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fter coin jackpot RAW novel - Chapter (17)
정우는 밤을 꼬박 새워가며 차은숙 교수의 이력 및 논문에 대해 훑어보았다.
……
-2004, 한국대학교 재료공학 박사
-2006, 대한화학회 KCS-Wiley Young Chemist Award
-2007, ACS Division of Analytical Chemistry Award
-2008, 한국과학기자협회 올해의 과학자상 수상
……
어떤 상인지 알 수 없는 수상경력들로 빼곡한 그녀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줄곧 학자의 길을 걸어온 인물이었다.
현재는 한국공과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었는데 재료화학과 분석화학쪽에도 상당한 연구성과를 거두고 있는 천재였다.
정우가 미래에서 본 SCR그래핀양산기술 정도의 임팩트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감탄이 나올 만한 성과들로 가득했다.
“어우…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굳이 나한테 기술의 지분을 양보할지 모르겠네.”
몇 년만 지나면 스스로 알아서 촉매환원기반그래핀양산기술을 발견하게 될 천재다. 미래에 SCR그래핀 기술도 특허가 아닌 논문으로 낸 것을 보면 물욕보다는 명예욕이 강한 인물로 보였다. 과연 어떻게 협상을 해야 이 기술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을까.
‘… 촉매환원법이 핵심이야. 이 무기를 잘 다뤄야만 해.’
자신의 손에 들린 A4뭉치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밤새도록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 타이핑한 SCR그래핀기술에 관한 논문이 담겨 있었다.
너무나도 복잡하고 깊이 있는 이 정보들의 집합체는 일반인이 이해하기엔 아득히 어려웠기에 혼자서 이 기술을 실현하고 특허로 등록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이 기술을 알만한 과학자나 연구자에게 가져다준다면 엄청난 보물이 될 터. 정우는 이왕이면 원래의 논문의 연구자였던 차은숙 교수가 맡아줬으면 했다.
다만 일천한 과학지식으로 인해 협상 과정에서 상당한 고난이 예상되는바. 솔직히 크게 자신은 없었으나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기에 부딪혀 보기로 했다.
곧장 신소재공학과에 전화를 걸었다.
-신소재공학과 사무실입니다.
“여보세요? 저, 실례지만 차은숙 교수님 오늘 출근하시나요?”
-주말이라 출근 안 하세요. 그런데 무슨 이유로 연락주셨나요?
“아, 제가 연구 후원을 생각 중인데 교수님을 한번 뵙고 싶어서요.”
일반인은 안 만나줄 것 같아서 연구후원자 컨셉으로 만나볼 생각이었는데 사무실에 없다니. 주말 공쳤다는 생각에 대충 대답했는데 조교에게선 의외의 답이 흘러나왔다.
-후원이요? 아, 그거면 제가 교수님께 한번 말씀드려볼게요. 오늘 오시는 거죠?
“네네.”
-그럼 성함이랑 연락처 남겨주시겠어요? 제가 교수님께 미팅 가능한지 확인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예. 제 이름은 이정우고요. 연락처는….”
용건을 전하고 얼마 안 있어 다행히 미팅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간단히 약속을 잡은 정우는 길찾기 어플을 통해 걸리는 시간을 계산했다.
확실히 지방이다 보니 시간이 꽤 소요됐다.
‘대전까지 가려면 빠듯하겠구만. 일단 서현 씨한테 부탁 먼저 해야겠어.’
시간을 절약할 겸 코인거래소 관련하여 API 코딩에 대한 도움을 구하기 위해 지서현에게 연락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 네 선배님.
“여보세요? 서현 씨 토요일이라 쉬고 있을 텐데 불쑥 전화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사실 내가 부탁할 게 있어서.”
-어떤 부탁입니까?
“혹시 API 하나만 짜줄 수 있어?”
-API요?
“어. 코인거래소에 쓸 건데 하나의 명령어로 여러 거래소에 분산된 계정에 매매 주문을 넣는 식이거든. 얘기만 들어선 좀 복잡하게 느껴지지?”
-깃허브GitHub에서 비슷한 오픈소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간단하겠네요.
