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fter coin jackpot RAW novel - Chapter (37)
‘성재민 본부장이 왜…?’
왜 이 몰카 영상에 성재민이 나온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안예슬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모습을 드러낸 성재민의 파트너의 얼굴을 보곤 사색이 되고 말았다.
영상 속 여주인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하나 없는 야릇한 표정으로 교성을 질러대며 성재민과 뒤엉킨 자신의 모습.
무음이라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적나라한 영상을 본 안예슬은 놀라서 스마트폰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낙하의 충격에 박살나는 핸드폰.
그러자 CS팀원들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어머, 예슬 씨 괜찮아?”
“… 괘, 괜찮아요.”
“액정 다 나간 거 아니야?”
“…….”
걱정해주는 동료들의 목소리.
하지만 염려의 목소리와 달리 그녀들의 얼굴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오히려 미묘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
그제야 안예슬은 깨달았다.
‘… 다 알고 있었던 거야.’
CS팀원들도 해당 영상을 보았음을.
영상의 여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음을 눈치챘다.
하기야 모를 수가 없다.
스마트폰을 떨어트리기 전 마지막에 본 영상 댓글에는 버젓이 [성운이노베이션 성재민 본부장/CS팀 안예슬 대리>라고 신상정보가 달려 있었으니까.
결국 그녀의 부정과 치부가 만천하에 공개되고 만 것이다.
“… 시발….”
“음? 방금 예슬 씨 뭐라고 했어?”
“… 팀장님 저 몸이 안 좋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엥? 갑자기?”
“죄송합니다!”
“예슬 씨!”
뒤에서 부르는 CS팀장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안예슬은 가방만 대충 집어든 채 도망치듯 사무실을 벗어났다.
일과 시간이라 업무를 하는지 바쁘게 복도를 오가는 직원들의 눈길이 문득 그녀를 향한다.
그 눈빛들이 마치 자신을 흉보는 것만 같았다.
‘더러운 년.’
‘남편 놔두고 성재민 본부장이랑 붙어먹은 년이었어?’
‘이정우 선임이 그럼 피해자였네.’
‘진짜 남자 밝히게 생기긴 했다.’
누구 한 명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왠지 그렇게 욕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순간적으로 욱해서 소리쳤다.
‘그래, 씨발! 나 본부장이랑 잤다! 어쩔래!’
물론 마음뿐이었지만.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안예슬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정신없이 내달렸다.
부끄러워 얼굴을 도저히 들 수가 없다.
아무래도 오늘이 회사의 마지막 출근이 될 것 같다.
* * *
본부장실.
테이블에 놓인 성재민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CS팀 안예슬 대리]마치 일적으로 저장해놓은 것처럼 사무적인 느낌의 이름이 액정에 떠올랐다.
안예슬.
바로 성재민 그와 불장난을 저질렀던 여자다.
이미 몇 달 전 관계를 정리한 그녀에게서 전화가 온 이유는 하나다.
‘… 알아버렸나.’
안예슬 그 여자도 성인사이트에 올라간 그들의 영상을 본 게 틀림없었다.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을 게 뻔하거니와, 딱히 해결책도 없었기에 성재민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니, 받는 대신 아예 꺼버리고 차단해버렸다.
이후 영혼이 나간 듯 초점 없는 눈빛으로 한곳에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는 바로 한민준 부사장이었다.
[…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로….]하지만 몰카영상이 유출되었을 때부터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한민준 부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와 연락을 주고 받던 세컨폰은 이미 정지시킨 모양이다.
심지어 평소에 연락책을 맡았던 임 비서 역시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사람이라 믿었던 임 비서는 최악의 상황이 다가오자 그를 버리고 떠난 것이다.
‘… 버려진 건가.’
개처럼 기었지만 결국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그는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만 것이다.
아니 헌신짝은 고쳐 쓸 가능성이라도 있지, 실추된 명예는 돌이킬 수 없다.
무엇보다 지인들, 인맥들 간의 잃어버린 신뢰는 되돌릴 수 없다.
지금처럼.
[집사람]스마트폰 액정에 떠오른 선명한 세 글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올게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
-… 이혼해.
“…….”
아내가 내뱉은 첫마디는 이혼하자는 말이었다.
그 말에 성재민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여보…! 내가 잘못….”
-변명 듣지 않을 거야. 애들 데리고 친정 가 있을게. 찾아오지도 말고, 이혼 서류 보낼 테니까 이대로 끝내. 양육권은 내가 가지고 갈게.
“여보… 한번만… 한번만 용서해줘…. 그저 실수 한번 한 것뿐이야…. 진짜 실수였다고…!”
