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after coin jackpot RAW novel - Chapter (74)
화장품, 속옷, 옷가지와 쇼핑백, 먹다 남은 과자부스러기 등등 쓰레기인지 짐인지 모를 물건들로 사방이 어지러운 방 안.
아수라장과도 같은 그곳에 한쪽에 간신히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누운 한 여자가 얼굴에 마스크팩을 붙인 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클로 계열의 살상무기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긴 손톱은 손질을 받았는지 네일아트로 반짝였다.
“… 재수 없는 새끼.”
새침한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안예슬.
무언가 짜증이 났는지 그녀는 관리하던 피부에 주름이 생기든 말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왜냐하면 스마트폰에서 전남편의 영상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 저는 테슬라와 유일자동차의 경쟁은 전기차 시장의 활력을 불어넣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두 회사가 만들어나갈 솔리드스타를 탑재한 전기차들, 어떤 전기차들이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지 않으십니까?
기자회견 중인 정우의 모습은 빛이 났다. 고급슈트로 감싼 몸은 섹시하기 그지없었고, 당당한 표정은 자신감이 넘쳤다.
정말 저 남자가 자신이 알던 전남편 이정우가 맞단 말인가.
“… 이혼하지 말걸.”
그가 한때 자신의 침대 옆에 누워서 사랑을 속삭이던 전남편이란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저 빛나는 위치의 옆자리가 내 자리였는데.
그가 타는 차와, 살고 있는 집, 전부 내 것이어야 했을 텐데.
불과 1년도 안 되는 시간만에 그는 너무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버렸다.
이제는 우러러보기도 힘든 압도적인 격차에 안예슬은 그저 속으로 한숨과 후회만 반복할 뿐이었다.
“… 그래도 얼마 안 남았어.”
곧 재산분할 재판이 시작된다.
재산분할 청구를 통해 200억원을 받아내면 그녀의 인생도 전남편처럼은 아니지만 꽤나 잘 살 수 있을 터.
아니, 건물이라도 하나 사놓으면 평생 떵떵거리며 사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녀는 그런 생각으로 자위하며 기자회견 영상에 댓글을 달았다.
-지인 통해서 들은 건데 이정우 대표 성격 겁나 더럽다던데… 전와이프한테 가정폭력 휘두르고 장난 아니었다는데 TV에서는 호인인 척 나오는 게 겁나 역겨운 듯;;
전남편이 잘 나가는 게 꼴 보기 싫어서 단 악플 하나.
이내 어그로가 끌렸는지 대댓글이 수두룩 달리기 시작했다.
└ㄷㄷ ㄹㅇ?
└ㅂㅅ아 ㅂㅁㄱ이나 해
└└ㅂㅁㄱ이 머임?
└└└병먹금이라고 ㅉ 딱 봐도 어그로인 거 모르냐
└└└└아, 병신한테 먹이 금지? ㅇㅋ
└또 뱀심이네 으휴
└저거 PDF 따서 네뷸라에 메일 보내면 고소각 아님?
└└ㅇㅇ 신고해야겠다
└└작성자님 캡처 땀요 ㅅㄱ요
└ㅅㅂ 작성자 이 새끼는 쓸데없는 말 해서 지 신세 조지네
└└최초의 상용화 전고체배터리로 국위선양하는 이 대표 신세 vs 방구석에서 악플 싸지르는 작성자 신세, 누가 더 나은 신세일까
└└└ㄹㅇ ㅋㅋㅋㅋㅋ
└└└작성자 겁나 ㅂㄷㅂㄷ 하고 있을 듯
└└└곧 글삭튀 예정 ㅋ
……
하지만 대댓글은 대부분, 아니 거의 전부가 안예슬에 대한 욕뿐이었다.
“… 씨발! 니들이 뭘 알아!”
짜증이 난 안예슬이 분노를 담아 이정우에 대한 비방성 댓글을 더 달려고 하던 그때였다.
“이년아! 소리 지르지 말고 와서 밥이나 처먹어!”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녀의 엄마가 들어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엄마! 들어올 때 노크하랬잖아!”
“노크는 무슨! 내 집인데 내 맘대로 못 들어가니! 미친 짓 그만하고 밥이나 처먹어!”