“듣자마자 그게 감이 와? 이야- 역시 서현 씨네. 그럼 나중에 거하게 한턱 쏠 테니까 부탁 좀 할게.”
-그런데 선배님은 주말 동안 바쁘신 겁니까?
“어. 대전에 갈 일이 있거든.”
-대전에 선이라도 보러 가시는 거군요.
“뭔 선이야. 그냥 코텍에 가서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래.”
-오! 코텍이요? 저희 학교 가시는 거였습니까!
전화기 너머로 반색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런데 저희 학교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서현 씨 지방대 출신이라는 게… 그 지방대가 한국공과대학교였어?”
-예, 맞습니다. 제 모교입니다.
“… 말도 안 돼. 내가 분명히 회사에서 소문으로 들었거든. 서현 씨가 지방대 출신이라서 무슨 국제프로그래밍대회인가 나가서 자기 학교 입상시켰다고.”
-한국공과대학교가 위치한 대전은 지방 도시입니다.
“… 응?”
한국공과대학교도 지방대로 치부해버리다니. 전국의 코텍대생들이 들고 일어날 일인 걸 모르는지 대수롭지 않게 얘기한다.
역시 또라이와 천재는 한끝 차이인 건가.
“… 아무튼 서현 씨 진짜 천재였구나. 몰랐어.”
-천재 아닙니다. 아무튼 선배님, 저희 학교 가시는 거면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됩니까?
“음? 갑자기?”
-심심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캠퍼스 구경 좀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API 코딩해주는 대가로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안될 건 없는데….”
그래핀양산기술의 핵심 비밀을 가진 상태에서 누군가와 동행하려니 약간 꺼려졌다.
하지만 지서현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내려가는 길이 심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코텍 출신이면 가이드로 삼아도 괜찮을 터.
“… 절대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면 허락할게.”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 *
난데없이 합류한 지서현을 데리고 정우는 대전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아 무표정하게 창가를 바라보는 지서현. 오늘따라 옅게 화장까지 한 그녀는 유독 말이 없었다.
“심심하다고 주말에 직장 상사의 지방행에 따라오는 여자라… 하여간 특이하다니까.”
“… 예? 저 말씀이십니까.”
“아냐, 아무것도.”
차를 운전하면서 힐끔 그녀를 쳐다본 정우가 입을 열었다.
“근데 지루하지? 그러게 왜 굳이 따라와서 고생이야.”
“어차피 집에서 할 것도 없었는데 훨씬 재밌습니다.”
“이게 재밌다고? 취향 참 독특하네. 근데 API는 언제 만들려고 그래? 대전 왔다 갔다 하면 주말 삭제될걸?”
“금방 합니다. 그리고 도와주실 거잖습니까.”
“어? 어. 당연히 내가 쓸 건데 도와줘야지.”
“그거면 충분합니다. 음악 틀어도 됩니까?”
“그래 틀어틀어.”
블루투스로 스마트폰을 연결한 지서현이 자신의 음악 트랙을 재생했다.
곧 차 안에 부드러운 발라드가 울려 퍼졌다. 서현 씨 이런 취향이었나.
“… 나쁘지 않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빠른 속도로 대전을 향해 달려갔다.
.
.
.
대전에 위치한 한국공과대학.
그곳 기계공학동 건물 입구에 구형 그랜저가 멈춰 서더니 두 사람이 내렸다.
정우와 창백한 인상의 지서현이었다.
장기 운행에 익숙지 않은 듯 그녀는 멀미로 고생하는 모습이었다.
“… 우욱…!”
“서현 씨 괜찮아? 그러게 속 안 좋으면 중간에 휴게소 들렀다 가자니 고집을 부리고 그래.”
“괘, 괜찮습니다. 우웁…!”
“토할 것 같으면 화장실 좀 갔다 올래?”
“… 버틸만 합니다.”
“으이그… 알겠어, 힘들면 얘기해. 그런데 신소재공학과가 어디야?”
“… 이쪽입니다.”
지서현의 안내를 받아 쉽게 목적지인 신소재공학과 차은숙 교수실을 찾을 수 있었다.
교수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차은숙 교수가 친히 교수실 문을 열어주며 그를 맞았다. 그녀는 안경을 쓴, 정우가 상상하던 교수의 표본 같은 모습이었다.
