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ing with the Gods RAW novel - Chapter 511
* * *
사신수는 결국 굴복했다.
분신이 아닌 제천대성의 존재는 거대 길드 하나를 통째로 지워 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 하하…… 본체면 미리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러게 말이야. 그 정도 성의면 우리도 못 이긴 척 넘어가 줬을 건데 말이지.”
백호. 그리고 청룡.
두 하이랭커가 손오공의 옆으로 다가와 어색하게 웃었다.
어째 비굴하다 못해 한심하게까지 느껴지는 모습에 손오공은 한숨을 쉬었다.
“사신수에는 바보들만 있나.”
“…….”
말문이 막혀 버린 사신수들.
손오공은 짜증스레 머리를 벅벅 긁었다.
성질 같아서는 콱 그냥.
그런 생각과 함께 손오공은 근두운에 올라탔다.
‘귀찮은 조건을 걸고 말이야.’
“절대, 아무도 죽이진 마라.”
유원의 경고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미래에서 손오공은 지금처럼 협력을 거절한 길드를 돌아다니며 말을 듣지 않는 길드에게는 꽤 강력하게 무력을 행사했다.
결국 끝끝내 움직이지 않았던 길드들. 비겁하게 다른 길드의 뒤에 숨어, 타인의 피로 자신의 안전을 계획한 녀석들.
손오공은 그런 녀석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된 거다. 그걸 명심해.”
유원이 가장 경고한 게 이것이었다.
탑의 랭커, 플레이어, 그리고 거주민들까지. 모든 종족의 절반이 넘게 날아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던 길드들.
하지만 지금은 아우터와의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된 시점이었다.
손오공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열이 뻗칠 뿐이었다.
“성질 같아선 그냥…….”
매섭게 이글거리는 눈동자.
눈이 마주친 사신수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근두운을 탄 손오공이 이동을 시작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부상을 당한 랭커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 난동으로 인해 죽은 길드원은 없었다.
“쩝…….”
손오공은 다음 장소로 이동을 시작하며 입맛을 다셨다.
전에는 홧김에 난동을 부렸다지만 역시 적당한 말이나 무력 시위는 재미가 없었다.
더군다나, 더 흥미가 생긴 쪽이 있었으니 아쉬움은 더할 수밖에.
“역시 따라갈 걸 그랬어.”
* * *
타닥, 타다다-.
헤라클레스는 타오르는 불에 앙상하게 마른 나무를 꺾어 넣었다.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랭커가 된 후부터는 더 이상 추위를 느낄 수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그건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쌀쌀하군.”
“……추워.”
판도라는 유원에게 ‘사대 정령의 옷’을 빌려 입은 상태였다.
영하 몇 도 수준을 벗어난 추위였다.
탑의 바깥은 밤이 되면 피부를 넘어 뼈와 영혼을 얼게 할 정도로 추워지고 낮에는 불지옥처럼 대기가 뜨거워졌다.
판도라마저도 버티기 어려운 추위라니.
정말 이상한 곳이었다.
“그러게 따라오지 말라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원이 한숨을 쉬었다.
진하게 내뱉어지는 하얀 숨. 고개를 젓던 유원은 인벤토리 속에서 꺼낸 커피가루를 물에 타, 따뜻하게 데웠다.
“마셔라. 좀 나을 거다.”
“고맙다.”
“아니, 너 말고.”
앞으로 내민 대접만 한 손 대신, 유원은 판도라의 손에 커피를 쥐어 주었다.
머쓱해하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에 유원은 커피를 한 잔 더 탔다. 잔은 헤라클레스의 손에 쥐어지니 미니어처라도 되는 듯 보였다.
“제법 온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안 보이는군.”
한 입에 커피를 다 털어 넣은 헤라클레스는 이내 전방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텅 빈 사막. 이곳은 탑의 안쪽과는 달리 문명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둘 중 하나겠지.”
“둘?”
