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fter coin jackpot RAW novel - Chapter (36)
“얼마 안 한다고요?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650만원이 아닙니다. 650억원입니다.”
“잘 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제가 대신 갚아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허… 정말로요?”
“예.”
“믿기 어려운 얘기군요. 얼마 전까지 제 회사의 직원이었던 이 선임… 아니 이 대표한테 그런 거금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이해합니다. 저라도 믿기 어렵거든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그 많은 돈이 있는지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제가 대표님의 부채를 대신 갚아드릴 능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대표님은 돈이 필요하시다는 것. 그게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 음.”
이정우 대표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고,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야만 했으니까.
다만 이 대표가 과연 무엇을 원하기에 이런 제안을 주는 걸까.
“…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조건이 있을 것 같은데.”
“아무 조건 없습니다. 아, 이자 정도는 주셔야겠네요.”
갑작스러운 정우의 말에 같이 따라온 탁세훈 팀장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분명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지분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협상을 하기로 했었으니까.
“아니, 대표님…?”
탁세훈이 말을 꺼내려고 슬쩍 입을 열자 정우가 그를 쳐다보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담담한 그의 눈빛에 담긴 무언의 메시지가 ‘이번엔 자신을 믿어달라’ 말하고 있었다.
그 의지가 느껴져 탁세훈은 나서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정우의 제안에 성태규 대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정말 그게 답니까? 다른 조건도 없이요?”
“예. 성운이노베이션이 회복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보거든요. 그 결과로 저희도 든든하고 우호적인 납품처 확보하면 윈윈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조건이 없다니요. 돈 빌려주고 이자 받을 건데요?”
“아아, 그렇다면 이자는 얼마나…?”
성 대표는 분명히 이자율이 엄청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법정금리 정도면 충분합니다.”
“겨우 그 정도 조건이 전부라구요? 믿기지 않군요.”
“대신 다른 조건이 있어요.”
“… 역시 조건이 없을 리가 없지요. 말씀해보십시오.”
“대표님, 이제 사람을 잘 쓰시고 경영도 직접 잘 하셔야 합니다. 그게 제 조건입니다.”
“그게 무슨…!”
너무나도 간단해서 어이가 없는 황당한 조건이다.
고작 법정금리로 대환대출을 해주면서 이런 간단한 조건을 붙인다고?
솔직히 지분을 요구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성태규 대표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정우의 말에 충격을 받고 말았다.
“사실 이번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알았다구요? 어떻게요?”
“양규철 사건. 그 배후가 궁금하다고 물어보신 적 있으시죠?”
기억난다.
산업스파이였던 양규철을 잡은 공로로 포상하고 면담을 했을 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때 모른다고 답했던 이정우였다.
“설마… 배후를 알았던 겁니까?”
“예. 배후는 아마도 성재민 본부장이었을 겁니다. 대표님 아드님이요.”
“… 역시 알았군요.”
“어? 대표님도 아셨습니까?”
“아니요. 몰랐습니다. 몰라서 이렇게 당한 거지요. 허허허….”
“당했다니… 설마 이번 대한화학 사태가 성재민 본부장과 연관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재민이 고놈이… 다 제가 자식 농사를 잘못 지은 업보지요….”
한숨을 푹 내쉬는 성태규 대표는 굉장히 심란했다.
그러고 보니 산업스파이를 잡은 것도 이정우 대표였다. 당연히 무언가 낌새를 눈치챘을 텐데 그에게 세세하게 물어보지 않았다니.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반면에 이정우 대표는 자신이 말하지 않은 점을 자책했다.
“제가 퇴사하기 전에 대표님께 강력히 경고해드렸어야 했는데… 물증이 없어서 말씀을 못 드린 게 이렇게 스노우볼이 굴러갈 줄은 예상 못 했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빨리 일을 벌일 줄이야… 제 불찰입니다.”