“어서 오세요. 오시는 길 멀었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죠. 반갑습니다 교수님, 이정우라고 합니다.”
“정우 씨구나. 저도 반가워요. 이쪽은 여자친구분?”
“”직장 동료입니다.””
동시에 외친 두 사람.
민망해서 지서현의 시선을 회피하며 가볍게 악수를 나누던 그때였다. 정우는 문득 차은숙 교수의 눈이 빠르게 자신을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뭐지? 잘못 본 건가 싶을 때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를 자리로 유도했다.
“서서 얘기할 순 없으니 이쪽으로 앉으실까요.”
자리에 앉으니 조교가 차를 가져다줬다.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있자니 차은숙 교수가 입을 열었다.
“제가 답답한 걸 싫어해서 돌려 말하는 걸 잘못합니다. 바로 본론부터 갈게요. 후원을 하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네. 제가 원래부터 재료공학쪽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보다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아, 최근에 투자로 꽤 큰 돈을 만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이거 축하드려야겠네요. 호호.”
“아닙니다. 아무튼 평소에 이쪽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교수님께서 그래핀 대량생산 기술에 굉장한 지식을 보유 중이라고 하셔서 한 번쯤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정우의 말에 차은숙 교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요? 이상하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그래핀 대량생산을 연구하고 있지는 않은데 말이죠.”
그 말에 정우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맘때의 차은숙 교수는 아직 그래핀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의문은 길어지지 않았다.
“뭐, 앞으로는 진행할 예정이긴 합니다. 다만 연구비가 충분하지가 않아서.”
뉘앙스가 미묘하다. 아까부터 후원 얘기도 그렇고 너무 돈 얘기로 쏠리는데?
약간 이상함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 거라면 제가 후원해드릴 수 있죠. 교수님, 그러면 연구 한번 진행하는데 예산은 얼마 정도 소요될까요?”
“한번이라고 딱 정의해서 말하긴 어려워요. 연구가 보통 몇 년씩 길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서요. 그리고 연구 예산이라는 게 보통 실험에 필요한 재료구매비 같은 걸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연구도 사람이 하는 거거든요. 밥 먹는 식대나 학술회 같은 곳 가는 경비나 뭐 기타 등등 부가적인 비용이 꽤 소요됩니다.”
“그렇군요.”
“어때, 혹시 후원 규모는 어느정도 예상하고 계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결국 돈 얘기다. 자꾸 돈으로 주제가 쏠리는 대화에 정우는 자신이 괜히 후원자 행세를 한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별개로 뭔가 이상하다.
전혀 학자처럼 느껴지지 않는 차은숙 교수. 차라리 사업가라 하면 믿을 정도로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그녀를 보면서 마음 한구석에 미묘한 찝찝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글쎄요. 그건 한번 둘러보고 결정하고 싶습니다.”
“호호, 하긴 피땀 흘려 번 돈을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지요. 네네, 편히 둘러보세요. 정 조교!”
“네, 교수님.”
“이분들한테 연구실 좀 안내해드려. 잘 둘러보고 오세요.”
“예, 배려 감사합니다.”
보통 조교가 안내해주나?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여기며 정우는 지서현과 함께 조교를 따라 교수실을 나섰다.
손님이 떠나 교수실에 혼자 남게 된 차은숙 교수.
문밖에서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자 그녀의 온화하던 얼굴이 싹 굳었다.
“… 아무리 봐도 깡통 같은데. 괜한 시간 낭비려나.”
생각에 잠긴 듯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 * *
교수실을 나온 두 사람. 조교를 따라가던 정우가 스마트폰으로 지서현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
[정우]: 서현 씨, 방금 만나본 교수 어떻게 생각해?─────────
스마트폰 진동이 울리자 메시지를 확인한 지서현이 답장했다.
─────────
[서현]: 잘 모르겠습니다 [서현]: 다만 교수보다는 장사꾼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서현]: 그런데 선배님께서는 정말로 그분께 후원을 하시는 건가요? [정우]: ㄴㄴ 그냥 둘러댄 거야 [서현]: 만약 정말로 후원하실 생각이시라면 보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서현]: 개인적으로 느낌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정우]: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우]: ㅇㅋㅇㅋ─────────
역시 사람 보는 눈은 다 비슷비슷한가.