“아, 안 먹어! 배 안 고프다고!”
“배가 고프든 안 고프든 끼니가 되면 나와서 얼굴이라도 비춰야지, 이게 뭐니 이게! 으휴, 그리고 이게 방구석이야 돼지우리야! 쉰내 나서 못 살겠다! 누가 여길 보고 여자애 방이라고 생각하겠어! 남이 볼까 겁나 이년아!”
“아 남이사!”
“진짜 이 서방이 천사였네 천사였어. 어떻게 저런 걸 마누라라고 데리고 살았는지… 쯧쯧.”
“아니 거기서 그 사람 얘기가 왜 나와!”
“한심해서 그런댜 한심해서! 망할년, 방구석에서 뻘짓할 시간에 이 서방한테 가서 무릎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지지리 궁상이야! 어우 화딱지 나서 진짜 내가 화병 나서 죽겠다, 죽겠어!”
“아,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러니까 속 좀 뒤집어놓지 마! 존나 빡치네!”
“뭐? 존나? 이년이 지금 니 애미한테 할 소리니!”
눈에 도깨비불을 켠 엄마의 등짝 스매싱에 안예슬이 쫓겨나듯 방을 나섰다.
“나도 여기 오기 싫었어! 나라고 이 망할 집구석 좋아서 있는 줄 알아! 근데 이혼해서 갈 곳 없어 가지고 나도 눈치 보다가 왔는데 반겨주기는커녕 왜 나만 가지고 지랄이야! 오히려 이 서방 욕해줘도 시원찮을 판에 너무한 거 아니야? 나 엄마 딸 맞냐구!”
“니 꼬라지만 봐도 딱 답이 나오는데 이 서방 욕을 왜 하니! 내가 너 같은 거 낳고 미역국을 먹었다니 후회막심이다 이년아!”
“뭐? 지금 말 다 했어?”
“그래 이년아! 일도 안 하고 이 나이에 니 엄마한테 용돈 받아서 살고 싶니? 그리고 용돈 받은 걸로 머리랑 손톱 꼬라지가 이게 뭐야 이게!!! 그리고 이 쇼핑백은 또 뭐야! 너 또 옷 샀어?”
“아니 엄마 그건…!”
곧 재판일이 다가오기에 이정우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 외모 관리에 투자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엄마의 속사포 같은 바가지는 멈출 줄 몰랐다.
“제발 좀 정신 좀 차려라 정신 좀! 니 나이가 몇 개니! 이제 곧 계란 한판인데 건실하게 살아야지 아직도 철부지 어린애처럼 살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뭐 어때서!”
“니 꼬라지를 봐라! 이게 정상이야? 방구석 꼬라지를 좀 봐!”
엄마의 말에 방구석을 보았다. 안예슬 그녀가 보기에도 좀 심하긴 했다.
“… 치우면 되잖아 치우면!”
“말만 하지 말고 움직이라고 좀! 아오 진짜 이 서방이 보살이지, 어떻게 저런 년을 1년이나 데리고 살았대. 으휴 속 터져!”
“… 엄마 그 말 후회하게 될걸?”
“후회는 무슨. 제발 후회하게 좀 해줘라 망할 년아! 제발 조오오옴!!!”
“아 때리지 말라고!”
쥐잡듯 잡는 엄마의 성화에 안예슬은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빌라 골목을 나서는 길. 불륜 영상이 유출되고 한동안 얼굴이 팔릴까 무서워 두문불출했지만, 이제는 안다.
세상 사람들은 의외로 남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얼굴을 드러내놓고 살아도 그녀가 성인사이트에 올라온 불륜영상의 주인공이라는 걸 눈치채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지금은 당당하게 걸을 수 있었지만, 이 알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은 어쩔 수 없다.
담배 한 개비가 간절해 품을 뒤져보지만 없다.
“… 짜증나.”
지갑도 두고 나와 빈털터리라서 편의점 가기도 여의찮다.
하나하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가지 긁는 엄마도, 잘 나가는 전남편도, 초라한 자신의 신세도.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얼마 뒤 있을 재판으로 뒤집힐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예슬은 버틸 수가 없었다.