“…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이 대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회사 경영을 잘못한 제 부덕 탓이지요. 그러니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아니, 이제라도 얘기해주니 고맙네요.”
괜찮다고 대답하는 성태규 대표.
하지만 그의 얼굴은 허탈해 보였다.
경영자로서 자신의 자질에 대해 회의감이 일었기 때문이다.
일개 직원도 알던 걸 자신은 몰랐던 점과 그저 성재민 본부장, 자기 아들만 믿고 눈과 귀를 닫은 채 살았던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전적으로 성태규 본인의 실책이자, 경영자로서 자격 미달이다.
‘… 난 자격이 없었던 거야.’
갑자기 모든 게 멀게만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력감이 성태규 대표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훨훨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 이 대표, 내가 당신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믿어보십쇼.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도움… 받겠습니다.”
이후 간단하게 앞으로 어떤 식으로 계약을 진행할지, 은행 대출금은 언제 입금이 가능한지 대략적으로 조율했다. 정식 계약서를 준비해서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며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는 이정우 대표의 등이 넓다.
자신의 직원이었던 남자.
그 이름도 몰랐던 일개 직원이었지만, 어느새 둥지를 떠난 새는 당당한 성조成鳥가 되어 있었다.
불과 몇 개월도 안 되어 몇백억을 갚아주겠다고 나선 저 번듯한 경영자의 뒷모습이란.
‘… 그래 당신이라면…!’
회사를 맡겨도 되지 않을까.
도둑놈 같은 대한화학에 비하면 백만 배는 낫다.
결심이 선 성태규 대표는 병실을 막 나서려던 이정우를 다급히 불렀다.
“저기 이 대표!”
“예?”
“딱 하나… 내가 어려운 부탁 딱 하나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 * *
성 대표를 만나고 병실을 나서는 두 사람.
탁세훈 팀장이 입을 열었다.
“… 놀랍네요. 성 대표가 그런 결단을 내릴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놀랐습니다. 무슨 심경 변화가 생긴 것 같네요.”
“대표님이 의도하신 거 아닙니까?”
“제가요? 전혀요. 제가 뭘 했는데요?”
정우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그 모습에 탁세훈이 당황했다.
“아니, 원래 지분 협상하기로 얘기하셔놓고 막상 만나니까 대표님이 갑자기 그냥 돈만 빌려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전 그거 성 대표에게 호감을 사려고 의도하시고 말씀하신 줄 알았는데요? 그래서 저한테 눈치 주신 거 아니셨습니까?”
“에이, 무슨 소리예요. 그냥 성 대표님 입원해서 수척해진 걸 보니까 그런 분 앞에서 회사를 넘겨라 지분을 넘겨라 소리가 차마 안 나오더라고요. 사람으로서 도리는 지켜야죠.”
탁세훈 팀장은 어이없다는 얼굴이다.
“대표님, 비즈니스는 전쟁입니다.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건 전쟁의 기초 중 기초고요.”
“그건 전쟁이 아니라 전투죠.”
“예?”
“전투에서 이긴다고 전쟁을 이기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왜, 그런 왕 있지 않았어요? 전투는 모조리 이겼는데, 결국 나라는 망했던.”
“… 피로스. 피로스의 승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그거 맞는 것 같네요.”
에피로스의 왕이었던 피로스는 전투에 관해서는 귀신 같은 능력을 보여서 치른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잦은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손실으로 결국 패망하고야 말았다.
현대에도 ‘피로스의 승리’라 불리는 이득이 없는 승리가 바로 그 왕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여기서 대표님을 몰아세워봤자 우리는 성운을 노리는 사람들 중 하나밖에 안 되는 거니까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좋은 관계라도 만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지분 이야기는 그 다음에 꺼내도 되니까요. 왜 그런 거 있지 않나요? 채무를 지분으로 바꾸는….”
“전환사채나 신주인수권부 사채요. 아니, 거기까지 보셨다고요?”