차은숙 교수가 예상과 다른 인물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두 사람은 조교를 따라갔다.
조교는 그들을 데리고 연구실 이곳저곳을 보여줬다.
“여긴 미세조직 시험실이라고 주로 폴리싱작업을 하는 공간입니다.”
“폴리싱작업이 뭔가요?”
지서현의 물음에 조교 대신 정우가 나섰다.
“아, 서현 씨는 협업을 많이 안 해봐서 모르겠구나. 폴리싱작업이 뭐냐면 소재의 조직 같은 걸 분석하기 전에 샌드페이퍼 기계로 매끈하게 갈아서 평탄화하는 작업이야. 보통 폴리싱작업을 하고 현미경 같은 걸로 확인하는 거지.”
“정확하세요. 신소재 쪽 전공하셨나봐요?”
조교가 신기해했다. 옆에서 듣던 지서현도 마찬가지로 놀란 듯 보였다.
“선배님은 저랑 같은 프로그래밍 전공이십니다. 그런데 선배님은 어떻게 이런 정보도 아시는 겁니까?”
“뭐, 샘플런 진행하다 보면 협업하면서 자연스레 다른 팀 정보도 듣게 되거든. 그때 안 거지.”
“그렇군요. 역시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대단하기는. 서현 씨도 같이 일하다 보면 알게 될 정보들이니까 너무 띄워주지 말라고.”
칭찬에 민망해하며 그들은 연구실을 돌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연구 중인 연구원들은 불편한 내색이 없었고, 덕분에 마음 편하게 견학을 할 수 있었다.
“다음 연구실로 이동할게요.”
“그런데 주말인데도 상당히 많이 오셨네요?”
“하하, 코텍이니까요. 다들 연구에 미쳐 있….”
정우의 말에 대답하며 다른 연구실 문을 열던 조교가 굳었다.
거기는 사무공간처럼 보이는 곳이었는데 컴퓨터들로 채워진 거기엔 익숙한 사운드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니 팬티 노오래-!
-앞 뒤 좀 봐 토끼!
-고잉 땡깡!
바로 게임소리였다. 거기엔 몇몇 연구원들이 게임을 플레이 중이었던 것이다.
게임에 집중 중이던 연구원들은 조교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후 대충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조교님 오셨….”
“빨리 안 끄고 뭐해!”
“왜요? 아, 넵넵!”
뒤늦게 조교 뒤에 있던 정우의 얼굴을 본 연구원들이 당황해서 게임을 종료했다.
까맣게 물드는 모니터와 함께 게임 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볼 장 다 본 후였다.
“… 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네요.”
“… 하하, 아까 본 분들은 대학원생들인데 저희 코텍 학생들이 마냥 범생이들은 아니라서 선택과 집중을 잘하거든요. 공부할 때는 공부하고 놀 때는 또 잘 놀고. 그런 느낌?”
“네….”
그리 와닿지 않았다. 대낮에 게임을 할 정도면, 그것도 주말에 굳이 연구실에 나와서 게임을 하고 있을 정도면 평소 연구실 분위기가 어떤지는 충분히 예상이 되었다.
연구실은 저 연구자들에게 그저 PC방이나 마찬가지겠지.
‘… 좀 실망스러운데.’
정우가 상상했던 국내 최초로, 아니 세계 최초로 SCR그래핀기술을 개발한 곳의 분위기와는 딴판이었기에 적잖이 실망했다. 왠지 돈을 밝히는 듯한 차은숙 교수도 그렇고, 놀자판인 연구실 분위기도 그렇고, 혹시 자신이 떠올린 미래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어진 조교의 안내에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오해하실까 싶어서 그러는데 모두가 다 저렇게 놀지는 않아요.”
“이해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풀만 하고 삽니까. 가끔 고기도 먹어줘야죠.”
“그렇긴 하죠. 그런데 만약에 풀만 먹는 사람이 있다면 믿으실래요?”
“네?”
“따라오세요. 보여드릴게요.”