“도망쳤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힘을 합쳐 싸워 볼 생각이거나.”
하루를 넘게 움직였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들은 이미 자신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스윽-.
유원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탑에 나타난 보라색의 하늘과는 달리, 이곳 하늘은 별이 참 잘 보였다.
그 별의 정체를 아는 만큼 그저 아름답게만 볼 수는 없었지만, 아름다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저 녀석이 알려 준 건가.’
소토스의 눈은 탑의 안과 밖, 어디에나 존재했다.
녀석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건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리 다른 녀석들이 피해 있는 것도 이해는 갔다.
‘조금 서둘러야겠군.’
휴식은 아마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 것이다.
유원은 끝이 없이 넓게 펼쳐져 있는 사막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예전엔 여길 참 많이 걸었지. 질릴 만큼.”
오래전, 아자토스는 이 사막을 걸어 다녔다.
모래와 하늘뿐인 이 세계에서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만히 주저앉아 있거나, 걷거나. 선택지는 둘뿐이었다.
감상에 젖은 듯한 유원의 말에 헤라클레스가 물었다.
“무슨 토스, 그 녀석일 때 말이냐?”
“그래.”
“지금은?”
잠깐의 머뭇거림.
하지만 머뭇거림은 어디까지나 정말, ‘잠깐’이었다.
“……김유원이지.”
다짐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놓은 대답.
헤라클레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고민했냐?”
“아니.”
“그런데 왜 주저하지?”
“나도 모르게 대답이 늦어진다. 이 당연한 걸, 마치 생각이라도 해야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유원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의식적으로 자신은 김유원이라고 계속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아자토스’라는 강렬한 이름이 사라지질 않았다.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이 나이를 먹고 자아성찰이라니.
“어쨌든 결론이 그쪽이라니 다행이군.”
“그러냐?”
헤라클레스는 활활 잘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불은 유원의 마력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불을 보고 있던 헤라클레스가 입을 열었다.
“난 올림포스에서 나고 자랐다.”
“……?”
“어릴 때 난, 뛰어난 랭커가 되기 위해 단련하고 탑에 올랐다. 과정도 순탄했고, 난 결국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해 영웅으로 불렸다.”
영웅 헤라클레스.
그는 자신이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걸 부끄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웅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은 건, 단순한 넋두리 같은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나무를 했다. 이상하게도 쏟아지는 폭포에도 지워지지 않던 손에 묻은 피가 나무를 하다 보니, 지워지는 것 같더군.”
“그래서 그렇게 나무를 했군.”
“그래서 난 목수가 될 거다.”
그렇게 말하는 헤라클레스는 어린아이처럼 기대에 부푼 표정이었다.
“예전부터 하던 생각이었다. 힘 하나는 장사이니 아마, 이 탑에서 가장 뛰어난 목수가 될 수 있겠지.”
그는 이 싸움이 끝난 후를 가정하고 있었다.
목수라.
이미 헤라클레스는 오랫동안 나무를 해 왔다. 기간토마키아가 끝나고,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이 잊힐 때까지 줄곧. 그는 숲에서 나무를 모아 어려운 거주민들을 돕는 데 포인트를 보탰다.
“너희는 어쩔 거냐?”
유원과 판도라를 번갈아보는 헤라클레스.
그는 두 사람의 꿈을 물었다.
“우리?”
“그래. 너희도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냐? 특히…….”
헤라클레스는 유원을 보며 물었다.
“넌, 원래 살던 세상도 따로 있었고.”
원래 세상.
그 말에 유원은 잠시 생각했다.
거기가 어떤 곳이었더라. 시계태엽을 사용해 과거로 왔던 몇 년 전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었지만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집은, 어떻게 생겼었더라.
“잊어버렸다.”
유원의 대답에 헤라클레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잊어?”
“난 고아였다. 내 첫 기억에는 어머니나 아버지, 두 분 다 없었어.”
고아.
