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ing with the Gods RAW novel - Chapter 498
* * *
판도라는 한동안 자리에 앉아 멀리 하늘에 뒤덮여 있는 검은 구름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
눈을 깜박이는 판도라.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 유원과 손오공이 싸우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두 사람의 싸움에 끼어들 만한 역량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저벅-.
판도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분명 유원이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따라가야 한다.
확신이 들었다.
자신은, 이날을 위해 그의 옆에 있었으니까.
* * *
턱-.
어리석은 혼돈이 벽에 몸을 기댔다.
세상의 끝에 위치한 검은 벽. 탑과 바깥을 가로지르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그 벽이었다.
“으음…….”
아픔에 신음하며 그는 고개를 들었다.
가끔 이곳에 오곤 했다. 자신의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마음이 조금은 안정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욱씬-.
가슴의 통증이 적잖이 심했다.
헤라클레스.
녀석에 의해, 그리고 제우스에 의해 만들어진 상처였다.
바람에 모자가 조금 벗겨졌다. 그는 바깥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걸 부끄러워하듯, 다시 모자를 덮어썼다.
그리고 문득.
“부끄러우냐?”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
아련한 중얼거림.
기억하고 싶지 않던 얼굴과 이름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기억은 자꾸만 어리석은 혼돈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나의 아버지여.”
어리석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한 욕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알지 못했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
“당신이 그토록 염려하던 날이 왔습니다.”
분명 듣지 못할 테지만.
스윽-.
어리석은 혼돈은 탑의 경계를 나눈 거대한 벽을 손으로 훑었다.
“그가 이곳에 옵니다.”
쩍-.
벽의 한쪽이 갈라졌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작은 균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벽은 어리석은 혼돈의 손짓에 따라 금이 늘어 갔다.
“이젠 저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게 제가 뭐라 했습니까? 너무 그리 베푸시다간 언젠가 후회할 거라 했었지요?”
어리석다 비난하던 아버지를 타박한다. 왜 그랬느냐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느냐고.
“네 얼굴을 부끄러워 말아라. 그리 감추어서는 아무도 너를 봐 주지 않을 것이다.”
자상하던 목소리.
분명 자신을 위한 말이었을 테지만 꽁꽁 싸매던 모자를 벗기던 그의 손길은 참으로 역겨웠다.
“너는 누구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다. 너를 믿거라. 또, 내가 준 너의 이름을 믿거라. 자랑스럽고 떳떳해지거라.”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만약 그랬더라면 최소한 자신만은 그의 옆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 말했으면 길을 똑바로 가셨어야지요.”
하지만 그는 모두를 선택했다.
어리석은 혼돈의 시선이 갈라져 가는 벽으로 향했다.
이 벽이 바로 그 증거였다.
쩍, 쩌저저-.
“당신이 세운 이 벽은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부술 테니까요.”
탑의 바깥과 안을 나눈 경계.
그 경계가 무너져 갔다.
바로.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무정형(無定形)’이 만든 벽이 무너집니다.]균열은 아마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크지 않을 것이다.
분명 자신들의 목적은 이 벽을 모두 부수고 경계가 없는 세상을 만들려던 것이었으니.
하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이곳이 그리 소중하다면 한 번 막아 보십시오.”
스으으-.
벽이 무너짐과 함께 변하기 시작하는 하늘.
“걸레짝이 된 그 이름으로. 우리를.”
어리석은 혼돈의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름을 준 건, 그걸 위해서이니.”
* * *
[‘무정형(無定形)의 혼돈’에 입장합니다.]생소한 느낌이었다.
분명 발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걷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땅을 걷는 건지, 아니면 빈 허공에 발을 휘적거리는 건지. 발을 움직이는 스스로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익숙한데.’
우주처럼 깜깜한 장소. 유원은 이곳에 와 본 기억이 있었다.
아마도 슈브 니구라스의 목을 베었을 때였을 것이다.
‘거기가 여기였나.’
큰맘 먹고 들어왔는데, 이미 들어온 적이 있던 곳이었다니.
익숙한 곳이라 반가워야 하는 건지 무서워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는 단풍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옆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
그때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잔뜩 깨져서 들려왔다. 거리가 먼 건지, 아니면 이 공간의 특수성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반사적으로 돌아간 고개.
유원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판도라?”
그녀가 왜 이곳에?
판도라가 서둘러 유원을 향해 달려왔다. 꽤 멀리서부터 뛰어 온 건지 숨을 조금 헐떡이는 것 같았다.
“같이, 가.”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끊어져 말을 내뱉는다.
유원은 판도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이상하리만치 큰 집착을 보이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여기까지 따라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손오공 그 녀석도 여긴 들어오지 못했다.’
자신을 혼자 보내지 않으려 한 건 판도라만이 아니었다.
잠시지만 손오공 역시 유원과 함께 이곳에 들어오려 했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곳은 아자토스의 이름을 가진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제아무리 손오공이 탑에서 손꼽히는 힘을 가진 하이랭커라 해도 허락받지 않은 자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판도라는 뭘까.
‘뭔가…… 더 있는 건가?’
분명 그녀는 아우터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 힘을 전해 준 건 제우스였고, 또 제우스에게 그 힘을 전해 준 건 어리석은 혼돈이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혼돈에게 그 힘을 전해 준 건?