정우가 실망한 것을 눈치챈 건지 변명을 늘어놓은 조교는 그들을 구석진 실험실로 안내했다.
다른 실험실과 비슷한 크기의 공간. 하지만 목적과 컨셉에 맞게 구성되어 있던 여타 실험실들에 비해 그곳은 굉장히 지저분했다.
현미경과 비커가 굴러다니고 어디에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도구들이 널브러져 있는 지저분한 공간은 도저히 실험실 같지 않았다. 쓰레기장 같달까.
“… 여기 실험실 맞죠?”
“못 믿겠죠? 다들 처음 보면 그 소리 하더라구요. 현석아, 누나 왔어. 어딨어?”
쓰레기 더미(?)를 치우며 조교를 따라 실험실 내부로 들어갔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걸까. 구석진 곳에서 한 인형이 부스스 일어섰다. 자그마한 체구의 더벅머리 소년이었는데 눈이 묘하게 풀린 게 좀 모자란 아이처럼 보였다.
“정소민, 나이 26세, 한국공과대학교 신소재공학과 조교.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1동 444번지 대원 오피스텔에 거주. 전화번호는 010-9XXX-XXXX. 가슴은 A…….”
“야!”
갑자기 개인정보를 줄줄 읊는 소년의 입을 조교가 틀어막았다. 그녀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보시다시피 애가 좀 이래서….”
“아 네. 좀 특별한 아이인가봐요?”
“자폐를 앓고 있어서요. 대신 그 서번트 증후군 아시죠? 특정 분야에서 머리가 비상하다고 해야 되나.”
“서번트 증후군이요? 그 영화 레인맨에 나오는 그런 천재 증후군 말하는 거죠?”
“맞아요. 그래서 애가 엄청 똑똑해요. 현석이가 우리 연구팀 에이스랄까요.”
“그래요?”
정우는 믿기지가 않았다. 제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할 것 같은 이 소년이 에이스라고?
“이 친구가 연구한 걸 볼 수 있나요?”
“음, 잠시만요. 현석아, 너 헐크가죽 어디다 뒀어?”
“… 저기.”
“찾았다. 고마워.”
현석이란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조교는 한쪽 구석에서 조그마한 유리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투명한 유리상자 안에는 고무 같이 생긴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보이세요? 요게 현석이가 최근에 만든 거예요.”
“이게 뭔가요?”
“흠 아직 정식명칭은 없고 현석이는 헐크가죽이라고 불러요. 얘가 마블 캐릭터들을 좋아해서.”
“헐크가죽? 감이 잘 안 오네요.”
“음… 인공피부라고 하면 설명이 될지 모르겠네요. 제가 보여드릴게요.”
유리상자에서 헐크가죽라는 걸 꺼낸 조교는 집게 두 개를 들고 그걸 쭈욱 잡아당겼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지만 헐크가죽이라는 명칭답게 전혀 손상이 없었다.
“아직 얼마나 튼튼한지 감이 안 오시죠? 직접 해보시겠어요? 여자분도 좀 도와주세요.”
“네? 네.”
이번엔 정우와 지서현, 조교 세 사람이 삼각꼴로 서서 집게로 잡고 동시에 잡아당겼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온 힘을 다했는데도 말이다.
성인 세 명의 완력을 이겨내는 탄력이라니. 정우는 실로 감탄했다.
“와- 보기랑 다르게 진짜 튼튼하네요. 그치 서현 씨?”
“신기합니다.”
“이게 일반적인 피부가죽을 구성하는 단백질에 거미줄이 가진 인성靭性과 인장력을 더한 건데, 아실지 모르겠지만 거미줄의 인장강도가 어마어마하거든요. 방탄복 재료인 케볼라 섬유보다 높고 강철의 5배 정도?”
“예? 그럼 이 가죽이 사람피부에 이식되면 금강불괴가 현실화 되는 건가요?”
“호호, 이름만 가죽이지 사실 인공섬유에 가까워요. 인체 거부반응 같은 건 아직 테스트해보지 않아서요.”
“신기하네요. 그럼 이 친구는 그걸로 떼돈 버는 겁니까?”