“… 얼마 안 남았어.”
기다려 모두.
돈 받아서 모두 나를 부러워하게 만들어줄게.
수백억을 받고 나서 그제야 엄마가 후회와 함께 매달려도 매몰차게 내치는 못된 상상을 하며 안예슬은 추위에 오돌오돌 떨었다.
* * *
재판 당일이 밝았다.
안예슬은 변호사와 함께 가정법원을 방문했는데, 어떻게 정보를 구한 건지 법원에는 기자들이 한가득이었다.
“안예슬 씨 되십니까?”
“네뷸라 케미컬 이정우 대표 전 아내분 맞으시죠?”
“재산분할 소송 금액이 200억원 대라고 들었는데요. 이정우 대표와 이혼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안예슬 씨, 한 말씀 해주십시오!”
폭풍처럼 쏟아지는 질문들을 피해 겨우겨우 법원 재판장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그녀는 초조한 얼굴을 애써 감추며 원고석에 착석했다.
‘꾸미고 오길 잘했어.’
기자들이 올 거라고는 예상 못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힘을 준 화장과 옷차림은 법원이 아닌 패션쇼에 나가나 착각이 들 만큼 화려했다. 왜냐하면 전남편에게 꿀리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전남편이 자신을 놓친 걸 후회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 그리고 다시 자신을 붙잡아주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심정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봐주길 원했던 전남편 정우는 피고석에 온데간데없이, 그의 변호사로 보이는 심문철 변호사만 자리하고 있었다.
“곧 재판이 시작됩니다. 법정 내에 계신 모든 분들께서는 전화를 꺼 주시고, 재판 중에는 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법원경위가 방청석을 둘러보며 안내했다.
그 직후 세 명의 판사들이 입장했다.
보통 재산분할청구는 가정법원의 단독판사가 재판을 진행하지만, 정우와 안예슬의 재산분할 청구 소송의 경우 청구금액이 무려 200억원인지라 배석판사 2명이 추가로 포함된 세 명의 판사가 합의부로 재판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번 재판을 담당하게 된 고관석 주심판사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제X민사부3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2017가합591XXX호 재산분할청구 건의 원고 안예슬 씨와 피고 이정우 씨 나오셨습니까?”
“원고 안예슬 나왔습니다.”
“피고 이정우 대리출석입니다.”
“확인했습니다. 원고 및 피고 소송대리인은 어느분이 나오셨습니까?”
“원고 소송대리인 김지석 변호사 출석하였…….”
……
형식적인 확인 절차가 끝난 후 본격적인 재판이 진행되었다.
“원고는 피고에 대하여 어떤 청구를 하고 있고, 왜 그런 청구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원고측인 안예슬의 김지석 변호사가 나섰다.
“원고는 피고에게 재산 200억원을 분할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원고는 2016년 피고와 결혼하여 약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해왔습니다. 이후 2017년 2월 전격적으로 이혼에 합의하였으나, 적절한 재산을 분할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원고의 권리인 재산분할권 청구를 신청하는 바입니다.”
“피고는 원고의 주장에 대해 답변하십시오.”
“원고의 주장대로 피고가 이혼에 합의한 부분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혼 전 원고의 재산은 3천만원이 전부였기에 200억원을 청구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현재 원고가 이룩한 부와 자산은 이혼 이후 형성된 것입니다.”
“원고는 피고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시겠습니까?”
“피고측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피고측은 원고와 협의 없이 3천만원의 재산을 암호화폐에 투자하였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피고측 반론하세요.”
“암호화폐에 일부 투자하였으나 이혼 당시까지 피고는 암호화폐로 이득을 취한 바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피고의 자산내역서, 부채증명서, 소득증명서를 증거로 제출합니다.”
암호화폐 얘기가 나오자 고관석 주심판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피고측 변호사가 제출한 증거엔 암호화폐 자산에 대한 증거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암호화폐, 가상화폐 등에 관하여 법으로 규정된 부분이 없었기에 피고에게 보유한 암호화폐 자산에 대한 거래 내역서 제출을 강제할 수 없었다.