성재민이 다급히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아내의 돌아온 아내의 말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 실수? 고작 한번 실수했다고? 넌 내가 진짜 바보인 줄 아니?
“… 뭐?”
-당신 맨날 일 있다고 나갈 때마다 샤워라도 하고 온 건지 집에서 쓰는 샴푸향이랑 달랐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리고 당신 뿌리는 향수랑 전혀 다른 여자 향수 냄새 셔츠에 묻혀 오고. 당신은 진짜 내가 바보 멍청이인 줄 알았나 봐. 그러니까 그렇게 대놓고 날 무시한 채 다녔겠지.
“… 여보! 내가 다 설명할게…!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설명은 무슨. 그리고 새해 첫날 당신 일 있다고 회사 간 날 기억나? 나 그날 회사 갔었어.
“… 뭐?”
-우리 엄마가 오셔서 애 대신 봐준다고, 성 서방이랑 오붓한 시간 보내라고, 그래서 잔뜩 단장하고 회사 찾아갔었어. 그런데 당신 없더라?
“그, 그건…!”
-알아. 그 여자 만났겠지. 나도 눈치가 있는데 모를 수 있나. 그런데 병신 같은 건 난 그걸 용서하려 했다는 거야. 친구들이랑 가족들한테 그렇게 자랑했는데, 우리 남편이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그렇게 떠들었는데! 그게 너무 아깝고 내 자신이 비참해서 도저히 이혼하자는 얘기가 안 나오더라! 내가 집에 돌아가서 엄마한테 변명할 때 얼마나 비참했는 줄 알아?
“… 여보…!”
-그런데… 그렇게 참고 넘어가 줬는데… 실검에 올라왔대? 당신 진짜 사람 새끼야?
“…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그냥 병신 새끼야….”
-병신인 건 아네. 그런데 난 마음이 성모마리아처럼 너그럽지 못해서, 병신이랑은 못 살겠어. 그러니 이혼해.
“여보…!”
-불쌍한 척 다시는 연락하지 마. 앞으로 변호사 통해서 얘기해.
뚝-
매몰차게 전화가 끊겼다.
성재민이 다급히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차단이라도 한 건지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허탈한 듯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 끝났다.’
모든 게 무너졌다.
사회적 지위도, 명예도, 직업도, 가정도, 모조리 무너져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 그때 거기만 가지 않았더라면.’
21세기 대한민국 인재포럼.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청년들이 모이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날이 떠오른다.
거기서 그는 한민준 부사장을 처음 보았다.
대한그룹의 일원으로서 30대라는 젊은 나이에 부사장 자리에 오른 인물.
재벌 중의 재벌이라는 대한그룹 사람답게 그는 모든 면에서 빛이 나는 멋진 남자였다.
그래서 친해지고 싶었다.
자신도 저 사람처럼 빛나고 싶었다.
성공하여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욕심이 잘못되었던 걸까.
그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성재민은 순수함을 잃게 되었다.
술은 물론이요, 유흥과 심지어 유학시절에도 멀리했던 대마초도 접해봤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으나,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처럼 헤어 나오려 애쓸수록 더 깊게 빠져들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양심에 의한 거부감은 점차 희석되고 대신 대담해져만 갔고, 어느 순간 그는 타락했다.
돈, 명예, 여자, 모두 자신이 원하면 전부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민준 부사장과 함께라면 정말 이 대한민국을 손안에 쥐고 흔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이 우습게 보였다.
그래서일까.
어느순간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들이 하찮게 여겨졌다.
고작 1억 간신히 넘는 연봉은 수십억이 넘어가는 한민준 부사장의 연봉에 비하면 하잘것없어 보였고.
매년 적자만 기록하는 자신의 회사는 쓰레기처럼 보였다.
특히 연구다 뭐다 매일 실험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아버지가 제일 한심하게 보였다.
고작 이딴 쓰레기 같은 회사를 위해 가족도 나 몰라라 하고 평생을 바쳤단 말인가.
나 같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는 전고체배터리 사업은 진즉에 접었을 텐데.
대신 그 돈으로 멋지게 살았을 텐데.
가족들을 위하고 챙기며 그렇게 멋진 아빠로서 살아갈 텐데.
그때 그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한민준 부사장이 달콤한 제안을 해왔다.
MG음극재 기술을 빼오면 한자리 주겠다고.
돈도 섭섭지 않게 챙겨주겠다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고작 기술 하나 정도 빼돌린다고 회사에 타격도 없을 테니까.