“네, 그런데 이렇게까지 잘 풀릴 줄은 몰랐네요.”
탁세훈은 뒷말을 삼켰다.
자신이 모시게 된 이정우 대표. 그는 보면 볼수록 놀라운 사람이었다. 어떨 때는 어설퍼 보이지만, 어떨 때는 흐름의 맥을 탁 짚어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곤 했다.
‘말 그대로야, 내가 눈앞의 전투에 집중할 때, 대표님은 큰 대국을 봤어. 이건 단순한 운이 아니다.’
탁세훈은 이정우란 사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점점 마음에 들었다.
* * *
방음이 잘 되는지 바깥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밀폐된 방안.
디귿 자 형 소파가 둘러싼 테이블에는 안주가 세팅되어 있고, 고급 위스키가 얼음통에 담겨 개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한잔 받아요.”
한민준 부사장의 권유에 성재민 본부장은 크리스털 잔을 들어 술을 받았다.
술을 따라주는 한민준의 얼굴엔 흐뭇함이 가득했다.
“고생 많았어요, 성 본부장.”
“… 아닙니다.”
하지만 성재민의 얼굴은 어딘가 멍해 보였다.
“어때, 성 대표는 괜찮죠? 의식 차렸다고 들었는데.”
“… 예. 많이 회복하셨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원래 그 나이 되면 한번씩 픽 쓰러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아무튼 성운 쪽에 우리 의사는 밝혔으니까 성 본부장이 마지막까지 성 대표 좀 잘 설득해봐요.”
“… 죄송합니다. 일전에 약속하신 대로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성재민이 거절했다. 한 부사장과 한 그의 약속은 딱 판을 까는 것까지였으니까.
이미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뒤였지만, 더 이상 개입하기엔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아직 회사가 내 손에 넘어온 게 아니잖아요.”
“… 부탁하셔도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 제 손을 떠났거든요. 아버지가 저에게 실망이 큰 상황이라 얼굴도 안 보려고 하시는데 무슨 수로 설득을….”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으니 잘 좀 구슬려봐요. 나는 우리 성 본부장 믿고 계좌도 이미 선불로 넘겼는데 이제 와서 이러면 섭하지.”
“…….”
“설마 아직 계좌 안 까본 건 아니지?”
“… 그건 이미 출금했습니다.”
한민준의 슬쩍 떠보는 말에 성재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대답에 한 부사장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뭐야. 그럼 돈맛도 봤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기야? 그러지 말고 힘 좀 더 써봐요. 마지막까지 파이팅 있게. 뭔 느낌인지 알지?”
“…… 알겠습니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자, 짠 할까요?”
두 사람이 든 크리스털 잔이 부딪친다.
성재민 본부장은 마지못해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켰다.
술이 쓰다.
수천만 달러도 손에 넣었는데 이 찝찝한 기분은 뭘까.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그, 그게 부사장님!”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재민 본부장도 아는 얼굴, 바로 한민준 부사장의 비서였다.
그의 안색은 다급해 보였는데, 비서의 등장에 술자리 흥이 깨지자 한민준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뭐야? 급한 일 아니면 들어오지 말랬잖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보고를 드려야만 하는 긴급상황이라…!”
“하씨… 알았으니까 뭔데?”
“… 방금 연락을 받았는데 성운쪽에서 은행 대출을 모두 상환했답니다…!”
“뭐?!”
은행 대출을 모두 상환했다고?
돈줄이 말라버린 성운이 무슨 수로 650억원을 갚는단 말인가?
“그게 뭔 개소리야!!!”
버럭 소리를 지른 한민준 부사장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이내 옆에 앉아 있던 성재민을 노려보았다.
“성재민 이 새끼야! 니가 감히 날 가지고 놀아?”
“저, 전혀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 니 말대로 모르는 일이어야만 할 거다. 인생 쫑나기 싫으면.”
“… 믿어주십쇼!”