“피고측 증거 확인했습니다. 추가로 피고측의 이혼 전 암호화폐 거래내역서 및 자산 보유현황에 대한 증거를 제출할 수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해당 내역은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고 판사가 슬쩍 물어봤지만 역시나 피고측은 영리하게도 불리한 진술은 거부했다.
“원고측 이 부분에 대해 덧붙일 의견 있습니까?”
“… 없습니다.”
“재판장님, 그럼 저희쪽에서 변론해도 되겠습니까?”
“피고측 말씀하십시오.”
한번 꼬리를 잡은 심문철 변호사는 오히려 원고측을 향해 맹공에 나섰다.
“확인하셨다시피 이혼 당시의 피고는 200억원이나 되는 자산이 없어서 2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의 재산분할권 청구는 무효입니다. 하지만 원고 측은 파렴치하게도 이런 사실을 무시한 채 성공한 피고의 자산을 노리고 재산분할 청구소송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여기 증거로 원고와 피고 명의의 계좌 내역서를 제출하겠습니다. 이 증거는 원고측이 사치가 심하여 피고의 재산을 탕진하였으며, 가정유지 및 형성에 기여한 부분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심문철 변호사가 미리 준비해온 자료를 제출하자, 김지석 변호사가 이의를 제기했다.
“원고가 사치가 심했다고 피고측이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을 호도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원고는 피고와 함께 맞벌이를 하면서 가정일도 돌봐왔습니다. 오히려 가정 파탄의 책임은 피고측에 있습니다. 이혼 직전 피고가 암호화폐에 투자하기 위해 협의 없이 가정 내 가전제품 및 생활용품과 고가의 사치품을 임의로 처분한 점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 하지만 해당 물품 전부 피고의 돈으로 구매하였기에 본인 소유의 물품을 판매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혼수 및 물품 구매내역서 제출합니다.”
원고측 김지석 변호사의 반론에 심문철 변호사가 예상했다는 듯 준비한 증거로 맞받아쳤다.
준비한 수가 허무하게 무너지자 김지석 변호사가 살짝 당황할 때, 심문철 변호사가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듯 곧바로 필살기를 꺼냈다.
“이혼시점의 재산 수준 비교를 떠나서 애초에 이번 청구 소송은 성립이 될 수 없습니다. 원고측은 이혼 이후 피고와 재산분할권청구 포기각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때 작성한 각서 사본을 제출하겠습니다.”
재산분할권청구 포기각서를 제출하자 재판장이 술렁였다.
보통의 경우 재산분할권은 이혼 이후 생기는 권리이기 때문에 재산분할권청구 포기각서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혼 이후에 작성했다는 재산분할권청구 포기각서의 존재는 원고측에 엄청나게 불리한 진술이었다. 아니, 그 자체만으로도 이번 청구소송을 원고 기각해도 무방할 정도의 증거였다.
‘… 원고측이 바보가 아닌 이상 재산분할권청구 포기각서가 있는데 소송을 진행하지는 않았을 텐데?’
너무나도 강력한 증거였기에 고관석 판사는 혹시 피고측이 실수로 잘못 알고 주장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실수라고 볼 수 없는 게 무려 국내 최고의 로펌 심앤장 출신의 변호사의 주장이었다.
피고측 증거물을 스윽 살핀 고관석 판사가 원고에게 물었다.
“재산분할권청구 포기각서를 작성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반론 있습니까?”
“있습니다. 이는 원고의 법의 무지함을 이용해 작성을 강요한 것입니다.”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공동 합의에 의해 작성한 각서를 법에 무지하였다고 주장하여 계약 효력을 무효화하려는 원고측의 주장은 현존하는 모든 각서의 효력을 의심케 하는 발언이라고 봅니다.”
“인정합니다. 원고측 변론은 수용하지 않겠습니다.”
“… 음.”
김지석 변호사가 신음을 흘렸다.
피고측 변호사가 심앤장 출신이라는 것에서부터 긴장했다. 확실히 심앤장 출신답게 심문철 변호사의 변론은 빈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재산분할권청구 포기각서에 대해 나왔을 때는 순간 희망이 보였었다. 각서의 작성시점에 대해서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 이혼 이후에 작성했다고?’
의뢰인인 안예슬로부터 그런 얘기를 전혀 듣지 못했기에 김지석 변호사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허탈했다.