유원의 가슴을 가장 많이 찔렀던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세상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는 건 지금 이 추위보다도 더 추운 일이었다.
“어영부영 살다 보니 나이를 먹었다. 과정은 잘 기억나질 않아. 오래되기도 했고. 좋은 기억도 아니었고.”
“……왜 옛날 얘기를 안 하나 했더니만.”
“할 이야기가 없었다. 특별한 사건이라고 해 봤자 고아라는 이유로 괴롭힘당하거나, 싸우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게 말한 유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겐 여기가 고향이다.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돌아갈 생각은 없어.”
원래 세상에 있던 시간은 고작해야 20년 남짓.
반면, 손오공이나 헤라클레스, 오딘과 같은 동료들과 함께 싸운 시간은 그 수십 배가 훌쩍 넘었다.
고향이 어디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유원의 세상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다 끝나고 나면,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거라…….”
유원의 말끝이 흐려졌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잠시 고민하던 유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정말?”
“그래.”
유원의 대답에 헤라클레스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고 싶은 게 없다니.
유원의 그 대답이 퍽 안타깝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제일 하고 싶다.”
유원의 말은 그 어떤 대답보다도 진심이었다.
“한가한 걸 누리거나 실컷 잠을 자거나. 뭔가를 계획하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지 않고…….”
기간토마키아가 끝나고 천 년.
목적을 잃어버린 채 나무를 캐던 헤라클레스와는 달리, 유원은 살아 온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살아남기 위해.
“긴 시간 동안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싸웠다. 그래선지 긴 통로를 지나고 난 후에 있을 것은, 가능하다면 아무것도 없기를 바라게 됐다.”
말을 하다 보니 천천히 생각이 정리되었다.
자신이 진짜로 바라는 것.
유원은 그것을 한 마디로 정리했다.
“그냥 좀, 심심해 보고 싶다.”
“심심한 거라…….”
그것을 유원이 진심으로 원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 헤라클레스는 아쉬움 없이 미소를 지었다.
“소박하군.”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렵더라.”
“어렵지. 그래도 이젠 멀지 않았다.”
사막이 떠나가라 크게 웃어 보인 헤라클레스는 이내 어딘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판도라를 돌아보았다.
눈빛을 보아하니 어째 살짝 찔러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대답이 나올 것 같았다.
“판도라, 넌-.”
“결혼할 거야.”
“결……?”
휘둥그레진 눈.
설마 하는 생각에 헤라클레스는 유원을 돌아보았다.
“얘랑?”
“응, 유원이랑. 꼭 할 거야.”
듣는 헤라클레스가 심장이 다 내려앉을 만한 말이었다.
반면, 정작 그 얘기를 들은 당사자인 유원은 어딘가 덤덤해 보였다.
“너 지금 고백 받은 거다.”
“알아.”
“놀라지도 않는군.”
“충분히 놀라고 있다.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왜 내가 더 놀라는 거지?”
당사자는 유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놀라는 건 헤라클레스였다.
유원은 마치, 그럴 거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보였다.
판도라.
그녀는 만약 탑에서 가장 뛰어난 미인을 논한다면, 츠쿠요미나 아프로디테와 함께 거론되곤 했다.
그런데 그런 판도라에게 고백을 받았다.
어이가 없어진 헤라클레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 녀석이 안 받아 주면?
“그래도 할 거야.”
질문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판도라가 심술 가득한 얼굴로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무조건이야. 무조건.”
“거참.”
그 대답이 어이가 없는지 헤라클레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긴 통로를 지나고 나면 뭐? 아무것도 없기를 바란다더니…….”
그 끝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게 기다리고 있었다.
타닥, 타다닥-.
모닥불은 계속 타올랐다.
판도라의 고백에도 유원은 대답이 없었다. 판도라 역시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후후 불며 천천히 커피를 마시는 판도라.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휘적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유원.
헤라클레스는 생각했다.
‘저 둘이 이어질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지만…….’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부디, 그날이 왔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