 하나.
그것을 보는 순간 어리석은 혼돈의 머릿속에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역시 진작에 죽여 버렸어야 하는 건데.”
헤파이스토스.
올림포스의 대장장이로 수많은 랭커들의 손과 발이 될 아이템을 만든 자.
개인의 무력은 평범한 랭커들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가 만든 아이템들의 가치는 어지간한 하이랭커 수십 명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감히 누굴 죽인다고?”
치직, 치치-.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오는 제우스의 손안에서 벼락의 창이 위협적으로 타올랐다.
창은 제우스의 벼락을 끌어당겼다. 창끝에 모인 벼락의 힘이 금방이라도 쏘아질 것만 같아, 어리석은 혼돈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저런 일격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웃기십니다. 이제 와서 아비 흉내라도 내시겠다는 겁니까?”
펄럭-.
어리석은 혼돈이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넘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하얀 얼굴.
그 얼굴 위로 보라색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본 얼굴에 제우스가 잠시 놀란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당신은 제 자식을 하늘에서 떨어뜨려 발을 절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올림포스를 위한다는 목적 아래에서 수많은 자식들을 낭떠러지 아래로 몰아넣었지요.”
“그게 바로 사자의 방식이다. 너 같은 우매한 자는 이해할 수 없는.”
사자는 제 자식을 낭떠러지에 밀어 넣어 더 강하게 키운다. 그것은 제우스의 방식이었고, 그 방식이 현재의 올림포스를 만들었다.
실로 제우스다운 대답.
하지만 그 대답에 어리석은 혼돈은 오히려 비웃음을 보냈다.
“그리 똑똑하셔서 제 조건을 받아들이셨습니까?”
“산 자는 언젠가 죽는다.”
쾅-!
쩌저저-.
창대를 땅에 내리찍자 용들의 둥지가 흔들렸다. 어리석은 혼돈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자리는 내게 그런 자리다.”
“……말로는 어떻게 안 되겠네.”
제우스는 이미 각오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반쯤 죽어 가는 육신을 정신력으로 붙잡으며, 심장에서 뽑아 낸 벼락의 힘을 창에 주입했다.
이런 상태의 제우스를 말로 흔드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꿈틀-.
어리석은 혼돈의 손끝에서 작은 뿔이 돋아났다.
뿔은 점차 거대해지더니, 순식간에 그 크기를 불려 나가 거대한 염소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거 아십니까?”
마아아아-.
어리석은 혼돈의 손끝에서 나타난 염소가 울부짖었다.
그 울음소리에 제우스의 머릿속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광기를 낳는 염소.
슈브 니구라스가 죽던 바로 그날, 어리석은 혼돈이 갈취한 이름이었다.
“여기 있는 저는 진짜입니다.”
마아아아-!
제 주인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광기를 낳는 염소가 크게 울부짖었다.
어리석은 혼돈이 말한 ‘진짜’의 의미는 하나였다.
탑과 바깥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벽을 넘어왔다는 뜻이었다.
그는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광기를 낳는 염소는 그 이름들 중 하나일 뿐.
“지금 물러나면 몇 년은 더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사이, 살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을 지도 모르지요.”
“……그래.”
마아아아-.
제우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가린 거대한 염소를 올려다보았다.
비록 검은 숲이 아니라 그 힘은 예전만 못하겠지만.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자신도 안다.
이 자리에서 저것과 싸우려 하면 반드시 죽을 거라는 것쯤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 했다.
“하나 상관없다.”
설령 어리석은 혼돈이 몇십 개, 몇백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것에 겁먹고 돌아서기에는 처음부터 알고 왔으니까 말이다.
부웅-.
제우스의 몸이 위로 도약했다.
광기를 낳는 염소를 향해 날아든 그가, 창끝을 휘둘렀다.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말이지.”
콰우웅-!
쩌엉-!
창에서 뿜어진 벼락의 힘을 얻어맞고 날아가는 염소.
검은 숲의 왕, 슈브 니구라스의 이름 중 하나를 향해 제우스는 연달아 창을 내질렀다.
콰릉-!
그런 그의 행동을 통해 어리석은 혼돈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여기서 다 불사를 생각입니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지금껏 이해해 온 제우스는 불확실한 일에 이리 승부를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체스판 위의 킹이었다.
킹은 결코 스스로 다른 말을 잡고자 움직이지 않는 법이었다. 킹이 말이 되는 경우는 한 가지,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가 킹의 자리를 버렸거나.’
설마 저 자존심 강한 제우스가?
하지만 설마 하는 생각도 눈앞에 있는 제우스를 보면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콰웅-!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에게 얻어 낸 창을 휘둘러 염소의 뿔을 부러뜨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잠시 떨리는 창끝을 다시 꽉 움켜쥐며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군.’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고, 온몸의 근육은 제발 살려 달라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처절하게 싸워 본 게 대체 언제였던가.
탑을 이제 막 오르기 시작했던 시절.
같은 피를 나눈 형제, 하데스와 포세이돈과 막 탑에 들어왔을 때를 제외하면 아무래도 없었던 것 같았다.
‘진짜이니 물러나라고?’
제우스는 어리석은 혼돈의 경고를 떠올리며 조소를 지었다.
참 웃기는 소리가 아닌가.
그것은 녀석이 자신의 목적을 모른다는 걸 증명해 주는 질문이었다.
‘애초에 네놈이 진짜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지난 1년.
제우스는 오랫동안 녀석을 찾아다녔다.
분신체가 아닌, 진짜 육신을 가지고 넘어온 어리석은 혼돈.
그와 싸우기 위해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를 찾아가 새로운 무기를 부탁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다.’
부웅-.
또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뿔.
제우스의 손이 옆으로 뻗어졌다.
콰우웅-!
손끝에서 뿜어진 전격이 또 다른 염소의 뿔을 막아 냈다. 창을 빙그르 돌려, 뿔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쿨럭!”
속에서 솟구친 핏물이 입 밖으로 토해져 나왔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걸로도 부족해, 이제는 속마저 다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당황할 건 없었다.
제 몸이 어떠한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영원한 왕은 없는 법이니. 누구든 마지막은 이럴 수밖에.’
왕은 말을 움직이는 자.
그리고 판을 그리는 자여야 한다.
제우스는 오랫동안 그 역할로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제우스는 최강의 말을 만들기를 원했고, 결국 헤라클레스라는 위대한 영웅을 탄생시켰다.
꽈악-.
제우스는 다시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광기를 낳는 염소의 목젖을 향해 벼락을 뿌리며.
콰릉-!
제우스는 제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는다.
그것은 왕이 할 일이 아니었다.
왕은 결코 죽어선 안 될 자니까. 왕이 죽으면 그 판은 끝이 나니까.
하지만.
‘대체할 사람은-.’
어이없게도 지금 이 순간.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있다.’
쩌엉-!
그렇게 계속해서 벼락을 뿌리고, 창을 내지르면서도 제우스의 시선은 여전히 한 곳에 고정되었다.
어리석은 혼돈.
광기를 낳는 염소를 부른, 이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자.
그에게 향해 있는 제우스의 황금색 눈동자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불타올랐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나처럼 오만하지 말거라.’
이 싸움에서는 비록 자신이 지게 되겠지만.
‘내가 거래를 한 건 너뿐만이 아니니 말이다.’
결국 이 길고 긴 승부에서 이기는 건, ‘우리’가 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