성재민이 다급히 일어나 허리를 굽혔지만, 한민준은 사과를 받아주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룸을 빠져나가기 직전 그의 스산한 목소리가 성재민의 귀를 찔렀다.
“… 만약 이번 일 나가리 되면… 이번엔 진짜로 연예인 데뷔 각오해야 할 거야.”
“부, 부사장님!”
“가자.”
“부사장님! 부사장니이임!!!!”
성재민이 소리쳤지만 한민준은 그를 남겨둔 채 자리를 떠나버렸다.
남겨진 성재민 본부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 * *
조용한 회의실.
아직 완쾌가 되지 않은 듯 안색이 창백한 성태규 대표와 정우가 독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앞에 놓인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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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분양도 계약서>양도인 성태규(이하 ‘갑’이라 한다)와 양수인 이정우(이하 ‘을’이라 한다)는 아래와 같이 지분양도 계약을 체결한다.
[제1조]‘갑’은 ‘갑’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 성운이노베이션의 지분 100%를 ‘을’에게 양도하고 ‘을’은 이를 양수한다.
[제2조]‘갑’이 ‘을’에게 양도한 지분의 대금은 일금 500억원으로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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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성태규 대표는 정우에게 모든 지분을 양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지금 이 자리는 그 지분양도 계약을 마무리하는 자리였다.
작성한 계약서를 확인한 두 사람은 각자 서명을 마쳤다.
이로써 성운이노베이션의 지분 100%를 정우가 인수하게 되었다.
계약을 마친 성 대표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 대표.”
“지분 전부를 넘기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정우의 물음에 성태규 대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평생을 일궈온 기업을 500억원에 넘겼다. 누군가에게는 말도 못할 거액이지만, 인생의 대가로 500억원은 싼값일지도 몰랐다.
“후회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련 두지 않으려 합니다. 짐을 내려놓으니 후련하거든요. 그보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채가 650억이나 있는 회사를 500억에 인수해주시다니, 이 대표의 아량에 고마울 뿐입니다.”
정우는 지분을 500억원에 인수하는 것 외에도 성운이노베이션 법인에 부여된 부채 역시 인수하게 되었다. 총 1,150억원으로 인수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당장 손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비전을 생각하면 전 오히려 헐값에 인수했다고 봅니다. 그러니 감사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백억이 어떻게 헐값일 수가 있겠습니까. 저도 만족하는 거래이니 괘념치 마세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편해지네요. 아무튼 이제 성운이노베이션의 대표로서 회사 정상화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만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앞서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성재민 본부장… 검찰에 수사를 의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우의 말에 이 대표는 올 게 왔다는 표정이다.
“…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알겠습니다.”
“아드님의 배임이 워낙 심각해서 회사 차원에서 수사를 요청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죄를 저질렀으면 매를 맞아야지요. 그놈 자식 꼭 죗값 치를 수 있게 해주십쇼.”
“… 예.”
담담히 얘기하는 성 대표. 하지만 정우는 느껴졌다. 자기 핏줄을 수사해달라고 말하는 성 대표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찢어지고 있을지를.
“여러 사건들로 스트레스가 심하실 텐데 당분간은 요양도 하시고 푹 쉬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겠습니다.”
“그리고 좀 쉬시다가 괜찮아지시면 나중에 와서 일 좀 도와주십시오.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일이라….”
이제 일이라면 꼴도 보기 싫었다.
가족과 친구들 모두 놓고 꿈만 쫓던 지난날들이 허무하다.
하지만 나중에, 정말 나중에라도 그런 마음이 든다면.
다시 한번 꿈을 쫓아보고 싶어진다면.
“…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새로운 성운이노베이션의 대표, 정우가 환히 웃었다.