특히 헛된 꿈에 인생을 갈아 넣고 있는 아버지를 멈출 수 있게 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고, 그 지긋지긋한 배터리사업부를 축소시킬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겸사겸사 돈도 챙기고.
결국 성재민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몇몇 직원을 포섭하여 일을 진행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잘 풀리리라 생각했다.
이정우 때문에 일의 핵심이자 선수였던 양규철이 산업스파이로 잡히면서 모든 게 틀어지기 전까지는.
‘… 그때라도 발을 뺐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 이후는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배임 혐의와 몰카영상을 약점으로 잡힌 뒤였으니까.
결국 한민준의 노예나 다름없게 된 신세에서 그는 큰 결단을 내렸다.
이 기회에 지긋지긋한 회사를 대한화학에 넘기고 모든 걸 끝내버리자고.
똥쓰레기 같은 회사를 팔아치우고 그 돈으로 새 출발을 하자고.
새 출발. 그래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면 돼.
한민준 때문에 억지로 시작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실제로 가능한 완벽한 계획이라고 여겼다.
“… 하지만 내 착각이었네.”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 같은 계획이었다.
판을 잘 깔았지만 결국 재주는 대한화학이 부리고 그 대가는 네뷸라 코퍼레이션의 이정우가 가져가게 되었으니까.
누구라도 그들이 짠 판에 난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놓쳐버린 것이다.
아니, 감히 대한그룹이 짜놓은 판에 간 크게 난입할 적이 있다고 상상치 못했다.
“… 이정우.”
그 한 사람이 자신의 몰락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이정우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모든 계획은 성공했을 텐데.
대한그룹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달려든 부나방이지만, 결과적으로 그 부나방이 키운 불씨 때문에 자신은 몰락하게 되었다.
“하하하… 시발.”
짜증과 분노를 주체못해 책상을 뒤엎었다.
막장드라마의 빌런 실장 캐릭터가 꼭 이러곤 하는데, 자기가 그걸 똑같이 하고 있을 줄이야.
한심하고, 허탈하고, 비참하다.
그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가슴이 타는 듯이 답답해질 때였다.
벌컥- 본부장실 문이 열리더니 일련의 무리가 들어섰다. 선두에 있던 배우 같이 잘생긴,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의 인물이 입을 열었다.
“성재민 본부장 맞으십니까?”
“… 그렇습니다.”
“수원지검 차명진 검사입니다. 성재민 당신을 배임 혐의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위반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변명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부터 하는 말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수갑 채워.”
“…….”
이젠 하다 하다 검찰에서까지 자신을 붙잡아가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한숨도 안 나왔다.
그런 그의 두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은색의 족쇄를 내려다보며 성재민은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했다.
* * *
성재민 본부장이 배임혐의로 긴급체포되는 모습은 모든 직원들이 목격했다.
처음에 직원들은 왜 본부장이 체포된 것인지 의아해했다.
“본부장님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잡혀가신 거지?”
“그러게 말이야.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
그들에게 있어서 본부장은 자기 할 일 잘하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으니까.
하지만 곧 뉴스에 자극적인 타이틀로 대대적인 보도가 뜨자 여론은 달라졌다.
그제야 직원들은 본부장이 회사를 팔아넘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회사를 위기로 몰아넣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미친 거 아니야? 성재민 본부장 성 대표님 아들이잖아. 어떻게 자기 아버지 회사를 팔아먹으려 하지?”
“그러게 말이야. 패륜아도 저런 패륜아는 없을 것 같은데.”
“무슨 사정이 있겠지. 솔직히 우리 회사 적자 장난 아니긴 하잖아. 비전이 없어서 팔아버리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자기 회사가 아니라 아버지 회사라서 성 대표가 못 팔게 하니까 대한화학이랑 엮어서 강제로 매각할 수 밖에 없게끔 상황을 짠 것 같네.”
“무섭다, 무서워. 지분 그렇게 많이 쥐고 있는 기업 대표라고 해서 천년만년 안전한 게 아니었네.”
직원들은 아들이 아버지 회사를 팔려고 했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갑론을박 떠들어댔다.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에 몇몇 직원들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그 얘기 들었어요? 영업팀 곽동호 과장이랑 공정설비팀 이기갑 책임, 말도 없이 퇴사했대요.”
“정말요?”
“전 전산팀장님도 퇴사했다더라구요. 딱 보니까 성재민 본부장 라인은 다 줄줄이 퇴사하는 것 같던데요?”
“해고한 거 아니에요? 대표님 바뀌면서 대대적으로 구조조정 시작한 것 같던데.”
