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ing with the Gods RAW novel - Chapter 72
보랏빛의 불은 흔치 않다.
아니, 적어도 남궁훈은 보랏빛 색의 불을 본 적도, 그런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우연일 리는 없다.’
남궁훈은 아그레아의 던전에 남아 있던 흔적을 떠올렸다.
던전의 보스, 거미 여왕 아그레아.
녀석의 몸에 남아 있던 상처는 분명하게 기억한다. 랭커가 남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카롭고 정교한, 위력적인 칼질이었다.
‘그런데 왜…….’
방금 전.
유원과 나눴던 검은 아그레아의 몸에 남아 있던 흔적과는 달랐다.
전혀 다른 종류의 검.
게다가 그 정도 위력으로 던전의 보스인 거미여왕 아그레아를 단칼에 베어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
단순한 착각이거나, 아니면…….
‘봐줬거나.’
애초에 버프를 받기 전과 후, 유원의 대응에서 큰 차이 없음만 봐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남궁훈은 이를 갈았다.
이래서는 정말, 승부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아그레아의 던전을 공략한 게 눈앞에 있는 유원이라면.
-물러나지.
로엘은 머릿속에 들려온 남궁훈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전음이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로엘은 눈살을 구기며 남궁훈을 노려보았다.
물러나자니.
-내가 생각하는 사람과 김유원이 동일 인물이라면 이 싸움은 의미가 없다.
남궁훈은 유원의 주위에 떠오른 보랏빛의 불길을 바라보았다.
-우린 다 죽을 거다.
남궁훈의 확신어린 말에 로엘은 잠시 갈팡질팡했다.
대체 남궁훈은 유원의 무엇을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평소 근거 없는 말을 잘 하지 않는 남궁훈이었다. 게다가 그는 늘 자신감이 넘치고, 그만한 실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남궁훈이 먼저 물러나자고 말하다니.
‘대체 왜?’
유원의 시선이 로엘과 남궁훈을 번갈아보았다.
잠시 동안 자리에 멈춰 서 있던 유원은 붉게 변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이야기는 끝났나?”
남궁훈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유원은 남궁훈이 로엘에게 전음을 날린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걸 기다려 주다니.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나?”
남궁훈의 물음에 유원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가지뿐이라면.”
“아그레아의 던전을 공략한 게 혹시 그대인가?”
아그레아의 던전.
그 이름에 주위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놀라 잠시 술렁거렸다.
아그레아는 꽤 오랫동안 공략되지 않은 난이도 높은 던전이었다. 그 던전이 공략되었다는 것은 놀랍지만 그게 유원의 짓이라면 납득이 됐다.
“맞다면?”
“……역시 그렇군.”
그리고 남궁훈은, 그 자리에서 유원의 실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만약 싸우겠다면 우린 빠지지. 가자.”
“어?”
“야, 훈아!”
“진짜 가?”
남궁훈의 돌발 행동에 그의 기존 팀원들이 놀라 그를 뒤따라갔다.
순식간에 빠지는 팀원들. 갑작스러운 상황에 로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듣던 것과는 달리 겁쟁이네요.”
“마음껏 지껄여라.”
남궁훈은 유원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난 내 자존심보다 팀원들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시험에는 다시가 있다.
비록 시험비가 꽤 비싸긴 하지만 남궁훈에게 포인트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껏 모아 놓은 포인트도 제법 많았고, 정 급하면 남궁세가에 손을 벌려도 된다.
하지만 목숨에는 다시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B팀 전원이 덤벼, 어떻게든 유원을 잡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반. 아니, 대부분 죽겠지.’
남궁훈은 그런 식으로 시험을 통과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시험.
여기서 그만두는 것도 방법이었다.
“훈아…….”
“크읍…….”
“너란 녀석은 정말…….”
울컥하는 팀원들.
그들의 반응에 남궁훈은 서둘러 가자며 손짓했다. 유원은 그런 남궁훈을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알아서 빠져 준다면 나야 편하지.’
싸울 적이 줄어든다면 유원도 나쁘지 않았다. 남궁훈은 자신이 소지한 깃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른 팀원들 역시 마찬가지. 아무래도 남궁훈의 팀은 꽤 그를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이씨…….”