* * *
대한화학 납품 계약 취소 사태가 터지고 나서 성운이노베이션의 사내 분위기는 한동안 흉흉했다. 은행 대출 상환을 못하고 회사가 곧 부도를 할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동안 사직서를 제출하는 일이 잦아졌고, 계속 직원 이탈이 이어지자 곧 이대로 회사가 완전히 해체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에 직원들이 일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성운이노베이션이 부도를 막았다는 공문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
[사 내 공 문>문서번호: SW-D1-170621-A1
발신: 성운이노베이션 성태규 전 대표
수신: 전 직원
제목: 대한화학 납품 계약 취소 사태 결과 및 대표이사 변경 건
내용: 친애하는 성운이노베이션 전 직원들께 알려드립니다.
최근 대한화학 납품 계약 취소 사태와 관련하여 회사의 부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
당사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였으며 대출금상환실패로 인한 부도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
이 모든 사태에 책임을 통감하며 성운이노베이션 대표 자리를 사임하겠습니다.
더불어 본인이 소유한 성운이노베이션의 모든 지분을 이정우(네뷸라 코퍼레이션 대표)에게 양도하였으며, 오늘 날짜로 당사의 대표이사가 성태규에서 이정우로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회사의 소재지, 대표번호, 홈페이지 주소, 영업관련 사항 등은 변경사항 없이 동일하며 직원들의 근로계약도 변경사항 없이 동일하게 진행됩니다. 다만 회사의 명칭은 이후 성운이노베이션에서 [네뷸라 케미컬>로 변경됩니다.
앞으로 네뷸라 케미컬은 회사명과 대표이사 변경을 계기로 더욱 발전해나가며 직원들의 복지에도 힘을 써 전 직원 여러분의 계속적인 신뢰와 사랑을 받으며 성장해나가는 회사가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나가겠습니다.
전 대표이사 성태규 (인)
현 대표이사 이정우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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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로 공문을 받은 CS팀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래도 이번 사태 좀 진정되나 봐.”
“다행이에요. 저 쫄려서 이력서 쓰고 있었잖아요.”
“나도야. 얼마나 이력서 관리를 안 했던지 너무 어색하더라니까?”
“그래도 미리미리 좀 써놔야 할까봐요. 회사가 자꾸 요새 안 좋은 일들만 일어나는 게 조만간 뭐 하나 크게 터질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김 과장 말이 맞긴 해. 미리미리 좀 대비해놔야지.”
CS팀 모두가 회사 부도 사태에 대해 떠들 때.
자기 자리에서 공문을 읽던 안예슬은 시큰둥했다.
‘어차피 소송만 잘 끝나면 이따위 회사 다닐 이유도 없어.’
수중에 돈이 없어서 은행 대출과 가족들에게 돈을 끌어다가 3,500만원의 소송 비용을 치렀다. 이제 남은 건 소송에서 승소하여 전남편에게 돈을 뜯어오는 일.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해도 안예슬은 별로 걱정이 없었다.
퇴사해도 곧 억만금이 들어올 예정이니까.
그런데 공문을 보던 안예슬은 이상한 걸 발견했다.
“… 이정우?”
새로 바뀌게 된 회사의 대표 이름이 전남편과 똑같았던 것.
재수 없는 이름.
우연이고 동명이인이겠지만 왠지 기분이 나빠서 공문을 꺼버렸다.
그런데 그녀가 중얼거리는 걸 옆에서 들었는지 호들갑을 떨어댔다.
“어머, 그러고 보니 새 대표님 이름이 이정우네?”
“그러게. 이런 우연이 다 있지?”
“흔한 이름이니까 뭐. 우리나라 국민 중 절반은 이씨일 테고, 남자 이름 중에 정우라는 이름은 흔하잖아? 우연이겠지. 그보단 성 대표님이 사임하신 게 안타깝네. 나 입사할 때도 그 분이 계셨는데.”
“거의 한 30년 넘게 있지 않으셨나요?”
“아마도? 그런데 그렇게 오래 계셨어도 별수 없네. 이렇게 한방에 훅 가시는 걸 보면 대표라는 자리도 꼭 안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
CS팀이 이러쿵저러쿵 대표자 변경 건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던 무렵이었다.