“새 대표님 아직 업무 시작하신 건 아니지 않아요? 취임식도 안 하셨잖아요.”
“그러게요.”
직원들은 슬슬 새로운 대표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하나의 소문이 사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얘기 들었어? 이번에 새로 취임한 대표가 개발팀 직원이었다는 얘기가 있던데?”
“새 대표요? 아, 이정우 대표였나요?”
“어 맞아. 개발팀에 이정우 선임이라고 있었잖아. 그 도박으로 재산 탕진했다던. 그 사람이래.”
“그게 말이 되나요? 그냥 동명이인일 것 같은데요.”
처음에 사람들은 헛소문이라 치부하며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개발팀 이정우 선임은 한때 전재산을 도박에 탕진한 미친놈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도박중독자가 새 대표로 취임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에이, 도박이 아니라 코인해서 초대박 났다잖아요. 그래서 퇴사했다던데?”
“정말로? 코인?”
“예. 그래서 개발팀 얼마전에 송별회할 때 이정우 선임이라는 사람이 오마카세 쏴서 난리났었잖아요. 기억 안나세요? 그 막 사진 제가 공유해드렸었는데.”
“아, 봤지. 그게 그 사람이었어? 세상에….”
그러나 이내 최근 이정우 선임에 대한 소문들이 올라오며 새 대표가 개발팀 출신이었던 이정우가 맞을 거라는 이야기가 대두되었다.
정말 새로 취임한 대표가 개발팀 출신의 코인쟁이가 맞단 말인가?
직원들의 관심사가 그쪽으로 쏠려 있을 때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침내 네뷸라 케미컬의 대표, 이정우가 출근을 했다.
* * *
회사로 직접 출근한 건 처음이지만 일을 쉬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싹 물갈이하셔야 합니다. 성재민 라인, 다 쳐내시죠.”
탁세훈 팀장의 조언에 정우도 동의했다.
회사를 좀먹던 암적인 존재들을 이 기회에 쳐내는 게 맞을 터.
그는 곧장 탁세훈 팀장을 통해 성운이노베이션, 아니 네뷸라 케미컬의 인사팀장과 접촉하여 성재민 본부장이라 일컬어졌던 내부인사들을 전부 쳐내는데 집중했다.
회사를 좀먹던 환부를 들어내자 확실히 사내 정치가 수그러들었고, 덕분에 사내 분위기는 나름 수습된 형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우는 첫 출근을 한 것이다.
‘기분 묘하네.’
성태규 대표가 쓰던 대표실로 향한다. 가는 동안 마치 보고라도 드려야 할 것 같은 어색함이 들었지만, 막상 대표실 책상에 앉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것이 진정한 대표의 맛이랄까.
잠시 책상을 쓸어보던 정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비서 호출이었다.
“김 비서님. 오랜만입니다.”
“예, 대표님.”
어색하게 정우에게 인사하는 김 비서. 그는 성태규 대표를 모시던 비서였는데, 한때 정우가 보고를 하러 갔다가 그에게 까인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표정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우가 피식 웃었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김 비서님 안 잡아먹습니다? 하하하.”
“아, 죄송합니다…! 그때 제가 무례를 저질렀던 점 사과드립니다!”
“그때 일이라면, 저 막으셨던 거요?”
“예. 제가 그때 생각이 짧아서….”
“아니요. 김 비서님은 비서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신 것뿐인데요. 일개 직원이 대표를 마음대로 면담하려고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죠. 그러니 개의치 마세요. 다시 한번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김 비서님은 그렇게 행동하시면 됩니다.”
“… 감사합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김 비서.
그런 그에게 정우가 출근 후 첫 임무를 내렸다.
“아무튼 김 비서님 이제 일 시작해볼까요?”
“일이요? 예예, 말씀해주십쇼.”
“배터리사업부 산하 팀장급 이상 인사는 전부 지금 대표실로 호출해주세요.”
“배터리사업부 전부 말씀이십니까?”
“예. 영업팀 제외하고 배터리 개발 관련팀은 전부 호출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공석인 전략기획본부장 자리는 탁세훈 씨가 맡게 될 겁니다. 이 부분 인사 처리 진행할 거니까 서류 준비해주세요.”
“… 예, 알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대표실을 나서는 김 비서.
잔뜩했던 긴장이 스르르 풀어지며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사표를 냈던 영업2팀장의 귀환이라….”
이거 완전 금의환향이잖아?
심지어 개발팀 직원이었던 이정우는 대표로 나타났다.
그 모습이 마치 왕의 귀환과 같다고 느끼며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대표의 첫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