만약 재산분할권청구 포기각서를 이혼 시점 이후에 작성했다면 이 재판은 보나마나 피고측 승리로 끝날 테니까.
“… 변호사님?”
원고측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안예슬이 불안한 듯 김지석 변호사를 불렀다.
그녀도 아는 것이다. 현재 재판 과정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이대로 끝나면 그녀의 패소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니까.
하지만 뒤늦게 재산분할권청구 포기각서가 이혼 이후 작성되었다는 걸 알게 된 김지석 변호사는 이미 반쯤 재판을 포기한 뒤였다.
결국 의미 없는 변론들이 오고 간 채 최종변론이 시작되었다.
“최종변론을 진행하겠습니다. 원고는 최종변론하시기 바랍니다.”
“… 2017년 2월 5일 원고는 피고와 이혼하면서 재산분할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법에 무지한 원고를 이용하여 재산을 나눠주지 않으려는 피고측의 졸렬한 수이며, 원고는 정당하게 재산을 분할받을 권리가 있음을 다시 한번 주장하는 바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피고도 최종변론하십시오.”
“원고측의 변론은 억지입니다. 법에 무지하다는 것이 면죄부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법에 대한 무지를 호소하며 안면몰수하고 피고의 성공에 기생하려는 원고측의 파렴치함에 개탄하는 바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효력이 없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여 피고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최종변론이 끝나자 고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측은 더 주장하실 것이 있나요?
“… 원고는 없습니다.”
“피고도 없습니다.”
“이상으로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2017가합591XXX 재산분할권청구 소송의 변론을 종결하겠습니다. 재판부가 합의를 한 다음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합의를 위해 잠시 휴정하겠습니다.”
휴정을 선언한 고 판사는 배석판사들과 함께 퇴장하여 회의를 시작했다.
그들은 피고측이 제출한 증거를 신중히 살폈다. 피고측이 주장한 대로 재산분할권청구 포기각서가 진짜 효력이 있는지를, 혹시나 실수가 아닌지를.
그러나 이변은 없었다.
심문철 변호사가 증거로 제출한 각서에는 시간까지 적혀 있었는데 확실히 이혼 이후 시점이 분명했다.
“음… 포기각서의 존재 때문에 재산분할권청구가 의미가 없어졌네요.”
“각서뿐만 아니라 증거만 봐도 피고측의 압승입니다. 재산형성 기여도 부분에 있어서 원고측의 기여도는 미미한, 아니 오히려 손해를 끼친 수준이에요. 그에 반해 피고측은 기여도가 압도적이고 이에 대한 증거도 확실하고요. 재판장님, 이거 더 볼 것도 없겠는데요?”
“… 그렇네요.”
배석판사들과 잠시 의논한 고관석 주심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결정은 내려졌다.
* * *
잠시 후 휴정이 끝나고 재판이 재개되었다.
세 판사가 입장하자 모두가 긴장했다.
과연 선고는 어떻게 될 것인가.
모두가 어느정도 그 결과를 예상하고 있는 가운데 고관석 판사가 입을 열었다.
“수원지방법원 안양지원 2017가합591XXX 재산분할권청구 건의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먼저 판결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재산형성 기여도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원고와 피고의 결혼 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게다가 이혼 사유였던 원고의 사치로 볼 때 피고의 재산형성에 기여했다고 보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원고가 피고의 재산 200억원을 청구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둘째, 원고가 이 사건 약정에 따라 피고에게 200억원을 청구하려면, 이혼 시점에 피고에게 200억원이라는 자산이 있음이 명시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해당 시점의 피고는 200억원 이상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기에 이 사건의 약정은 무효입니다.
셋째, 원고와 피고는 이혼 이후 서로 협의하여 재산분할권청구 포기각서를 작성하였습니다. 해당 각서의 작성 시점은 이혼 이후인 바, 각서의 효력이 존재하기에 원고는 재산분할 권리를 상실하였고, 이에 따라 피고는 원고에게 재산을 분할해줄 의무가 없습니다.
결국, 원고의 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다음과 같이 판결을 선고합니다.”