“… 헐? 대박!”
“뭐가 진희 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쪽 구석에서 홀로 인터넷 서핑 삼매경에 빠져 있던 오진희가 혼자 소리쳤다가 이내 눈치를 보더니 조용해졌다.
이슈에 민감한 여직원들답게 곧 그녀 쪽으로 관심이 쏠렸다.
“뭔데뭔데?”
“… 아니에요. 그… 메신저로 말씀드릴게요.”
“그래? 알겠어.”
이후 사내메신저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건지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만 CS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 뭐지?’
이 소외되는 듯한 기분은 뭘까.
안예슬은 무언가 위화감과 더불어 불쾌함을 느꼈다.
팀원들이 자기만 빼놓고 얘기를 나누는 것만 같았다. 왕따 당하는 듯한 기분이랄까.
이런 불편함을 속에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기에 안예슬이 대놓고 물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세요?”
“어? 아, 아냐. 아무것도 아냐.”
“그러지 말고 저도 껴주세요. 무슨 얘긴데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버럭 소리치는 CS팀장.
안예슬은 깜짝 놀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CS팀장이 정색을 한단 말인가. 오히려 자기가 정색을 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 알겠어요.”
괜히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안예슬.
그녀의 예리한 촉이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하릴없이 인터넷을 접속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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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내 불륜 유출영상
2. 태평양 선박 추돌
3. 장마 전선 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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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검에 이상한 검색어가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내 불륜 유출영상?’
불륜, 유출과 같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적인 검색어.
궁금해져서 눌러보자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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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간부 사내 불륜 영상 유출]국내 한 커뮤니티에 모기업 간부의 불륜 영상이 올라와 화제가 되고 있다.
글쓴이는 간부가 부하 직원의 아내와 외도를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해당 게시글은 이내 삭제되었지만, 영상의 원본 링크는 세계 최대 포르노 사이트에 현재까지도 업로드되어 있으며……
……
해당 영상의 당사자들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에서 수많은 네티즌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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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방금 보고 옴 ㄷㄷ 여자 색기 장난 아니네
└└어디서 봄? 출처 공유점
└└└폰헙에 불륜 영상 검색하면 제일 상단에 나옴
└└└└ㄱㅅㄱㅅ
└근데 누구임?
└└원본 영상 댓글에 달려 있음
└개더럽다;;
└진짜 직장 상사가 내 마누라한테 저랬다고 생각하면 피꺼솟할 듯
└상사란 새끼는 개새끼고, 여자도 ㅁㅊ년인 듯
……
해당 기사는 모자이크 처리된 호텔처럼 보이는 방 사진을 필두로 작성되어 있었다.
남녀가 엉켜 있는 것으로 보이는 침대쪽은 강하게 모자이크되어 있어서 알아보기 힘들었는데, 그 외에 호텔 방은 선명하게 잘 보였다.
안예슬은 그 방이 왠지 낯익었다.
‘… 설마?’
왠지 모를 불안감에 그녀는 부랴부랴 원본 영상을 검색해보았다. 불법 사이트라 회사 컴퓨터로는 접속이 어려웠지만, 핸드폰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간부가 부하직원 아내랑 놀아나는 사내 불륜 영상>날 것 그대로의 제목처럼 영상 역시 모자이크 없이 날것 그대로였다.
시작부터 나체로 뒤엉킨 두 남녀가 나오는 살색의 몰카 영상. 처음엔 뒷모습이었지만, 이내 두 남녀의 자세가 바뀌며 얼굴이 드러났다.
리드미컬한 테크닉을 자랑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곧 훈훈한 마스크가 만천하의 공개되었다.
잘생긴 얼굴.
하지만 그 얼굴을 본 순간 안예슬은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 본부장님?’
그는 자신의 내연남이었던 성재민 본부장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