로엘은 멀어지는 남궁훈과 그의 팀원들을 보며 눈살을 구겼다.
이제 B팀의 숫자는 40명 남짓.
아직도 많은 숫자였지만, 남궁훈의 부재는 타격이 컸다.
그는 누가 뭐래도 B팀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플레이어였으니까.
‘그래도 역시…….’
로엘은 유원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먹음직한 먹잇감이었다.
남궁훈이 자리를 뜬 지금.
만약 그를 잡을 수만 있다면, 김유원을 쓰러뜨렸다는 영광은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어떻게 하지?”
“그래도 아직까지는 우리가 더 많은데…….”
“숫자가 문제야, 지금?”
“젠장. 나도 저쪽으로 갈걸.”
그래도 포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 같으면 겁을 먹었을 법도 하지만, 몸 안에 차오르는 충만한 힘 덕분에 용기가 났다.
“더 포기할 사람은 없나 보네.”
유원은 아쉬움에 혀를 찼다.
남궁훈이 빠져 준 덕분에 혹시나 했는데.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무 많이 죽이고 그러진 말자고. 애들 싸우는 데 어른이 껴서 추접하게 그러는 거 아니니까.”
영웅 헤라클레스.
그는 시계태엽으로 과거로 돌아갈 사람을 의논하는 회의에서도 플레이어들의 목숨을 챙겼다.
“하긴. 그건 그렇지.”
“어차피 나중에는 다 같이 아우터와 싸워야 할 녀석들이기도 하고…….”
“누가 갈지는 몰라도 만나는 녀석들 중에는 결국 랭커가 될 놈들도 있지 않겠어?”
“전력 손실이지, 그건.”
회의 중에 결정된 약속.
그것은 능력이 닿는 선에서, 가능하다면 죽이지 않고 플레이어를 살리는 방향으로 탑을 오르자는 것이다.
결국 아우터와의 전쟁은 탑 안쪽의 존재들, ‘이너’가 치러야 한다.
가능한 플레이어와 랭커를 죽이지 않아야 한다.
아니.
어떤 식이든, 이너의 전력이 손실될 만한 사건을 막아야 한다.
그게 바로 유원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긴 해도 말이야.’
유원은 그 약속을 최대한 지켰다. 김명훈 같은 악질이 아니라면, 그리고 악인이 아니라 판단된다면 가능하면 살리는 쪽으로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이렇게 이빨을 드러내서야…….’
죽이지 않고 살려라.
분명 헤라클레스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고, 그걸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영웅이니까.
하지만 유원은 달랐다.
‘장담은 못하겠다.’
유원은 영웅인 헤라클레스를 좋아한다.
하지만 정작, 유원은 그런 영웅이 될 수는 없었다.
화르륵-.
[성화]유원을 중심으로 불길이 점차 거세졌다.
B팀의 플레이어들은 하나둘씩 스킬을 준비했다.
‘노력은 해 보마.’
불꽃이 유원의 의지를 품어 거세졌다.
‘아니면 어쩔 수 없고.’
쩌억-.
유원의 몸에 휘감긴 성화가 입을 벌렸다.
이제부터는.
애들 싸움에 끼어들 시간이다.
* * *
저벅, 저벅-.
남궁훈은 원래 B팀의 스타트 지점으로 향했다.
다른 팀원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일단 남궁훈의 뜻대로 자리를 벗어나긴 했는데,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싶었다.
“정말 포기할 거야?”
팀원의 물음에 남궁훈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무슨 말이지?”
질문을 던진 팀원이 흠칫 놀랐다.
설마 걸음까지 멈추고 돌아볼 줄은 몰랐다.
“그, 그냥. 너답지 않다 싶어서.”
“나답지 않아?”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지만 싸워 보기도 전에 포기하는 게…….”
남궁훈은 한숨을 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 긴 시간을 산 건 아니었지만, 자신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마음에 안 든다.”
“뭐가?”
“이런 식으로 시험에서 통과하는 거. 그리고 이런 식으로 김유원이 시험에서 떨어지는 것도.”