“예? 아, 특허나 논문 말씀하시는 거구나. 아쉽게도 아니에요.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현석이가 기록해놓은 게 없거든요.”
“아….”
“뭐 사실 우연의 산물이라서 어쩔 도리가 없었죠. 원래 작년부터 저희 연구팀의 연구주제가 ‘거미줄 대량생산’이었거든요. 그래서 거미줄과 관련하여 조직 분석이나 구조 해부와 같은 여러 실험들이랑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때 우연찮게 현석이가 개발해낸 거예요.”
“그렇군요.”
“만약 옆에 누가 있어서 실험 데이터를 정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생각해도 참 안타깝습니다.”
현석이를 안타깝다고 바라보는 조교를 보며 정우는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러면 이 친구는 여기 대학원생인가요?”
“현석이요? 아니요.”
“네? 여기 코텍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현석이는 여기 학생이 아니에요. 대학생도 아니구요. 그냥 교수님께서 가엾게 여겨서 공간을 빌려준 것뿐이지 현석이는 일반인이거든요.”
“… 그냥 일반인이라구요?”
“네. 사실 저희 연구팀으로 소개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무소속이에요. 물론 현석이는 여기가 놀이터라 생각할걸요?”
혼자서 인공섬유를 만들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폐아.
심지어 한국공과대학교 소속도 아니고, 차은숙 교수팀 소속도 아니란다.
‘… 혹시 얘라면…?’
차은숙 교수의 도움 없이도 SCR그래핀기술을 구현할 수 있지 않을까.
정우는 갑자기 현석이라는 친구가 보물처럼 보였다.
“이 친구랑 얘기 좀 해봐도 될까요?”
“얘기를요? 글쎄요… 낯선 사람을 경계해서 대화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괜찮습니다. 이름이 현석이라고요?”
“네. 유현석이에요.”
“알겠습니다. 안녕? 네가 현석이니?”
정우가 유현석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현석아, 네가 그렇게 천재라며? 혹시 형이랑 같이 놀 생각 없어? 형이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 플러스 전하를 띤 양전자와 전자가 합쳐질 때 양전자가 반물질이면 충돌로 쌍소멸하며….”
하지만 초점 없는 아이의 눈은 정우의 시선과 절대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알아듣기 어려운 이상한 말만 중얼거릴 뿐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교가 안타깝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나 조언해드리자면 현석이가 마블캐릭터들을 좋아해요.”
“마블요?”
“네. 특히 아이언맨을 좋아하는데 장난감이라도 하나 사주시면 엄청 좋아할 거예요.”
마블이라.
왠지 해답을 찾은 느낌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서현 씨도 거기서 기다려줘! 내가 금방 뛰어갔다 올게!”
“어어… 선배님 같이…!”
정우는 아이언맨 장난감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후다닥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지서현이 어색한 얼굴로 조교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조교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쓸데없이 오지랖을….”
“아닙니다.”
“저… 근데 제가 계속 안내를 해드릴 수가 없어서요. 과사무실을 계속 비워둘 수가 없어서. 일도 밀려 있구요.”
“괜찮습니다. 여긴 제가 있을 테니 가서 일 보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조교마저 퇴장하고 나니 연구실에 남은 건 지서현과 유현석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서현이 유현석에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 안녕?”
* * *
“… 코텍이 이리 넓을 줄이야.”
금방 갔다 올 줄 알았던 정우의 예상과 달리 장난감을 구하는 데 크게 애먹었다.
캠퍼스가 워낙 넓었던 점과 마트가 캠퍼스에서 상당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컸다.
게다가 마트에서도 제대로 된 아이언맨 장난감을 팔지도 않아서 그나마 겨우 구한 거라고는 조잡한 아이언맨 마스크가 전부였다.
“이거라도 좋아해 주면 좋겠는데.”
기대 반 떨림 반의 심정으로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리곤 두 눈을 의심했다.
지서현과 유현석이 한쪽 바닥에 사이좋게 앉아 두꺼운 전공서적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보던 정우는 문득 들고 온 아이언맨 가면을 내려다보곤 허탈하게 웃었다.
“… 이거 필요 없겠는데.”
진짜 해결책을 찾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