고관석 판사가 모두를 둘러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주문,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안예슬의 가슴이 쿵 떨어졌다.
그 한마디는 그녀가 쏟아부은 인지대 7천만원이 공중분해되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갈 때, “이상으로 재판을 마치겠습니다”라는 재판장의 폐회선언으로 재판이 마무리되었다.
재판부가 퇴정하고.
심문철 변호사가 당연하다는 기쁜 얼굴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재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하하, 당연히 이겼죠. 원고 청구 기각 판결 받아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하하하. 오, 성공 보수 주신다구요? 너무 쉬운 의뢰라 받기가 미안해지는데요? 에이, 주시면 받아야죠. 하하하. 네, 특이사항 생기면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항소요?”
정우에게 전화를 하던 심문철 변호사가 안예슬 쪽으로 다가왔다.
“저, 혹시 항소하실 건가요? 하면 저야 땡큐긴 한데.”
심문철 변호사가 빙글거리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지금 누구 놀려요?”
“아, 불쾌하셨다면 미안합니다. 그런데 좋은 게 좋은 거지 않습니까. 하하하, 피차 피곤할 거 없이 이 자리에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네요.”
“… 어이가 없어서 정말. 김 변호사님,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변호사님만 믿었는데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안예슬이 애꿎은 자신의 변호사 김지석에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김지석 변호사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히려 패소의 책임은 제가 아니라 의뢰인 분에게 있으신데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뭐라구요?”
“재산분할권청구 포기각서, 그거 이혼 이후에 작성했다고 왜 제대로 말 안 했습니까? 그것만 말씀해주셨어도 이번 변호 맞지 않았을 겁니다. 애초에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는데 이게 무슨 뻘짓인지….”
“네? 아니 변호사님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변호사님한테 수임료를 얼마나 드렸는데!”
“그러니까 드린 말씀입니다.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었으면 굳이 시간과 비용을 들일 필요도 없었을 텐데 이게 뭡니까?”
“변호사님이 진 거를 지금 저한테 떠넘기시는 거예요?”
“제가 진 게 아니라 의뢰인님의 실수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죠.”
“지금 말 다했어요?”
“예. 다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수임료 받은 값어치를 했으니 더 이상 볼일 없습니다. 혹시 항소하실 거면 다른 변호사분 찾아보세요. 뭐, 맡으려는 변호사도 없겠지만. 에이, 괜히 맡아서 커리어만 망쳤네.”
짜증이 난 듯 김지석 변호사가 훌쩍 떠나버렸다.
안예슬은 벙찐 얼굴이었는데, 그런 그녀를 보며 심문철 변호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뭐, 안 봐도 항소는 어려우시겠네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심문철 변호사도 떠나고, 홀로 남겨진 안예슬은 미칠 지경이었다.
재산분할 받을 줄 알고 잔뜩 대출받아 치른 인지대 비용 7천만원.
그 7천만원은 무슨 수로 갚는단 말인가.
심지어 소송에서 이길 줄 알고 일도 안 하고 카드론만 실컷 받아 쓴 상태라 갚아야 할 대출금은 훨씬 더 많았다.
안예슬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녀에게 닥친 불행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 재판이 기자들에 의해 꽤나 주목을 받았다는 것을.
그들은 [네뷸라 케미컬 대표를 놓친 희대의 바보>라는 자극적인 타이틀로 기사를 작성 중이었다.
* * *
“… 변호사님 수고하셨습니다.”
통화를 마친 정우는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그 징글징글하던 안예슬과의 악연의 고리를 떼어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꽤나 고생할 거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인지대 비용을 치렀으니 갚으려면 등골이 휠 터.
그 정도면 전와이프의 불륜에 대한 죗값으로 충분하겠지.
정우는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고 그녀에 대한 기억과 관심을 지워버렸다.
이제 한물 가버린 악연에 집중하기에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폭스바겐과의 미팅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배터리 납품 및 개발에 관한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던 마틴 뮐러 CEO가 표정을 고친 후 본론을 꺼냈다.
“미스터 리,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뷸라 케미컬을 저희에게 넘기시죠. 100억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뭐?
몇백억은 내놓으라던 전 와이프보다도 더한 도둑놈이 나타났다.
오