남궁훈은 자신이 걸어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꽤 벌어지긴 했지만, 싸움이 시작됐는지 강렬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싸워 봤자 이길 수 없다…… 그것뿐이라면 싸웠을지도 모르지. 다 함께 싸운다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남궁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이번 시험에서 올라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아…….”
“하긴…….”
남궁훈의 설명에 그의 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번 시험의 대진표는 말이 되지 않았다. 밸런스를 따지자면 A팀과 B팀은 심각할 정도로 차이가 났다.
하지만 유원은 오직, 혼자서 그 격차를 메우고 있었다. 실력만 놓고 본다면 유원은 다음 층으로 올라갈 자격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하여튼 고지식하단 말이지.”
“그래도 맞는 말이긴 해.”
“뭐, 시험이야 또 있으니까.”
“팀 운이 아쉽긴 하지만 역시 넌 이런 점이 좋단 말이지.”
남궁훈의 팀원들은 별로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실력만 있다면 이번 시험이 아니더라도 분명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남궁훈은 팀원들의 호응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결정에 다른 팀원들이 불만을 가지면 어쩌나 했는데.
‘괜찮은 팀이야, 역시.’
아버지, 남궁진운은 늘 말했다.
탑을 오르는 데 필요한 건 뛰어난 실력과 힘만이 아니라고.
그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함께 탑을 올라갈 훌륭한 팀원들이라고.
남궁훈은 튜토리얼 때부터 줄곧 자신과 함께 탑을 올라갈 팀원을 찾았다. 탑을 올라가는 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해, 적잖은 시간 동안 팀원들을 선별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팀이 바로 지금의 팀이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추구하는 바와 뜻이 맞는 팀원들.
남궁훈은 지금의 팀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 보…….”
남궁훈이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몸이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플레이어가 보였다.
‘킹?’
바로 B팀의 킹.
이름도, 얼굴도, 아무것도 기억 안 나던 플레이어가 그곳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 * *
[깃발을 획득하였습니다.] [10공적치를 획득하였습니다.] [깃발(2개)를 획득하였습니다.] [20공적치를 획득하였…….]연달아 울리는 메시지.
유원은 바닥에 떨어진 깃발을 줍고, 쓰러져 있는 플레이어들의 품을 뒤져 깃발을 빼앗았다.
기분 좋은 메시지였다.
깃발이 늘어날수록 이번 시험을 통과할 확률이 높아지고, 공적치가 늘어날수록 유원에게 돌아올 보상도 커질 것이다.
“아아악!”
“뜨, 뜨거워!”
“살려 줘, 살려…….”
“아, 악마다! 으아아아!”
“오지 마!”
사방은 아수라장이었다.
유원이 불러낸 성화(聖火)는 이름과는 달리 그들에게 악마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했다.
‘아우터의 힘이 다 그렇지, 뭐.’
아우터의 힘은 탑 바깥의 힘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미지의 것을 두려워한다. 성화는 그들에게 낯선 힘이며,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변화했다.
그렇게 성화는 그들의 두려움을 먹고 크기를 키워 갔다. 유원이 할 일은 불을 더 태우는 게 아닌, 오히려 꺼지도록 조절하는 것이었다.
‘너무 커져 버리면 나도 조절하기가 힘드니까.’
유원은 불길을 다시 꺼뜨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수라장이 된 시험장.
수십 명의 플레이어들 중, 절반가량이 벌써 전투 불능이 됐다. 그중에는 나름대로 성화와 맞서 잘 싸우는 플레이어도 있었지만 아마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 정도로 끝날 리는 없고…….’
이번 시험은 올림포스에서 유원을 잡기 위해 만든 무대였다.
팀 간의 밸런스를 망쳐 시험에 훼방을 놓겠다는, 그런 단순한 덫을 깔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좀 더 확실하고 단단한 덫을 만들어 놓았을 터.
유원은 천라지망이 펼쳐진 직후, 지금까지 줄곧 한 명의 플레이어를 찾아 화안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왔구나.’
숲 저편 너머에, 유원이 찾던 플레이어가 보였다.
‘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