“……그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원은 결단했다.
“같이 가자.”
어쩌면 이게 자신에 대한 판도라의 강한 집착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밝아지는 판도라의 얼굴.
그녀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한 유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다른 대화는 없었다.
등에 꼭 붙은 판도라를 신경 쓸 틈이 없어서였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다시 나기 시작했다. 텅 빈 혼돈 속은 이제 끝났나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장소.
검은 숲이었다.
‘그때도 여기 왔었지.’
생각해 보면 웃긴 장면이었다.
“단풍아-!”
“단풍아-!”
유원은 제우스와 함께 이 검은 숲에서 단풍을 찾았다.
갑자기 사라졌던 녀석을 찾기 위해 얼마나 돌아다녔던지. 그렇게 뒤를 따라가다 보니 여기까지 왔었다.
그런데 여기가, 아자토스의 공간이었다니.
‘그때 어디서 찾았더라.’
유원은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나는 길은 없었다. 워낙 정신없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숲의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다 비슷하게 보였던 것이다.
‘혹시…….’
[‘예지안’이 ‘검은 숲’의 길을 읽습니다.]‘되려나.’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눈에 하나의 길이 그려졌다.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나무들. 그 사이사이를 훑는 자신과 판도라의 모습이 보였다.
지끈-.
어쩌면 몇 년이 걸렸을지도 모를 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길이었다. 예지안은 엄청난 양의 마력을 잡아먹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두통.
그래도 덕분에 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저쪽…….”
판도라가 어디론가 손가락을 가리켰다.
유원이 예지안으로 보았던 것과 같은 방향이었다. 설마 싶은 생각에 유원은 뒤에 달라붙어 있는 판도라를 돌아보았다.
“저쪽이라고?”
“응.”
“그다음은?”
“나무 세 개만 지나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판도라는 유원이 어렵게 읽은 길을 줄줄이 설명했다.
오히려 몇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그녀가 파악한 길이 더 나았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유원의 길과는 달리, 그녀가 알려 준 길은 지름길에 더 가까웠다.
그렇게 길에 대한 설명이 다 끝났을 때.
“그는…….”
무엇을 봤는지, 판도라는 어딘가 홀린 듯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 있어.”
* * *
63층.
탑 최강의 길드, 아스가르드가 있는 세계.
그 세계에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의 조짐이 시작되었다.
“돌아오질 않는군.”
“오늘로 며칠째지?”
아스가르드의 랭커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술렁거렸다.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점점 그 색은 짙고 어두워져 갔다.
바뀐 구름과 하늘의 색은 비단 랭커들뿐만 아니라 그것은 누구나 관심을 가지는 주제였다.
최근 저 하늘이 등장해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흘째인가?”
“거주민들 대피는 슬슬 끝났겠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그래도 아직까지는 별일 없으니까. 덕분에 대피할 시간도 벌었고.”
보라색의 하늘은 아우터와의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징조였다.
하지만 보통 그 하늘은 하루, 길면 이틀 정도 지속된 후 사라졌다. 벌써 나흘째 같은 하늘이 지속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 하늘은 색이 바뀌었을 뿐,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거주민이나 아스가르드와 관계없는 플레이어들은 이미 대피를 마친 상황.
뚜벅-.
그렇게 계속 하늘을 관측하던 성벽 위로.
“아, 토르 왕자…….”
“헙! 폐, 폐하?”
토르와 함께 성벽 위로 오딘이 올라왔다.
오랫동안 왕좌에 앉아 움직이던 않던 왕이었다. 아스가르드의 구역 내에서 하늘이 보라색으로 변해도 오딘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왜.
“기어이 일이 벌어지려나 봅니다.”
치지, 치지지-.
토르의 몸에서 푸른 전격이 흘러나왔다.
그는 아스가르드 내에서 가장 호전적인 성격으로 전투를 앞두고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오딘의 아들인 토르는 오늘 같은 날이 언젠가 오게 될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구나. 그것도 너무나도.”
오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라색으로 변한 하늘.
점점 색이 짙어지며 종말을 예고한다. 하늘은 언젠가 유원에게 들었던 미래의 모습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우스, 그 친구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제우스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랭킹에서 그가 사라졌다는 걸 알고, 며칠 동안 이유 모를 슬픔과 아쉬움이 들었다.
그새 친구라고 할 만큼 가까워졌던 걸까. 아니면 똑같이 왕이라는 칭호를 가졌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일까.
괜히 이 자리에 제우스가 서 있는 상상을 하며, 오딘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버지?”
치지, 치지지-.
오딘의 손안에 만들어진 새하얀 순백색의 창.
그것의 등장에 성벽 위에 서 있던 랭커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중에는 수백 년이 넘게 아스가르드에 몸을 담았으면서도 그 창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저게 바로…….”
“궁니르?”
탑 최강의 아이템 중 하나.
오딘을 상징하는 창이자, 아스가르드의 국보.
“계속 기다리고만 있을 필요는 없지 않으냐?”
그것을 손에 쥔 오딘이 투창 자세를 취했다.
방향은 하늘.
선전 포고를 위해, 오딘이 궁니르의 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